<8화>
놀리는 건지 능글거리는 목소리였지만,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아래는 침대 시트까지 적실 정도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제 몸을 덮고 있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 때문인 건지, 아니면 줄곧 짝사랑해 왔던 도겸과 몸을 겹치게 되어 이렇게 된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벅지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단단하고, 크고, 길쭉한……. 그래, 마치 몽둥이 같은 촉감이었다.
도겸은 아직 옷을 한 꺼풀도 벗지 않은 채였다. 침대 위에 달리 뭔가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는 건……. 본능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는데, 시야에 들어온 모습에 그대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의 손길 아래에 흐느적거리던 서원이 갑자기 뻣뻣하게 굴자, 도겸이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윤서원?”
“아, 안 돼요…….”
“뭐가?”
“저, 저런 거…… 들어올 리가 없다고요…….”
서원이 울상을 지으며 도겸과 눈을 맞췄다.
옷을 벗지 않았어도 얼마나 커다란지, 윤곽이 옷 너머로 다 보였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역시 흥분하면서 크기를 키워 모습을 흉흉하게 드러낸 것 같았다.
저런 걸 어떻게 넣어? 게다가 방금까지 안 풀고 그대로 넣어도 되겠다고 했던 터라,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고 넣을까 봐 두려움이 몰려왔다.
페로몬 파트너 계약을 맺을 때 제가 이런 것 때문에 내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누가 보통 저런…… 흉, 흉기는 아니지만 저런 걸 달고 다니냐고. 우성 알파들은 다 저런가?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혼란스레 대답하는데, 도겸이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 이거.”
“안, 안 아프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걱정하지 마. 안 아프게 해 줄……, 노력할 테니까.”
그는 확답은 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하더니, 서원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삽입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나였던 손가락은 어느새 둘, 셋으로 늘어났다. 안 아프게 노력해 보겠다고 한 것이 거짓말이 아닌 듯 꽤 오랜 시간을 푸는 데에 집중하기만 했다. 녹진하게 아래를 풀은 후에야 그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원은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가지듯 한 성관계에 관한 환상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게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해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행위라고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한 것만큼 쾌감만 주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와의 행위에서 괴로울 정도로 많이 느끼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프기도 했다.
서원을 깔고 뭉개듯 위에 올라탄 도겸의 몸은 너무나도 커다랗고 육중했다. 힘도 체력도 뛰어난 체질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끝낼 줄을 몰랐다. 끝내 서원은 끝을 보지 못하고 기절해 버리기까지 했다.
페로몬을 빼기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을 만나 이 짓을 해야 한다고 하던데, 이러다 제가 복하사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였고……. 맨 처음 계약 당시 나눈 대화와 달리, 그와의 관계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이어졌다.
그런 관계는 무려 6년 동안 별 탈 없이 이어졌었다.
* * *
“윤서원. 거기서 뭐해?”
“아, 도련님.”
공항 여객터미널 안. 서원이 한 커피숍 앞에 가만히 서 있자, 도겸이 서원의 곁에 서며 물었다.
서원은 도겸을 바라보며 대답하려다, 커피숍 직원이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시선을 거뒀다.
테이크아웃을 위해 컵 캐리어에 커피 세 잔을 담은 서원은, 그중 하나를 꺼내 도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제거 사는 김에 같이 샀어요. 도련님은 아메리카노 맞죠?”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그가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은 다 알고 있었다.
서원에게 커피를 받은 도겸은 자연스럽게 받아들다가, 서원의 손에 들려 있는 커피 두 잔을 보고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배 비서 것은 왜 샀어.”
“아…….”
서원과 도겸이 마실 커피를 빼고 남은 한 잔은 그를 보좌하는 배정훈 비서의 것이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도겸은 가업을 물려받아 백화점을 운영하는 전무이사가 됐다.
아직 서른한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워낙 탄탄한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전 세계 일 퍼센트만 갈 수 있다는 대학교를 한 번에 들어갈 정도로 비상한 머리, 그리고 우성 알파라는 형질이 가산점이 되어 금방 전무이사라는 자리에 올랐다.
젊은 나이, 뛰어난 능력, 그리고 잘생기기까지 한 탓에 그는 현재 꽤 이목을 끄는 인물이 됐다. 인터넷에는 그의 재산을 빗대어 일 초에 얼마를 벌어야지 저 정도의 재벌이 될 수 있는지 계산을 하는 유머 글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어째서 비서에게 줄 커피 한 잔을 샀다고 저렇게 아니꼬운 얼굴을 하고 있는지.
“배 비서님도 피곤하실 테니까요.”
사실은 도겸이 피곤해 보여서 커피를 주고 싶은데, 그의 것만 사기에는 배 비서님에게 미안해서 같이 산 거였지만…….
서원이 적당히 둘러대자, 도겸은 이유를 들으니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서원을 타이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부턴 배 비서 것은 사지 마. 챙겨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먹고 다니니까.”
“…….”
그런 이유로 배 비서님 것만 쏙 사지 말라고 하기에는 도겸도 만만치 않게 잘 먹고 다니지 않나……. 돈도 많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매번 왜 저렇게 심통을 부리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서원이 차마 앞으로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도겸은 서원을 내려다보다 배 비서에게 주려고 했던 커피를 채가며 말했다.
“이건 내가 전해 줄게.”
“엇, 제가 드려도 되는데…….”
“곧 비행기 시간 되겠다. 얼른 가자.”
서원이 비교적 한가한 제가 배 비서님께 전달해드리겠다고 팔을 뻗었지만, 도겸은 그런 서원을 가볍게 피하곤 먼저 앞장섰다.
서원은 그런 도겸의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다, 한숨을 쉬곤 공항에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비행기에 오를 시간이 20분이나 넘게 남아 있는데, 왜 저렇게 급한지 모르겠다.
서원은 커피를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한 초대장을 꺼냈다. 미국의 한 호텔에서 파티와 더불어 신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니, 도겸을 초대한다는 말이 영어 필기체로 고급스럽게 적혀 있었다.
도겸이 전무이사로 있는 백화점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뻗어 있는 탓에 해외에서 오는 비즈니스적 파티 초청이 많았다. 오늘은 미국의 한 브랜드에서 파티 초청이 들어왔다.
고작 페로몬을 풀어줄 파트너가 해외까지 따라갈 필요까지 있나 싶지만, 도겸은 늘 이런 스케줄에 서원을 데려갔다. 그의 곁에 상시 대기하며 언제든지 페로몬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서원의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인이 아닌 파트너로서 함께 간다는 것이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그것이 서원이 선택한 길이었다.
“윤서원, 안 따라와?”
“아뇨, 가요.”
도겸이 가만히 서 있는 서원을 이상하게 보며 묻는 말에, 서원이 바삐 그의 뒤를 쫓아갔다.
서원은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가 6년 동안 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 곁에 두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파트너 자리를 지켜 왔다.
* * *
장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미국. 미국 땅을 밟았다는 감상에 젖기 전에 바삐 향한 곳은 유명한 호텔이었다.
도겸은 앞장서서 룸의 문을 열어 주더니, 서원에게 보란 듯 말했다.
“방 좋지?”
둘러볼 것도 없이, 그와 함께 오는 곳은 늘 좋은 곳이었다. 대부분 그를 초청하는 브랜드에서 방을 잡아 주는 편이었는데, 도겸은 VIP였으니 호텔에서도 가장 좋은 방을 잡아 줄 때가 대다수였다.
그와 파트너 생활을 하며 따라다니다 보니, 덩달아 보는 기준이 조금 생겼다. 이번에 온 호텔은 기준치보다 훨씬 좋았다. 넓고,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무엇보다 창밖으로 보이는 뷰가 굉장히 좋았다.
“예쁘네요.”
“심심하면 산책도 하고. 배고프면 룸서비스를 부르던가, 파티장에 음식이 있으니 가져다 먹어도 돼.”
“네.”
도겸의 설명에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런 서원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쉬어. 비행기 타느라 피곤했을 텐데.”
그는 서원을 룸에 데려다준 것도 겨우 시간을 내준 거였다는 듯, 금방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혼자 룸에 남은 서원은 정장을 입은 도겸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봤지만, 도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서원은 시선을 떼고 침대에 누웠다.
“산책은 무슨 산책…….”
서원은 힘없이 풀썩 누우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파티가 있을 때마다 대부분 방에 있는 편이었다. 도겸의 파트너 자격으로 파티장을 구경해도 됐지만 딱히 즐기는 성격도 못 되었고, 무엇보다 도겸이 몸을 겹치고 싶어 하는 것은 밤낮 시간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방에서 상시 대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외를 나와도, 창밖의 뷰가 아무리 좋아도 새장에 갇힌 새처럼 멀리서 보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호텔 방에 콕 박혀서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바깥 구경을 하거나 푹신한 침대에서 낮잠 자기, 아니면 텔레비전이나 핸드폰을 보면서 놀기……. 간혹 수영장이 있는 곳이면 수영할 때도 있긴 했지만, 저번에 수영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더니 도겸이 예민하게 굴어 그마저도 안 하게 됐다.
오늘은 그 무엇도 당기는 게 없었고, 장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하기만 했다. 서원은 천장을 바라본 채 한숨을 내쉬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