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 아뇨. 불편한 게 아니라……, 그때 이후로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같은 이유로 불편하긴 했지만, 서원은 황급히 부정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묻고 싶기도 했고.
그를 보지 못한 몇 년 동안, 서원은 종종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울컥 억울하기도, 슬프기도 했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서원의 물음에 도겸은 큰 이유는 없었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어.”
“…….”
할 일……. 아무리 많다고 한들, 몇 년간 인사 한 번 못 나눌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을 텐데.
그에겐 입맞춤이 별거 아니었던 걸까. 살결만 살짝 붙었다 떨어트린 뽀뽀 수준이었지만…… 제게는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큰 사건이었는데.
저만 그와의 일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서원은 마음이 좋지 않아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를 불렀는지는 몰라도, 어서 용건만 나누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서원이 온몸으로 불편하다는 기색을 보이자, 도겸은 그런 서원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본론을 꺼냈다.
“뭐, 그건 됐고. 저택에서 나갈 줄은 몰랐는데.”
그는 서원이 저택에서 나간다는 걸 의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서원은 도겸이 그런 걸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의외라고 느꼈다. 제가 저택에서 나가든 말든 그와 무슨 상관이라고?
예전 같았으면 ‘혹시 제가 저택에서 나가는 게 아쉽나?’하고 기대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날은 실수였다’라든지, ‘형질을 생각해 봤을 때 더는 그 좁은 방에 같이 있을 수가 없으니, 상황을 이해해 달라’라든지, 한마디만 했었더라면 달리 생각했겠지만 아니니까. 서원은 기대를 버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성인이 되면 나가기로 이야기가 돼 있었습니다.”
“흠……, 그래? 여기서 나가면 어디서 지낼 건데?”
“대학교 근처로 자취방을 얻을 생각입니다.”
“대학교? 어디 들어갔는데?”
“한국대학교입니다.”
어느 대학교에 들어갔냐는 물음을 무례하게 받아들일 사람도 있겠지만, 서원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공부만큼은 열심히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가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사립대학교에 붙으면 돈이 모자라 못 다니게 될지도 모르니 국립대학교를 가야겠다고 목표를 확실히 잡기도 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으나, 도겸에게서 나온 반응은 제가 예상한 것과 정반대였다.
“별로 취업할 곳은 없겠네.”
“…….”
무슨 그런 막말을……. 한국대면 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교였다. 그렇지만 그는 전세계에서 손에 꼽는 대학을 나와서 그런지 그게 눈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의 기준에 비교하자면 당당해질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긴 하다. 신분이든 형질이든, 뭐든…….
당당하게 펴고 있던 어깨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서원이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다물고 있는데, 도겸이 자신의 턱을 손으로 쓸며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열성 오메가에 그런 대학교면 받아줄 곳이 있긴 해?”
“…….”
공기업은 오메가, 특히 열성 오메가를 차별하지 말자며 형질을 블라인드로 해서 뽑기도 했지만, 그런 걸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차별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부분의 기업은 오메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신체적으로 베타나 알파가 더 건강하고 뛰어나기도 했고,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알파였기 때문이었다.
“열성 오메가가 취업 시장에 불리한 건 알지만……, 뭐든 할 생각입니다.”
“뭐든?”
“네.”
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교나 형질을 비하당해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뭐든’ 할 생각이었다.
서원의 엄마도 무릎이 좋지 않아져 곧 퇴직할 때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지금은 고시원이든 원룸이든 구해 지낸다지만 엄마가 나오면 둘이 살 만한 집을 구해야 했다.
오랜 시간 저택을 위해 일했으니 엄마가 벌어 놓은 돈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몇 년간은 얼굴도 모르는 아빠의 빚을 갚느라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좁은 방에서 숙식하며 일하는 것이고. 머지않은 미래를 위해 빠듯하게 벌어 둬야 했다.
서원은 그런 생각으로 단호히 대답했다. 도겸은 그런 서원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몸을 기울여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마침 내가 오메가가 필요한데, 네가 할래?”
“네?”
“어떤 일보다도 돈은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 같은데.”
“…….”
일 층에서 가정부들이 다 함께 서 있을 때, 왜 저를 콕 집어서 오라고 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이런 말을 하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원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무의식중에 예전에 좋아한 적 있던 그였기에, 저를 정 때문에 불렀기를 기대하기라도 한 걸까.
조금. 아주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이게 맞았다. 서원은 애써 얼굴에 감정을 지우고 그에게 물었다.
“어떤 일을 하는 건데요?”
“페로몬 체증을 빼는 일.”
“…….”
도겸의 말에 서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눈앞의 도겸은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알파는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빼 줘야 했다. 평소 공기 중에 페로몬을 방출하거나 자위를 해서 조금씩 빼는 방법도 있지만, 우성 알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주기적으로 오메가와 성관계를 맺는 게 좋다고 했다.
페로몬을 해소하지 않으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린다고……. 가장 뛰어난 형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패널티 비슷한 것이라고 했고, 그래서 돈이 많은 우성 알파들은 페로몬을 해소하기 위한 상대를 따로 구한다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섹스 파트너……,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입에서 섹스라는 말이 나오니까 조금 안 어울리네. 굳이 말하자면 페로몬 파트너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단순히 즐기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
서원은 제가 뭔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싶어 물었지만, 도겸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진짜일 줄이야……. 도겸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워낙 어릴 때이기도 했고 감히 그와 몸을 겹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상상력을 발휘해도 최대가 그와 입술을 살짝 맞췄던 그때의 기억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도련님이 저에게 파트너를 제안하다니. 오랫동안 얼굴도 한 번 보지 않은 서먹한 사이에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갑자기……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오메가보다는 낫지 않나? 저택에서 지내기도 했으니 믿을 만하고.”
“…….”
서원은 도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물론 아예 모르는 남보다야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도겸이라면 저보다 훨씬 좋은 오메가 상대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저는 너무 보잘것없는 파트너였다. 열성이라 페로몬도 옅고, 그렇다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고작 그런 이유 하나뿐으로 저에게 파트너를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달리 이유가 있는지 도겸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가끔, 그런 오메가들이 있어. 알파의 정자를 받아서 임신하려고 하는 놈들이.”
“…….”
“물론, 피임약도 먹긴 하겠지만 넌 열성 오메가니까 임신할 확률도 낮지.”
드물게 그런 걸 노리는 오메가가 있기는 했다. 서원은 그러게 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파트너로 둬서 그런 일을 일으키는지 어이없어했지만……. 아무튼 있긴 했다.
특히 도겸의 아이를 품는다는 건 복권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특별한 일일 터다. 그가 우성 알파인 만큼 아이도 우성 알파일 확률이 높았고, 집안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데다, 그는 그 집안의 후계자니까.
알파가 페로몬 체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메가와 몸을 겹쳐야 하고, 열성 오메가는 임신할 확률이 단 일 퍼센트도 되지 않으니 그의 말이 아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상대라는 거군요.”
“그래. 그리고…….”
도겸은 말하다 말고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데, 도겸은 대뜸 서원의 멱살을 잡더니 자리에서 억지로 일으켰다.
마치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에 서원이 움칠 어깨를 움츠리자, 도겸이 서원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 페로몬 하나는 마음에 들거든.”
“…….”
“미국에 가서도 생각났을 만큼.”
도겸은 서원의 페로몬을 탐닉하기라도 하듯 숨을 깊게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