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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136)

<5화>

“어서 오십시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용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굽혀 그를 환대했다.

서원은 도겸을 눈에도 담기 전에 부랴부랴 따라서 허리를 굽히고 그를 반겼다.

슬그머니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펴고 서고 나서야, 서원은 도겸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서원은 그를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스물다섯 살이 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어릴 때에도 그는 덩치도 아이답지 않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지금은 더 그랬다.

저도 그때보다 키가 더 컸는데도 그도 함께 컸는지, 여전히 고개를 조금 젖혀야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피부는 공부만 하느라 하얗기만 했던 때보다 더 그을렸으며, 젖살이 빠졌는지 이목구비는 훨씬 짙어졌다. 곧은 눈썹이며 예민한 심성을 담은 듯한 눈매, 날렵한 콧날과 턱선이 섬세한 예술가가 공들여 만들어낸 것 같이 조화로웠다.

서원은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노출 하나 없이 검은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이뤄져 있을 게 보였다. 드넓은 어깨, 두꺼운 흉통과 허벅지는 누가 봐도 우성 알파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모습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서원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데, 사모님이 사용인들에게는 보인 적 없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도겸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웰컴! 우리 아들.”

도겸의 키가 워낙 크다 보니, 그가 허리를 숙여 주고 나서야 사모님은 그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을 수 있었다.

도겸은 간만에 부모님과 재회하는 것일 텐데도 이런 행동이 낯간지러운지, 괜히 투덜거리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세워 놓고 그래요?”

“세워 놓은 게 아니라, 다들 우리 아들 환영해 주려고 나온 거지.”

“얼굴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무슨.”

사모님의 말에 도겸이 뻔하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도겸은 사모님과의 포옹을 푼 뒤, 주변을 둘러봤다. 스무 살에 유학을 떠나고 자그마치 6년 만에 돌아온 저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두 눈으로 담는 듯했다.

서원은 저택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이 멋있으면서도, 왠지 낯설고 반가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순간 서원과 그의 눈이 떡하니 마주쳤다.

“…….”

서원은 불에 덴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심을 담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게 들켰을까 봐 괜히 찔린 탓이었다.

빠르게 회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시선을 읽혀 버렸는지 도겸의 날카로운 시선은 서원에게 고정됐다.

새카만 눈동자가 서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맹수가 발견한 먹이를 눈으로 탐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쳐다보는 시선에 등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 텐데, 도겸이 저를 보고 꺼려 할까 봐 두려웠다. 괜히 따라 나왔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 보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그와의 추억들을 미화할 수도 없게 됐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저를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날, 서원이 발현 열로 끙끙 앓다가 오메가 페로몬을 흘려서. 그래서 그가 성적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로 입맞춤을 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서원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피해 본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서원은 그날 앓아누워 있다가 입맞춤을 당한 거였고, 무엇보다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걸 수도 있는데.

억울함에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오긴 했지만, 희망 하나까지도 완전히 꺼져 버린 느낌이었다.

고개를 더 아래로 푹 숙이는데, 위에서 도겸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런 사람이 있었나?”

“아, 도겸이는 모르지? 너 어렸을 때 재워 주시던 아주머니의 아들인데, 벌써 이렇게 컸어.”

도겸의 물음에 사모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도겸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쟤가 그때 그 조빱이라고?”

“…….”

뭐지. 알아본 것도 아닌데 왜 쳐다본 거고……. 왜 나를 조빱이라고 부르는 거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서원이 고개만 푹 숙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사모님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라고? 도겸아, 너 서원이 알아?”

“친했는데요.”

“친했다고……?”

친했다는 말에 사모님이 오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서원을 흘겨봤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서원은 비슷한 시선을 많이 받아 봤기 때문에 그녀의 눈빛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네까짓 것이 제 아들과 어울리냐는. 파렴치한 사람을 보듯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런 눈빛을 받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도 했고, 이 저택에서 지내는 조건이 ‘쥐 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었으니……. 도겸의 눈에 제가 띈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텐데, 친하게 지냈다고 하니 짓밟고 싶을 정도로 싫을 게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 눈빛도 잠시였다. 그녀는 언제 천박한 것을 보듯 했냐는 듯,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도겸에게 말했다.

“친하게 지낸 줄은 엄마가 몰랐네. 그래도 가기 전에 인사해서 다행이다.”

“간다고? 얘가 어딜 가요?”

“이제 성인이니까 저택을 나가기로 했거든. 언제까지고 저택에서 지낼 순 없잖아.”

“…….”

사모님의 말에 도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분명 똑같이 무표정한 것처럼 보이는데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

왠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사모님과 도련님을 보고 있는데, 도겸이 휙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나랑 얘기 좀 해.”

“……?”

야?

서원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지만 여기서 도겸이 ‘야’라고 부를 사람은 저밖에 없었다.

아무리 도겸이 가릴 것 없는 도련님이라고 해도 나이가 지긋한 사람에게 ‘야’하고 부를 만큼 싹수가 없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저 말하시는 건가요?”

“그래.”

도겸이 그럼 누굴 말하는 것이겠냐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서원은 힐끗,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사용인들도 엄마도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특히나 사모님은 놀란 걸 뛰어넘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보였다. 몇 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귀한 아들과 대화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그동안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녀석에게 선수를 채였기 때문이었다.

서원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도겸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가도 되는 건가 싶어 어찌할 줄 모르고 제자리에만 서 있는데, 도겸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따라와?”

“아, 가, 가요…….”

서원은 부랴부랴 도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 * *

“와…….”

서원은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감탄했다.

이 저택에서 몇 년을 지냈지만, 도겸의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그의 방은 발 뻗고 자는 게 고작이었던 서원의 방과 달리 거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유학을 다녀오느라 왕래가 없었던 방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했다. 매일같이 가정부들이 들락날락하며 먼지 한 톨 쌓이지 않도록 쓸고 닦은 덕이리라.

한쪽 벽은 읽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책으로 꽉 찬 책장이 있었고, 그 앞에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방 중앙에는 낮은 테이블 양쪽으로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지금의 도겸 나이로 생각하면 어울리는 방이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지낸 방이라고 생각하면 노숙한 분위기였다.

서원이 서울에 처음으로 상경한 촌놈처럼 신기하게 방을 구경하는데, 도겸이 방 중앙에 있는 소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지 그래.”

“아, 네…….”

서원은 유난스럽게 구경하고 있던 것이 민망해, 황급히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그나저나 왜 부른 걸까? 몇 년 동안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했으면서 왜 사람들 앞에서 친했다는 말을 한 건지. 제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날의 일을 들추려는 건지……. 온갖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서원이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고 그의 말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데, 도겸이 서원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뭐라도 마실래?”

“아, 아뇨……. 괜찮습니다. 곧 나가 봐야 해서요.”

차 같은 걸 마시면 긴장이 풀리겠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시간을 끌면 사모님이 싫어하실 거였다. 그러니 빨리 용건을 끝내고 저택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서원이 시간을 오래 끌지 말아 달라고 은연중에 요청하자, 도겸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하.”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다.

서원은 갑자기 목이 바싹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좁은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페로몬을 푼 것도 아닌데…… 꼭 갇히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심스레 목 끝까지 채우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며 조금이나마 답답함을 해소하는데, 도겸의 시선이 드러난 서원의 살결로 옮겨 갔다. 이내 도겸이 물었다.

“나랑 있는 게 불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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