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36)

<4화>

“으으…….”

“서원아! 정신이 들어?”

“어……, 엄마?”

서원이 무겁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엄마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천장이 낯설었다. 어리둥절하게 눈을 굴리자,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기절해서 병원으로 데려왔어.”

“아…….”

어쩐지 병원에 온 과정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더라니…….

서원은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잔열이 남은 듯 몸이 여전히 뜨끈하긴 했지만, 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왜 아팠던 거지? 그렇게 아팠던 것도, 기절한 것도 처음이라 물어보려는데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서원의 침대맡에 섰다.

“윤서원 씨.”

“아, 네……!”

“비정상적으로 체온이 올라갔던 것은 발현 열이라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세게 온 편이네요.”

발현 열이란 알파, 오메가, 베타로 발현하기 전에 일어나는 열이었다. 보통 2차 성징이 올 때쯤 발현하곤 하니, 슬슬 서원도 발현할 때가 되긴 했었다.

“하아, 그렇군요……. 다행이다.”

“그것보다…….”

지희가 큰일이 아니라서 한시름 놓았다며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의사는 그것만으로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난감한 시선으로 서원을 내려다보며 차트를 손끝으로 톡톡 치다, 뜸을 들인 후에 마저 말을 이었다.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셨습니다.”

의사의 말에 서원은 순간 하얀 주먹을 꽉 쥐었고, 지희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리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의사가 저를 그런 눈으로 내려다본 거였구나.

오메가와 알파의 차별이 만연해 있었고 신체적으로도 조금 불리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알파로 발현하고 싶었다.

차라리 우성 오메가였더라면 나았을 텐데……. 열성 오메가는 몸이 약하기도 했고 아이를 낳기도 힘든 체질이다 보니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원이 멀거니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는데, 의사는 안타깝다는 듯하면서도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마저 설명을 이었다.

“진단 결과를 보아하니, 줄곧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셨던 것 같습니다. ”

“……네? 알파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가족력을 보면 베타로 발현될 확률이 높았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열성 오메가로 발현된 것도 그렇고, 페로몬 수치도 그렇고…….”

의사는 여러 정황이 보였다며 말을 이었지만, 서원은 순간 드는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서원이 아는 알파라고는 도겸밖에 없었으니.

특히나 그는 평범한 알파가 아닌 우성 알파였다. 그러니 다른 알파들에 비해 페로몬도 짙은 편이겠지. 게다가 그와는 오랜 시간 동안 좁은 방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져 왔었다.

서원의 엄마인 지희는 베타였으니 방 안에 알파의 페로몬이 남더라도 몰랐을 거고, 좁은 방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페로몬에 노출됐다면……. 그렇다면 제가 알파의 페로몬에 의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것도 말이 됐다.

너무 경각심이 없었구나.

열성 오메가로 발현된다는 건 너무 좌절스러운 일이라, 그 때문에 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좋아서,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 같아 마냥 그 탓을 할 수는 없었다.

서원이 눈을 질끈 감자, 지희가 서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위로했다.

“서원아, 열성 오메가여도…… 괜찮아.”

“…….”

“엄마는 서원이가 큰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다행이야.”

엄마는 서원이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것 때문에 좌절했다고 생각하는지 그저 열심히 위로해 줬다.

엄마의 위로를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오니, 아까보다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열성 오메가라도 큰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으니까, 이렇게 슬퍼할 일까지는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마냥 슬픈 일만 있던 것도 아니지 않나. 도겸과 뽀뽀도 했는데, 혹시 그와 사귀게 되지 않을까, 서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우울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도겸은 서원을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일이 있기도 했고, 알파가 오메가와 좁은 한 방에 있으면 사고가 날지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도 수험에 집중할 나이였으니 늦은 시간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고……. 이유가 많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은 찾아올 수 있었을 텐데. 입맞춤을 하고부터 한 번을 볼 수가 없으니 서원은 점점 제가 헛된 기대를 했구나, 하고 체념하게 됐다.

그날 일은 페로몬 때문에 일어난 사고일 뿐이라고. 그가 만약 그렇게 말한들, 서원은 조금 서운하긴 해도 이해하고 평소처럼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아예 오지를 않으니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일 년이 지났다. 서원은 그 일 년 동안 도겸이 저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반, 이제는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 반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처음 겪어 본 실연에 암울해질 때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저도 제 할 일 하고 지내야 한다며 더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서울 4년제 국립대학교를 가고 말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어, 남들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도겸은 전폭적인 가족의 지지, 비상한 머리, 타고난 체질 등을 등에 업고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미국의 한 대학교에 거뜬히 입학했다.

그렇게 정말, 서원이 도겸을 만날 일은 없어졌다.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되며 서원은 아예 도겸의 얼굴을 볼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혼자 좋아하는 것조차 순탄치 않았던 가슴 아픈 첫사랑의 기억이었다.

* * *

“오늘로 여기서 생활하는 것도 끝이네.”

서원이 작은 캐리어에 짐을 챙기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서원은 저택에서 나가기 위해 짐을 싸야 했다.

엄마는 저택에서 일하니 상주할 수 있었지만, 서원은 성인이 되었으니 더는 저택에서 살 수 없게 된 탓이었다.

몸집이 커지면서 엄마와 좁은 방에서 지내는 게 좀 버겁긴 했지만, 정든 곳에서 나가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여태까지 저택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준 것도 저희 형편을 많이 봐준 거였다.

서원이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다 그 혼잣말을 들은 지희는, 조금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서원아, 아쉬우면 내가 사모님께 한 번 더 부탁해 볼까?”

“괜찮아요. 저도 언제까지고 여기서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정말 괜찮아요. 혼자 사는 것도 해 보고 싶었는걸요. 성인이 되면 자취를 꿈꾸는 사람도 많잖아요.”

사실 서원은 자취가 간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취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했다.

가지고 나갈 짐은 별로 없었다. 작은 캐리어 하나가 가득 찼을 때쯤 이만 저택을 나가려고 하는데, 사용인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사모님이었다.

사모님이 사용인의 방에 들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것도 저렇게 상기된 얼굴로는 더더욱. 지희는 난데없는 사모님의 등장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물었다.

“사모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우리 애가 미국에서 돌아왔는데, 옛날에 아줌마가 많이 챙겨 줬잖아요? 인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어머, 도련님이 오셨구나.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지희가 사모님을 따라 방을 나가려고 할 때, 사모님이 힐끗 뒤를 돌아봤다.

서원을 본 그녀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도 따라오렴.”

“…….”

사모님은 서원과 도겸이 옛날에 함께 지내곤 했다는 걸 몰랐지만, 그래도 몇 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환대하는 자리이니 사람이 많으면 좋다고 생각한 눈치였다.

사모님의 말에 서원은 조금 주춤거렸다. 도겸과 마지막으로 대화한 것이 그의 생일이자 제가 열성 오메가로 발현하던 날이었으니, 자그마치 6년 만의 재회였다.

서원은 도겸이 돌아왔다는 말에 심장이 쿵쿵거리고 등허리에 긴장이 빳빳하게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했다. 서원에게는 아직도 그보다 매력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만남이 그런 식이었다 보니 그를 보는 게 꺼려졌다.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것인데 제 얼굴을 보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저를 보고 싫어하는 걸 두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러면 정말로 서글퍼질 것 같았다.

서원이 머뭇거리며 따라가지 않자, 그녀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뭐하니? 따라오래도.”

“가, 갈게요…….”

만나는 게 무서워도 어쩔 수 없었다. 곧 저택에서 나간다고 해도 사모님의 말은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택을 나가면 정말로 제가 도겸을 마주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눈에 담아 오고 싶기도 했다.

사모님을 따라 저택 입구로 가자, 사모님이 미리 지시를 해 뒀는지 입구 양쪽으로 사용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너도 저쪽에 가서 서렴.”

사모님은 자연스럽게 서원의 자리를 지정해 줬다.

생각해 보면 수년간 이 집에서는 귀신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사용인들과 사모님이 있는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게 처음이었다. 저택에서의 마지막이기도 하고, 사모님이 워낙 기분이 좋아서 주어진 귀한 기회 같았다.

도련님을 마지막으로 보고 미련을 접을 수 있는 기회.

반은 기대로, 반은 두려움으로 서 있는데, 저택의 커다란 문이 환하게 열렸다.

서도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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