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임신이네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기씨를 품으셨다고요. 임신 초기에는 다들 어지럽고 속도 안 좋고들 그래요.”
“…….”
의사의 친절한 설명에 서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설마 했다. 근래 조금만 움직이면 어지럽고, 속이 조금 역하고 음식 냄새만 맡으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고……. 임신과 비슷한 증상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큼은 절대로 아닐 거라고 부정하고 병원을 찾아온 거였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이명이라도 온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서원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뜯으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의사는 축하의 말을 전했다.
“축하드려요. 열성 오메가는 임신이 쉽지 않은데.”
“저, 정말 제가 임신을 한 게 맞나요? 오진일 가능성은 없고요?”
“놀라신 것도 이해해요. 저희도 열성 오메가셔서 몇 번이고 재검사를 해 봤는데, 임신은 확실합니다.”
“…….”
“자세한 개월 수는 검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임신 초기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격한 운동은 해서는 안 되고…….”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서원의 앞에서 유의사항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그 말들이 혼란스러운 서원의 귀에 제대로 들릴 리가 만무했다.
절대로 가져선 안 될 남자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 * *
“으음, 엄마아……. 어디 가요?”
“응, 깼어? 도련님이 책 읽어 달라고 해서 잠깐 다녀올 거야. 서원이는 더 자.”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는 야심한 시간이었다.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서원이 자다가 깨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일어나려다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하며 하얀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서원의 모친인 최지희는 흔히들 말하는 과부였다. 서원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사고사를 당해 이르게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어떻게든 낳기 위해 돈 되는 일이라면 모든 걸 했다.
현재 그녀는 재벌가의 집에서 숙식하며 가정부 일을 하고 있었다. 눈에 띄지만 않으면 골방처럼 좁은 숙직실에서 아이를 데리고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서원을 어서 안심시키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서원의 까만 눈동자는 언제 졸음으로 가득했었냐는 듯 총기로 반짝거렸다.
“도련니임……?”
“응.”
“그러엄, 같이 나가요. 저 목말라요…….”
“이 시간에 물 마시면 새벽에 쉬 마려워서 깨잖아.”
“괜찮아요.”
서원은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희는 이 시간에 서원이 물을 마시면 새벽 중에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칭얼거릴 것을 알기에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다시 재우기에는 도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겠다 싶어, 지희는 일어난 서원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물만 마시고 얼른 돌아와서 자야 해? 더 늦게 자면 키 안 큰다?”
“네에.”
서원은 대답을 예쁘게 하며 히히 웃었다. 엄마는 늘 늦게 자면 키가 안 큰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서원에게 키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더 중요했다.
서원은 엄마의 손을 잡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아장아장 거실로 나왔다. 지희는 서랍장에 몰래 숨겨둔 서원의 노랗고 작은 플라스틱 컵에 시원한 물을 따라 줬다.
“마시고 얼른 들어가. 컵은 올려놓고 가면 엄마가 치울게.”
“네에…….”
지희는 사뭇 단호하게 말하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서원이 시원한 물을 찔끔씩 마시는데,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스으으윽, 하고 무언가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였다.
분명 아무도 없지 않았나……?
서원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섬찟함을 느끼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냉장고 옆에 있는 작은 창고방 문이 아까와 달리 열려 있는 게 보였고…….
안에 새카만 인영이 서 있었다.
“귀, 귀신이다!”
다섯 살 남짓한 아이가 보기에는 너무 음산하고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서원이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창고 안에 있던 인영은 얼른 가까이 와 서원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후으읍……?! 후읍?!”
살려 달라고 버둥거렸지만,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버둥댄다고 사람을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서워, 무서워!’
엄마를 불러 보려 열심히 소리를 지르려 노력하는데,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눈을 데구르르 올려 위를 올려다보자, 도련님이 미간을 좁히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도겸. 서원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이 저택의 작은 주인님.
지금 이 상황도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창고에서 나온 것이 귀신이나 강도, 도둑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안심됐다.
버둥거리던 몸짓을 멈추자, 그가 천천히 서원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서원이 그간 막혔던 숨을 몰아서 헐떡대고 있는데, 그가 몸을 굽혀 시선을 맞춘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저 아줌마 아들이었나?”
“으응……, 네.”
도련님을 멀리서 훔쳐보듯 본 적은 많았다. 그렇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게 이 저택에 숙식할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존댓말을 써야 할지 말을 놔도 괜찮을지 고민하다 말을 높여 대답하자, 그가 힐끗 계단 쪽을 확인하더니 제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나 못 봤다고 해라.”
“봤는데…….”
“거짓말하라는 거잖아.”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요.”
“선의의 거짓말도 있어.”
“서니니?”
“…….”
서니니 거짓말이 뭐지? 어려운 말은 모르는 다섯 살이었다.
서원이 말귀를 못 알아듣자, 도겸은 답답하다는 듯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더니 이번에는 협박하듯 당부했다.
“하……. 아무튼 나 본 거 말하면 이 집에서 확 쫓아내 버릴 줄 알아.”
“쫓아내……?”
“그래. 길거리에 나앉아서 굶고 싶지는 않지?”
“음……. 네.”
“그럼 못 봤다고 해.”
“…….”
그래도…… 엄마가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했는데.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했는데…….
서원의 까만 눈동자에 망설임이 뚝뚝 묻어나자, 도겸은 서원의 양쪽 팔을 붙잡고 삼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도겸의 평소 목소리는 원래 이러했다.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너무 작은 아이라 나름대로 다정히 설득하려 했는데, 한시가 급한 상황에 아이가 걸림돌이 되어 말도 통하지 않자 슬슬 본성이 드러났다.
도겸이 서늘하게 말하자, 서원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갑자기 목소리며 분위기가 달라지니 제가 잘못한 것 같았다. 혼나는 것 같았다. 눈가가 순식간에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알겠, 알겠, 알겠……, 히끅.”
“뭔 소리야. 알았다는 거야, 말았다는 거야?”
“알았다…….”
“말이 좀 짧다?”
“알았다……요?”
“……허.”
두려움에 벌벌 떠는 서원이 존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도겸은 다그치듯 하다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내가 애새끼한테 뭘 바라냐.”
“…….”
서원은 ‘애 아닌데…….’하고 웅얼거렸으나, 사실은 둘 다 애였다. 서원은 다섯 살, 도겸은 열 살. 그렇지만 도겸은 서원보다 인생을 두 배는 더 살아서 그런지, 서원이 쥐방울만 해 보였다.
“입조심 해라. 간다.”
“네…….”
서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겸은 작게 웃고는 거실 테라스를 통해 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지? 궁금했지만, 이 나이여도 눈치가 있긴 있었다. 그를 따라가선 안 된다는 걸. 그리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걸.
서원은 마신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아까 계단 위로 올라갔던 엄마가 다시 내려왔다.
“도련님이 또 어딜 가신 거지……. 어머, 서원아. 아직도 안 들어갔어?”
“이제 막 들어가려고 했어요.”
“얼른 자. 아, 근데 혹시 도련님은 못 봤니?”
엄마의 물음에 서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까지 물을 그렇게 마셔 놓고서는, 갑자기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모……, 못 봤어요.”
“그래……? 그럼 도대체 언제 나가신 거지……. 아무튼 서원이 너는 얼른 들어가서 자. 알겠지?”
“네…….”
서원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해 말을 떠듬거렸다. 그러나 다행히 의심을 사지는 않았는지 엄마는 더 묻지 않고 도겸을 찾아 걸음을 바삐 옮겼다.
서원은 도로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심장은 여전히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다.
“엄마가 거짓말을 하면 무서운 아저씨가 잡아간다고 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무서운 아저씨가 잡아가는 것보다 도겸이, 그리고 이곳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는 게 더 무섭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게 도련님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