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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72화 (172/173)

172화

며칠 전 이진은 승현에게 제대로 된 고백을 받았다. 늦은 밤, 인적이 드는 공원에서였다.

승현은 그네에 앉은 이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드디어 반지 케이스와 헷갈리는 오르골이 아닌 진짜 반지를 선물했다. 고백하는 법에 관한 교과서가 있다면 사진을 찍어서 참고 자료로 첨부해도 좋을 만큼 정석적인 모습이었다. 물론, 그 대상이 선승현이었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이 연출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기쁘진 않았다. 아니, 물론 기뻤다. 하지만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여서 고대하던 순간이 오자 파도치는 감동보다는 잔잔한 행복감이 가슴을 채웠다.

‘나도 네가 좋아.’

이진은 무릎 꿇은 승현을 일으켜 세운 뒤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에 한데 얽히고, 자연스럽게 몸이 밀착됐다. 그리고 물 흐르듯 잡힌 분위기 속에서 키스를…… 할 줄 알았는데 안 했다.

승현과 정식으로 사귀게 된 후 이진이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승현이 스킨십에 큰 미련이 없다는 것. 손을 잡거나 끌어안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았다. 진도를 나가고 싶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잡을 시간이 부족했나? 단둘이 있는 시간을 더 늘려야 하나?’

연애 경험이 없는 이진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러나 원인을 파악하기도 전에 각자의 스케줄이 바빠져 오늘까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때문에 이진은 활동 기간 중 휴식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할 숙소 방 배치에 관심이 지대했다.

비록 방 배정 순서를 정하는 게임이 어이없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승현과의 프라이빗한 장소를 쟁취하고 싶었다.

“이진 씨부터 원하는 방 선택해 주세요.”

제작진은 숙소의 구조도가 간략히 그려진 네모난 화이트보드를 들고 왔다. 판에는 멤버 7명의 이름이 코팅된 종이가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현관 앞에 제일 작은 방이 하나, 그 맞은편에 2인실로 쓰일 법한 작은 방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부엌과 화장실, 거실이 제법 큰 면적을 차지했다. 부엌과 벽을 마주한 방이 3인실로 추정되는 가장 큰 방이고 그 건너편이자 거실과 벽이 맞닿는 방이 2인실의 작은 방이었다.

이진이 제 이름을 집어 들자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왕이면 선승현이랑 같은 방을 쓰고 싶은데, 이진과 승현의 순서가 극과 극이다 보니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승현이가 알아서 잘 찾아오겠지.’

머뭇대던 이진은 두 개의 작은 방 중 현관에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럼 나는 이진이랑 같은 방!”

그러나 다음 차례인 찬우가 제 이름을 그 옆에 찰싹 붙여 버렸다. 이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바라보았다. 찬우는 “으하하하!” 큰 소리로 웃다가 이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이진아, 너 혹시 대놓고 승현이랑 같은 방 쓸 생각인 건 아니지? 공개 연애는 데뷔 10년 차부터 눈감아 줄게.”

“아, 아니거든!”

뭘 아는 건지 농담인 건지. 이진은 섬뜩한 소리를 하는 찬우를 팍 밀어 냈다. 평소에는 약에 쓸래도 없던 눈치가 꼭 남의 연애사에서 발휘되는 게 어이없었다. 게다가 승현과 사귀고 연인다운 행동은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데, 벌써부터 단속을 당하려니 억울했다.

이진은 짓궂은 얼굴의 찬우를 노려보며 여차하면 카메라 없을 때 승현과 방을 바꾸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찬우의 선택에 불만을 가진 건 이진만이 아니었다. 다음 차례인 우진 또한 눈썹을 찌푸렸다. 우진은 최대한 그와 가까운 방을 고르고 싶은 듯 자석을 들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남은 방은 죄다 거실보다 안쪽에 콕 박혀 있었다.

“그럼…… 나는 여기.”

“나도 큰 방.”

우진과 하늘이 나란히 3인실을 선택했다. 제이슨은 제 이름을 집어 들고는 남은 멤버들을 둘러봤다. 백미열과 선승현. 제이슨의 눈에 두 사람은 각별히 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합 상 둘을 찢어 놓는 것보다는 본인이 3인실에 가는 게 조화로워 보였다. 제이슨은 마찬가지로 3인실에 자석을 붙였다.

남은 두 사람은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미열이 남은 방에 이름을 옮겨 두고 승현의 차례가 됐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승현이 이진의 방 맞은편, 가장 작은 방에 이름을 툭 가져간 것이다.

“어? 그 방은 안 쓰는 방 아니야?”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승현은 침대 한 개 들어가면 가득 찰 방에 꾸역꾸역 들어가겠다 우겼다. 우진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는 생각이 얼굴에 써 놓은 것처럼 그대로 읽혔다. 절망에 빠졌던 이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난 혼자 쓰는 게 좋아.”

“이거, 이래도 돼요?”

“안 될 건 없죠.”

“뭐야, 난 어부지리냐?”

얼결에 2인실을 홀로 쓰게 된 미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제작진이 별말 하지 않으니 다들 따지지 않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PD는 승현의 얼굴만 보면 무시무시한 변호사 군단이 떠오르는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감이 있었다. 어차피 몇 주간의 촬영이 끝나면 숙소 방 배치가 어떻게 되든 제작진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긴 했다.

“수상해…….”

“다음 순서가 뭐였죠?”

오직 찬우만 승현이 독방을 고집하는 이유를 미심쩍어했다. 이진은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다음은 가구 배치 게임입니다!”

멤버들 간의 화합을 위해 팀 미션을 진행해 성공하면 원하는 가구를 하나씩 획득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여러 가지 가구 목록이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노래방 기계 등. 텅 빈 방 안을 취향껏 인테리어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듣기로는 전부 S전자의 협찬이었다.

이후로 그룹명이나 데뷔 콘셉트, 활동곡을 정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진은 프로그램이 끝난 뒤 시청자들의 의견을 들어 보길 원했는데, 그때 모았던 의견을 이제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위드 올이 제일 좋은 것 같아.”

“잘못 들으면 돌멩이 이름처럼 들리긴 하지만.”

“아이돌이니까 좀 돌처럼 들려도 상관없지 않아?”

멤버들은 이라는 이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이진도 ‘승자 독식’이 ‘모두 함께’로 변하는 점이 좋게 느껴졌다. 새로운 그룹에 맞는 정체성이다. 이진이 지향할 목표점이 단어로 뚜렷이 새겨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방송명은 뭐가 될까? 함께해요, 위드 올 나잇?”

“정하늘 너 작명에 센스 있다.”

“엣헴!”

대화를 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 윈올에서는 차마 알지 못했던 면모들을 새로이 발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허구한 날 핸드폰을 붙들고 사는 제이슨이 알고 보니 틈틈이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고 있었다거나 이진의 앞에선 줄곧 주눅 들어 보였던 이우진이 사실 예능 욕심이 아주 투철하다거나.

“나는 아이돌 중에서는 시티 로열 선배님들을 제일 좋아해.”

“뭐?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알고 있다랑 좋아한다를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이진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그에 대해서 새로이 알게 되는 점이 많았다. 원래라면 굳이 설명할 필요 없던 사소한 정보들을 하나씩 소개하며 그들은 멤버들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첫날 촬영은 비교적 일찍 끝이 났다. 내일부터는 야외 촬영을 할 예정이기도 했고 윈올처럼 참가자들을 24시간 감시해 콘텐츠를 쥐어 짜낼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편이었다. 무엇보다 게임에서 딴 가구들을 번듯이 배치할 시간도 필요했다.

우선 침대와 침구, 소파와 냉장고 등 미리 준비되어 있던 가구들이 먼저 들어왔다. 승현의 방에 억지로 침대를 꾸겨 넣자 이진에게 몹시 익숙한, 제법 안락한 분위기가 되었다. 좋게 말했을 때는 그렇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비좁고 답답했다.

“형, 자주 놀러 와요.”

승현은 좁은 방도 나름 만족스러운지 침대에 발라당 누워서 말했다. 그도 이진처럼 프라이빗한 공간을 획득하기 위해 머리를 썼던 것이다.

“둘이 자기는 침대가 너무 좁다.”

“좁으니까 좋은 거 아닌가?”

며칠 전이었다면 수줍게 뺨을 붉혔겠지만, 이진은 이제 저런 말에 속지 않았다. 저건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이진이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도 승현은 ‘형 따끈따끈해요.’ 같은 소리나 하고 쿨쿨 잠들 위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진은 우선 승현의 옆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단둘만의 시간. 몸을 돌려 승현을 향해 눕자 그가 눈을 반짝 빛냈다.

“문 잠갔어요?”

“당연하지.”

“카메라 꺼진 거 맞죠?”

“법정 가기 싫으면 알아서들 했겠지.”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멋있어요.”

승현의 입술이 이진의 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쪽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승현은 이진이 뺨을 붉히는 게 맘에 드는지 순수한 얼굴로 웃어 댔다. 그러고는 양팔로 이진을 감싸 안고 몇 번이나 얼굴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맘에 드는 사냥감을 쟁취하고 뿌듯해하는 고양이나 개, 아니 여우같은 동물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게 사람 속도 모르고. 승현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진으로 말하자면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고 많이 승현과 닿고 싶었다.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뽀뽀 말고 손끝까지 전율이 느껴지는 그런 깊은 접촉을 원했다.

그러나 얼마 전 승현이 준 오르골을 드디어 들어 봤을 때, 한 가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얘 혹시 혼전 순결 주의자인가?’

오르골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바로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멘델스 존의 축혼 행진곡. 흔히 결혼 행진곡이라 불리는 유명한 클래식 음악이었다.

두두두 둥, 두두두 둥. 이 명랑한 멜로디가 이진에게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처럼 들렸다. 그제야 승현이 장난처럼 했던 결혼 타령이 진지하게 느껴졌다.

이진은 자라는 동안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켜 준 보호자가 없었다. 그러니 정조 관념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인간에 대한 혐오가 뿌리 깊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 왔다.

반면, 승현은 가족과의 사이가 좋든 나쁘든 워낙에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으니 애초에 사귀는 것이 곧 스킨십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잘 자요, 형.”

“너도 잘 자.”

이진의 예상대로 승현은 이진을 한참 끌어안고 뒹굴거리다가 불을 끄고 꿈나라로 떠났다.

‘에휴, 네가 좋다니 어쩔 수 없지.’

지금 승현은 이진을 이렇게 만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이진도 승현이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 흐뭇해져 굳이 더 진도를 나가자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은 많고, 사이를 갈라놓을 장애물도 없으니 천천히 한 발씩 함께 나아가면 그만이었다.

승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되겠지. 이진은 승현의 감은 눈에 쪽 뽀뽀를 하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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