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짹짹, 창 밖에서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아직 아침이라기에는 이른 시간, 새벽의 푸르스름한 햇빛이 얇은 커튼을 지나 방 안을 비췄다.
이진은 흐릿한 시야로 희미한 광원에 의지해 습관적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오래된 장판, 누리끼리한 벽지, 며칠 전 장롱에서 새로 꺼내 아직 퀴퀴한 냄새가 나는 여름 이불……. 여전히 좁고 허름한 원룸이 눈에 들어왔다.
‘꿈이 아니구나.’
안심이 되자 도로 눈이 감겼다. 이진은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어둠 속으로 도피했다. 이제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종종 잠에서 깨어나면 3년 뒤의 미래로 돌아가 있을까 봐 괜스레 불안에 떨고는 했다.
얼마 전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정도였지만, 프로그램이 끝나고 긴 여정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자 증상이 급격히 악화됐다.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그동안의 경험을 생각하면 오래가지 않을 증상이다. 이진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진은 마지막으로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한편에 놓인 단출한 짐 가방과 방금 몸을 일으킨 이불 외에는 개인 용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허전한 방이 낯설었다.
‘이제 이곳과도 안녕이구나.’
오늘은 드디어 단체 숙소에 입주하는 날이었다. 이진이 낡은 원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했다. 며칠 전 승현과 함께 짐을 추리며 물건들을 한가득 버린 덕분에 가져갈 짐은 많지 않았다. 이진은 남은 짐을 마저 정리한 뒤 휴대폰으로 텅 빈 방의 사진을 찍어 뒀다.
처음 이곳을 떠났을 때는 아쉬움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두 번째로 떠나려고 보니 괜히 감상적이 되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자신의 흔적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집 앞에는 커다란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앞으로 이진의 매니저가 될 남성이 웃으며 인사했다. 이름은 최기준, 경력 10년의 실장급 매니저이다. 본래라면 이진을 데리러 오는 일은 로드 매니저가 맡아야 했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팀이 꾸려지기 전이라 직접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진 씨.”
“네, 안녕하세요.”
“아예 방 빼기로 한 거 아니에요? 짐이 적네요.”
“며칠 전에 많이 버려서요.”
“아하, 그렇구나. 그럼 조만간 쇼핑 한번 해야겠네.”
그는 말수가 적은 이진을 배려하여 무겁지 않은 침묵을 만들어 주었다. 나이 차이가 열 살은 나는지라 처음에는 함께 지내기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요 며칠 만나 보니 그렇지 않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그는 업계에 오랫동안 몸담은 사람답게 입이 무겁고 정중했다. 일처리 역시 막힘없었다. 이대로라면 우려했던 일은 생기지 않을 듯했다.
아직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연예인일수록 ‘관리’라는 명목하에 멋대로 휘두르려는 경우가 은근히 많았다. 특히 아이돌은 외모나 이미지 관리가 몹시 중요하고 평균 연령도 몹시 어린 편이라 그러한 문화가 더 파다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급적 담당 연예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권고 이상으로 강한 어조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진으로서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덜컹, 과속 방지턱을 지나며 차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백미러로 이진을 힐끔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진이 불편하지 않은지 기분을 살피는 모습이 경력에서 나온 습관인지 타고난 천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런 사소한 행동이 그를 믿음직스럽게 만들었다.
‘하긴 첫 만남부터 그런 꼴을 봤으면 몸을 사릴 만도 하지.’
이진은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을 끌어안고 그날을 회상했다.
최종적으로 계약서를 검토하기 위해 소속사와 방송국, 그리고 멤버들까지 한 자리에 모인 날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기존에 소속사가 있던 멤버들은 옆구리에 회사 직원을 하나씩 끼고 왔고, 방송국에서도 프로그램 메인 PD와 함께 법무 팀을 자리에 앉혀 놨다.
그리고 선승현은 웬 변호사 군단을 끌고 나타났다. 승현도 일행의 머릿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굉장히 민망한 기색이었다.
‘계약서에 굉장히 많은 문제 조항이 있더라고요.’
‘계약 내용에 대해선 지원 전에 이미 동의하셨을 텐데요.’
‘이 계약서 말고 사전에 작성했던 동의서에도 문제점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방송 중에 벌어졌던 사건 사고 중 방송국 측의 고의성이…….’
‘이보세요, 지금은 그걸 논하는 자리가 아니잖습니까!’
이진은 그들의 협상 과정을 보며 머리가 똑똑한 놈들이 우기는 데도 소질이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변호사 군단은 업계에서 암묵적으로 눈 감고 넘어가는 불공정 조항까지 꼬치꼬치 따져 댔고,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소송을 걸겠다는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법 앞에서 업계의 암묵적인 규칙을 운운하는 PD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벽과 대화하는 기분이었을 거다. 치졸한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걸 얻어 내겠다는 독기는 정말이지 차원이 달랐다.
그 결과 방송국 법무 팀은 계약서를 대폭 수정해야 했고, 윈올의 메인 PD는 방송국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그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매니저나 방송국 제작진들이 승현을 비롯한 멤버들을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대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진이라도 갑자기 들이닥친 변호사 군단을 보면 아주 기가 질릴 것 같았다.
도를 넘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이쪽도 까탈스럽게 굴지 않을 거라는 건 앞으로 차차 알아 갈 테니 우선 이 긴장감을 유지하기로 했다.
“도착했어요. 내려서부터 촬영 시작하니까 파이팅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내리기 전 창 밖을 잠시 살폈다. 짐작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벌써 이곳저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윈올이 끝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방영될 예정인 ‘생활 밀착형 버라이어티 예능’의 촬영이 바로 오늘부터였다. 가제는 ‘윈올 데뷔 준비 프로젝트’. 오늘 중 그룹명이 정해지면 그와 어울리는 프로그램명도 정할 예정이었다.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눈앞의 아파트로 발을 옮겼다. 아파트 입구에는 방송용 소품으로 보이는 분홍색 우체통이 있었다. 우체통 속에 든 편지를 꺼내어 열어 보니 환영 문구와 함께 동과 호수, 도어 록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진은 우체통 옆에 달린 소형 카메라에 비밀번호를 가린 채 편지를 비춰 보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숙소는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두 개, 아주 작은 방 하나까지 총 네 개의 방이 준비돼 있었다. 화장실은 거실과 부엌 사이에 하나, 그리고 큰 방 안쪽에 하나가 있었고 거실과 부엌은 분리되었다. 거실에 난 베란다 창 너머로는 서울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 커다란 거 봐. 촬영만 하고 이사 가는 건 아니겠지?’
이진은 널따란 내부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정말 데뷔도 안 했는데 이렇게 커다란 집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 가구가 들어와 있지 않아 더 넓어 보였다. 침대를 제외한 가구는 예능 촬영 중 게임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잠깐 둘러보니 아직 숙소에는 아무도 오지 않은 듯싶었다. 이진은 아무것도 없는 거실 바닥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지금은 일하는 중임을 깨닫고 구석에 놓인 아무 카메라에나 눈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유이진입니다.”
고요한 숙소 안에 이진의 목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아주 많이 민망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야 할 때였다. 이진은 다시 한번 카메라를 바라보고 혼잣말을 시작했다.
“으음, 아직은 에어컨도 없지만 바닥이 차가워서 좋은 것 같아요. 베란다 창문이 엄청 커서 열어 두면 바람도 잘 통하겠죠? 아…… 모기. 방충망 있나? 저는 모기가 정말 싫어요.”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리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우울하게까지 들렸다. 혼자 재밌게 노는 방법을 모르는 이진은 할 말이 떨어져 침묵하다가 의무감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애들이 안 오네요.”
“크흡.”
그때 방 어딘가에서 소리를 잔뜩 죽인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고개를 번쩍 들고 좌우를 두리번댔다. 곧바로 뭉툭한 커튼 한쪽이 바들바들 떨리는 기현상을 발견했다.
“으하하하! 으하학!”
커튼 뒤에 숨은 이는 백미열이었다. 이진은 커튼을 걷자마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모습을 드러낸 미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뭐야, 왜 여기 숨어 있어?”
“너 놀래켜 주려고 다들 미리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숙소 구경을 그렇게 성의 없이 하냐?”
“다들 와 있다고?”
이진이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문지방도 밟지 않고 내부를 눈으로만 조심조심 훑어본 탓에 방 깊숙이 숨어 있던 멤버들이 놀래 줄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언제 나가야 하나 눈치만 보고 있던 찰나, 이진의 음울한 독백이 들린 탓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고 미열이 설명했다.
“어휴, 우리 둔탱이. 다른 애들도 얼른 가서 찾아봐! 제일 마지막까지 안 들킨 놈이 방 배정 우선권 갖기로 했단 말이야!”
멤버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제작진과 작당한 숨바꼭질 게임이었다. 1위를 한 이진에게 제일 먼저 방을 선택할 편의를 봐주되 나머지는 공평하게 게임으로 정하기로 한 것이다.
게임이란 소리에 이진이 의욕적으로 다시 숙소를 돌아다녔다. 가장 가까운 곳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문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제이슨이 제일 작은 방 문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성의 없이 숨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이진을 비웃었다. 습관성 센 척이었다.
누가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하니 당연한 반응이지 않나. 이진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빨개진 코를 한 손으로 문지르며 센 척하는 제이슨은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크왕!”
하늘은 화장실 욕조 속에 뚜껑을 덮고 누워 있었다. 상식적으로 누가 방 구경을 하는데 욕조 뚜껑을 열어 본단 말인가. 하지만 이진은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고 하늘에게 잘 숨었다고 칭찬이나 건넸다. 우진은 목욕가운을 입고 벽에 붙어 서서는 욕실 벽에 걸린 가운인 척하고 있었다. 이진은 하늘을 욕조에서 꺼낼 때까지도 욕실에 가운이 있는지 몰랐다.
찬우는 제일 큰 방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제 캐리어 뒤에 숨어 있었는데, 캐리어 뒤에 숨겨질 만한 덩치가 아니라 왜 못 찾았는지 본인도 의아했다. 그가 정말 방의 사이즈를 측정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것 같았다.
“아, 근데 선승현은 어디 갔지?”
“그러게. 이 자식도 절대 못 찾는 곳 숨겠다고 눈에 불을 켰었는데.”
다 같이 거실에 모아 놓고 숫자를 세 보니 한 놈이 모자랐다.
“승현아, 네가 이겼다! 빨리 나와!”
외쳐 봐도 숙소 내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베란다 밖과 쓰레기통, 캐리어 안도 꼼꼼히 확인해 봤지만 승현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리송해진 승현의 행방에 아래에서 촬영을 모니터링 중인 제작진에게 전화를 걸 때였다. 삑삑삑삑, 도어 록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여기서 뭐 해?”
“너야말로 왜 거기서 나오냐?”
방금까지 한참을 찾아다니던 승현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한 손에는 간식거리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벌써 끝났어?”
“넌 자격 박탈이야.”
알고 보니 승현은 현관 우산꽂이 뒤에 숨어 있다가 잠깐 먹을 걸 사 오기 위해 나갔다 왔다고 했다.
“진짜 웃기는 놈일세! 촬영 중에 갑자기 왜 간식을 사러 가냐고!”
승현은 아무 말 없이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진은 웬일로 승현을 타박 하지 않고 조용히 봉지 속에서 과자를 꺼내 들었다. 아까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승현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아침을 안 먹어서 출출하다고 말한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잠시 게임은 잊고 다 같이 둘러앉아 과자나 먹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을 위해 제작진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