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69화 (169/173)

169화

“다음 8위입니다. 탄탄한 실력과 밝은 성격으로 꾸준한 상승세를 기록한 참가자입니다. 8위, 백미열 참가자!”

미열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 없이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더니 그대로 몸을 반 접어 관객을 향해 깊숙이 인사했다. 이진은 그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무탈하게 데뷔하려면 8위 내에 들어야 하는데 미열은 한 계단 아래에 위치했다.

7위는 강재규, 6위는 이우진이 차지했다. 이우진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 눈물을 터트렸다.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인 사람들도 잘 관찰하면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직 데뷔 여부가 결정지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지금 이들은 노력으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해야 하는 중이었다. 데뷔 여부는 타인의 손에 달려 있지만 최종 등수는 온전히 자신의 일구어 낸 결과다. 내 손을 떠난 일이라 해도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불러일으켰다.

“5위 발표하겠습니다.”

연달아 순위가 발표되었다. 5위 제이슨, 4위 한찬우, 3위 정하늘. 찬우와 하늘의 순위가 저번 라운드와 비교해 뒤바뀌어 있었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정도였다.

“드디어 대망의 우승자 발표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단 2명만이 남았을 때, 뒤늦게 찌르듯이 강렬한 긴장감과 산처럼 무거운 압박감이 이진을 짓눌렀다.

‘벌써?’

시간이 아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이진은 고개를 돌려 승현을 바라봤다. 승현의 얼굴에도 긴장의 흔적이 역력했으나 여전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반면 이진은 원인을 알 수 없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 그럼 선승현 참가자부터 각오 한마디 들어 볼까요?”

막힘없이 결과를 발표하던 홍서가 잠시 시간을 끌었다. 스태프의 지시라도 받은 것 같았다. 승현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라도 한 건지 갑자기 지목당한 것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말을 술술 내뱉었다.

“이미 여러 번 말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게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발표될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게요. 아주 여러 번 들어 본 것 같아요. 좀 참신한 각오는 없나요?”

“각오란 게 한결같아야지 매번 갱신되는 게 아니라서.”

승현의 애매한 답에 관객석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서도 마이크를 치우고 소리 내어 웃더니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유이진 참가자, 각오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이진은 제게 넘어온 마이크를 쥐고 살짝 뜸을 들였다. 머리가 텅 비어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 저는…….”

방송 사고를 내지 않기 위해 우선은 입을 열었지만 뒤에 이어질 말을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이진은 더듬더듬 버벅거리며 상투적인 문장을 읊조렸다.

“오늘이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죠. 여러분이 방송을 통해 보셨던 시간, 그리고 보이지 않은 시간…….”

그러다 문득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무의식중에 훑어본 관객석에서 한손으로는 펜스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진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팬과 눈이 마주쳤다.

[유이진! 우승은 니 거야!]

흔하디흔한 응원 구호였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사그라든 줄 알았던 불꽃이 거세게 몸집을 부풀렸다.

당장 이진의 눈에 보이는 플래카드만 해도 수십 개였다. 그중 이진의 이름이 적힌 게 반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진의 1위를 차지하길, 이진이 우승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진조차 포기해 버린 꿈을, 누군가 대신 꿔 주고 있었다.

불현듯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감이 이진을 덮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 명의 사람들, 태양처럼 뜨겁게 내리쬐는 조명의 열기, 바닥에 흩뿌려진 색색의 꽃가루. 뿌옇게 낀 안개가 걷히고 방금 전까지 이진을 감싸 안고 있던 투명한 막이 비눗방울처럼 톡, 하고 터져 버린 것 같았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일시에 머릿속이 깨끗이 정리되었다. 시간에 쫓기듯 조마조마한 기분, 원인을 모르게 떨리던 손. 단순히 긴장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 아니었다. 이진은 다가올 패배의 순간을 너무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에. 한순간 깨달음을 얻고 편해지기에는 이진의 노력이 너무도 깊었다.

이기고 싶었다. 우승하고 싶었다. 자신을 누르고 승리를 거머쥘 승현을 향한 원망은 없었다. 그의 무대를 도와준 일이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기고 싶은 열망은 그대로였다.

“맞아요, 오늘만을 바라보고 스쳐 보낸 날들이 많습니다. 오늘 꼭 각자가 납득할 수 있는 결실을 맺길 바랍니다.”

홍서가 이진의 말을 받아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이진은 관객석에서 고개를 들어 자신과 같은 마음일 동료들을 바라봤다. 한찬우, 정하늘, 백미열, 이우진, 강재규…… 그리고 선승현. 승현은 이진의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이진을 마주 바라보다 미소 지었다. 이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허울 좋은 말로 감정을 포장해 봤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진은 패배가 확실시된 지금에도 우승을 원했다.

잠시 얻었던 평온함은 절망과 패배감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곧 마주해야 할 현실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관망했다. 그걸로 괜찮을 줄 알았다. 그렇게 다가올 순간을 외면하고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질 줄 알았다.

‘패배가 쓰라리지 않을 수는 없지.’

온 힘을 다해 부딪쳤으면 그만큼 센 충격을 받는 게 당연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쳤는데 껍질이 깨지지 않았다면 계란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열정을 불태웠다면 아픈 맛을 보는 게 맞다.

달콤한 것은 괴로움을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는 동료의 존재다. 아픔을 잊고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게 응원해 주는 팬의 존재고, 현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다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느껴지는 벅차오르는 감동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의 스타, 밤하늘을 수놓을 첫 번째 별. 영광의 주인공은 바로…….”

이진은 비로소 패배를 받아들일 자세를 갖췄다. 애써 괜찮은 척 말고 아파 버리자. 드러내지 못한 상처는 속에서 곪을 뿐이다. 이제는 믿고 어리광을 부릴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까, 깨어져 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고 정면을 곧게 바라본 순간이었다. 무대 양옆에서 펑, 폭죽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줄기 빛이 이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유이진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고가 완전히 정지해 멍한 표정으로 숨을 들이쉴 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거대한 함성과 함께 연호되는 이름, 오늘의 주인공이어야 할 승현이 아닌 자신을 향한 동료들의 시선을 보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꺄아아아! 유이진! 유이진!”

“이진아, 축하해!”

시야가 흐려질 새도 없이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진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하게 목이 멘다는 생각만 하다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승현이 이진을 끌어안아 얼굴을 가렸을 때 이상하게 그의 셔츠가 축축함을 알았다.

“아아, 유이진 씨가 많이 감격한 모양이에요.”

한번 자각하고 나자 멈출 수가 없었다. 참을 새도 없이 서러운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여름 장마철의 소나기처럼 쉼 없이 굵고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숨이 가빴다. 눈물이 나고, 숨이 가쁘고, 서러운 비명을 삼키는 것은 과거에도 분명 겪어 본 적이 있으나 그때와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내가 이겼어. 내가…….’

툭, 이진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이진을 불행하게 만들던 연쇄 고리는 사라졌다. 어떻게 패배를 앞에 두고 태연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감정이 폭풍같이 쏟아졌다. 승자에게는 미소만이 허락된 줄 알았는데, 온전히 기쁨을 누리기 위해선 슬픔을 먼저 쏟아 내야 함을 이제야 알았다.

“울지 말아요. 형,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진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던 승현이 그렇게 말하며 이진을 바로 세웠다. 승현은 신기하게도 승패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표정이었다. 지금 승현의 가슴도 쓰라릴까, 내가 겪었던 것처럼 괴로울까. 늦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승현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굵은 물방울들을 손끝으로 훔쳐 내고는 이진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승현의 힘에 의해 두어 발자국을 앞으로 나선 이진은 뒤를 바라보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뺨에 남은 눈물을 닦아 냈다. 그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돌출 무대를 향해 걸어 나갔다.

걸어가는 걸음마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고 또 과거로부터의 나아감을 뜻했다. 지나간 인연, 새로운 만남,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 앞으로 알아갈 사람들. 그의 발자취에 남은 기억들이 한순간 선명해졌다가 곧 희미해졌다.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가루가 눈물 젖은 뺨에 자꾸만 달라붙어 여러 번 손으로 털어 내야 했다. 그리고 무대의 끝에 도착했을 때, 이진은 방금 울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화사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눈물의 흔적은 속눈썹 끝에 남은 물기뿐이었다.

“승자에게 왕관이 씌워집니다.”

이진의 포지션 멘토였던 조엘이 무대 위로 올라와 이진의 머리에 왕관을 얹었다. 화려한 금사로 고급스러운 문양이 수놓인 망토도 어깨에 걸쳐졌다. 소품치고는 제법 묵직한 무게가 아직까지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 하던 이진을 비로소 현실에 묶어 두었다.

그의 뒤에는 환호와 박수로 그를 축하하는 동료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는 한 눈에 담을 수도 없이 많은 수의 팬들이 가득했다. 이진을 동경하고 열광하고 또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이것으로 새로운 별이 떠올랐습니다.”

이진은 몸을 돌려 동료들을 바라봤다. 이제 우승자가 된 그의 권한에 따라 새로운 그룹에 함께할 멤버를 선택할 수 있다. 누군가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평온한 얼굴로 그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이진이 가장 먼저 이름을 부를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세상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사람. 이진을 자괴감에 빠뜨렸던, 갈 곳 없는 원망을 받아 내야 했던 사람. 멈춰 서지 않을 원동력이 되어 주고, 견고한 벽을 허물고 다가온,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새로이 알게 해 준 사람.

……이진에게 누구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그리고 아마 이진에게 벌어진 기적을 불러일으킨 사람.

이진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자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선승현.”

떠들썩한 환호성과 밝고 경쾌한 음악이 어우러져 한편의 영화 같은 순간이 연출되었으나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진은 승현을 바라보았고 승현도 이진을 바라보았다.

한때 이진은 이 장면을 TV 화면 너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금 빛 아래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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