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68화 (168/173)

168화

그때,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었다. 리허설에서도 예고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혹시 방송 사고인가 싶어 참가자들은 태연한 낯을 연기하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음악 소리는 멎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갔다. 피아노에 일렉 기타와 베이스, 바이올린 등의 악기들이 섞이며 풍부한 음을 자아낼 무렵이 되어서야 참가자들은 이게 예정된 연출임을 깨닫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머리 위에서 비장한 푸른빛을 쏘아 대던 조명은 어느새 오색찬란하게 변해 있었다.

“관객 여러분, 그리고 참가자 여러분. 모두 당황하신 것 같네요. 사실 여러분을 위해 오늘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무대가 있습니다.”

진행자인 홍서가 입을 열자마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스포트라이트가 관객석 한곳을 비추자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관객석에서 누군가 일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터트렸다.

“안녕, 얘들아. 잘 지냈어?”

그는 3라운드에서 탈락한 참가자 윌리엄이었다. 곧이어 다른 곳에서도 노랫소리가 들리더니 어김없이 그곳을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이번 역시 낯이 익은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 위로 손을 흔들었다.

이진과 승현을 포함한 참가자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틈에 관객석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하고 손을 흔드는 행렬이 이어졌다. 멀리서 봐도 익숙한 얼굴들, 먼저 퇴장해야만 했던 이들이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윈올의 시작을 함께해 주신 분들이죠. 비록 탈락했지만, 마지막까지 참가자 여러분들 그리고 팬분들과 함께하기 위해 특별 공연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꺄아아아!”

홍서가 큰 목소리로 소개하자 비명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그 열렬한 환호에 한 번도 관객과 함께하는 라이브 무대를 경험하지 못한 몇몇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탈락자들은 하나둘씩 가사 없는 노래를 합창하며 통로를 지나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삽시간에 수많은 이들이 무대 위를 가득 메웠다.

“이진아, 승현아.”

“형!”

“하늘아!”

윌리엄이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이진의 곁에 서 있던 하늘이 가장 먼저 달려가 윌리엄을 덥석 끌어안았다. 찬우는 등 뒤에서 승현과 이진에게 각각 어깨동무를 하더니 그대로 윌리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올 수가 있어!”

하늘을 끌어안은 윌리엄이 반갑게 웃자 찬우가 서운하다는 듯 외쳤다. 미열과 짧게 눈인사를 한 윌리엄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는 사람이 많은 미열은 다른 탈락자들에게 인사하기 바빴다.

“비밀로 해야 재미있지. 우리도 이거 연습하느라 바빴어.”

“사람이 많아서 맞추기 힘들었겠다.”

“근데 있지, 아직 끝이 아니야.”

윌리엄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틀어졌다. 공개 되지 않은 비하인드 컷 중에 유독 사이가 좋아 보이는 조각 영상들이 연이어 편집되어 있었다. 거기에 넋을 뺀 사이 삼삼오오 모인 탈락자들이 마이크를 하나씩 쥐고 합창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우리의 만남. 아쉽게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처음 우리 만났던 순간으로 되돌려 볼까.”

익숙한 가사에 몇몇이 탄성을 흘렸다. 반주가 귀에 익다 했더니 5라운드 단체 무대곡 ‘우리 또 만나’였다. 졸업식 노래처럼 단순하게 편곡된 곡으로 친숙한 멜로디가 강점이었다. 실제로 오늘 이 곡을 처음 들은 관객들도 어느새 하나둘씩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다툼도 하고 화해도 했어. 친구가 그렇지.”

“너와 함께했던 시간 너무도 짧아. 다시 돌아가면 좋겠어.”

잠시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내 크흠, 하고 영상에서 소리가 먼저 나왔다.

-안녕하세요, 선승현입니다.

화면 가득 잡힌 인물은 바로 선승현이었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화면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유이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찬우라고 합니다.

-바비 엔터테인먼트에서 온 정하늘이라고 합니다.

승현에 이어 참가자들이 각자 인사를 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방송 시작 전, 찍었던 자기 소개 영상과 그동안 인터뷰를 하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던 영상들이 뒤섞여 있었다.

-아……. 안녕?

그리고 이번엔 이진이 나타났다. 화면 속 이진은 어색한 어투로 카메라 너머를 향해 말을 걸더니, 옅은 미소를 띠고 가만히 렌즈를 응시했다. 이진은 저 영상이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기억을 못할 수가 없었다. 바로 어제 찍었던 마지막 인터뷰 영상이었으니까.

-오랜만이야. 잘 지내니?

마지막 인터뷰의 질문은 첫날의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로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의 자신을 설명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하라고 했다.

-나는 벌써 마지막 날에 도착했어. 너는 이제 시작이겠구나.

이진은 시청자들과 눈을 맞춘 채 조곤조곤 말했다. 그리고 화면이 어두워지며 다음으로 찬우가 나왔다.

-처음 윈올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던 날 기억나냐? 엄마 막 수술 끝나서 누워계시는데, 그때 결심했잖아. 내가 뭐라도 해서 뭐라도 보여 드려야겠다고.

그는 아픈 어머니의 얘기를 하며 잠시 목소리가 작아드는 듯 했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야, 덕분에 우리 엄마 티브이 나왔어, 하하.

차례로 영상은 참가자들의 말을 한마디씩 잘라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한결같이 응원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들 덕분이야.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너무 지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가. 너도 기억하지?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 나갈 수 있었던 건 곁에서 함께 달리던 친구들이 있어서…….

-힘들 때는 동료들한테 의지도 하고. 먼저 손을 내밀면 내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 용기 내!

스스로에게 보내는 수많은 격려와 응원의 말들이 빠르게 화면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이진이 화면에 등장했다.

-있지, 들으면 아마 의외라고 생각할 텐데.

BGM이 완전히 사라져 지잉대는 기계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진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에 눈을 맞췄다.

-나는 지금 즐거워. 너도 곧 괜찮아질 거야.

이진의 영상이 끝나자마자 다시 목청 높인 합창이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폭죽이 하늘을 가르고 빛무리를 터트리듯 뜨거운 열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들은 긴장으로 굳어진 참가자들의 마음을 가르고 들어가 작은 불꽃을 선물했다.

“여름 태양 아래의 너는 눈부셔. 평생 잊고 싶지 않을 만큼.”

“여름밤은 너무 짧으니까, 더욱 소중한 걸 잊지 않아.”

살아남은 이들을 축하하고, 새로운 도전을 끝맺는 이들을 치하하고, 그리고 이 아름다운 순간을 모두가 다함께 만들어 냈다는 걸 자축하기 위해 공연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반짝이는 순간, 너와 함께 영원토록 기억할 기억들?”

펑! 머리 위로 분홍빛 꽃가루가 휘날렸다.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나부끼던 꽃가루가 톡, 승현의 머리 위로 안착했다. 이진은 그 궤적을 끝까지 눈으로 쫓았다.

‘그래, 이거면 된 거야.’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자. 욕심내지 않으면 질투할 필요도 없다. 이진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투표가 종료되었다.

깜짝 공연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왔던 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다시 운명을 결정할 발표를 기다리는 생존자들만이 남았다.

“자, 지금 제 손에 결과가 쥐어졌습니다.”

다급히 무대 위로 올라온 제작진에게 최종 순위가 적힌 대본을 전달받은 홍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대본을 꺼내어 읽어 본 뒤에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우승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는, 탈락자 7명을 먼저 공개하겠습니다.”

희생자를 찾는 맹수처럼 조명이 이리저리 오갔다. 그에 따라 참가자들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길어짐을 반복했다. 긴장감이 가득 조성되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박탈당하는 순간…….

“탈락자에게 빛을 밝혀 주세요!”

붉은색 스포트라이트가 탈락자의 머리 위를 정확히 비췄다. 그럼에도 누구를 비췄는지 헷갈릴까 봐, 진행자는 한 명씩 이름을 불러 확인을 마쳤다.

김태원, 민서호, 장현기, 김보원, 최강희, 나봄, 그리고 임채일. 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마지막 라운드까지 왔으나 한 끗 차이로 탈락하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여러분의 여정은 여기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감 한마디씩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게 해 주신 팬분들께 너무 감사드리고요…… 흐윽.”

누군가 눈물을 터트렸다. 이진은 차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관객석에서는 안타까움을 담은 목소리들이 메아리쳤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우는 걸까. 아니면 받아들였음에도 감당할 수 없는 걸까. 불행을 연민하는 아우성을 듣자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강하게 박동했다. 분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서 자신의 과거가 겹쳐 보였다.

“승현이 형, 마지막에 같이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 내가 정말 미안해.”

채일은 다른 것보다 먼저 승현에게 사과했다. 아마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학창 시절 무대를 망쳤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었다거나 애초에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진에겐 제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다 변명이야. 굴러 들어온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게 후회되는 거겠지.’

이진은 채일의 사과에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나 승현은 절뚝이는 다리로 채일에게 걸어가 그를 안고 등을 두드려 주자 조금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승현은 이미 채일의 행동을 용서했거나 처음부터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진은 채일이 제 고집을 부리다 후회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겹쳐 보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임채일은 분명 얄미웠지만, 그의 슬픔에 찬 얼굴을 보며 비웃을 만큼 모질게 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원수 같던 놈이라 하더라도 그간 동고동락하며 든 미운 정도 있었고, 어쩌면 이게 이진이 채일을 보는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었다.

승현의 대인배적인 면모를 향한 존경과 이제 무대를 내려가야 할 탈락자들을 향한 위로를 담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곧바로 순위 발표가 이어집니다. 먼저 14위입니다.”

탈락자들이 무대를 내려가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하위권 순위가 발표되었다. 14위 두주형, 13위 이진연, 12위 리웨이. 블라인드 전과 비교했을 때 순위에 큰 이변은 없었다. 각자의 소감은 우승자가 정해지고 함께할 멤버를 지목한 뒤로 미뤄졌다.

쉴 틈 없이 순위 발표가 이어졌다. 11위 허동규, 10위 박희영, 9위 강지흔. 짧은 소개와 함께 호명되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성큼성큼 미래가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태연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인데, 자꾸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긴장, 긴장해서 그래. 심호흡하자.’

이진은 가슴이 크게 부풀 때까지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