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처음 승현은 보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사의 반 정도를 녹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라이브를 권장했기에 허락을 받기 힘들었다.
여러 참가자들이 모여 춤은 안 춰도 되지만 노래는 꼭 불러야 한다는 규칙이 불공평하다 성토해 봐도 ‘편곡이 자유인데 왜 불공평하다고만 생각하느냐’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래서 승현은 아예 녹음이 꼭 필요한 편곡을 제안했다. 바로 가사 두 소절을 겹쳐 버리는 것이었다. 가사 내용 그대로 끊이질 않는 집착을 마치 환청처럼 표현하겠다는 감언이설은 어려운 파트는 전부 녹음을 따고 춤에만 집중하기 위한 핑계였다.
“타오를 듯이 커져 가는 갈증.”
“아무리 삼켜도 충족할 수 없는?”
계획대로만 진행되었더라면 사고가 났더라도 승현 혼자서 무대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채일이 합류하게 되며 보컬 파트를 재분배하는 바람에 녹음본을 완성하지 못한 게 발목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승현은 서포터도 없이 어려운 파트를 소화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craving you, craving love.”
“이건 좀 위험해. 모두 알고 있지.”
다행히 승현의 목소리 톤은 저음이 풍부하게 섞여 있는 편이라 마이크만 갖다 대도 얼추 분위기 있게 들려 라이브에 퍽 잘 어울렸다. 윈올을 거치며 실력이 많이 향상되기도 했고, 본래 지닌 음악적 센스도 나쁘지 않았다. 멘토들은 그가 보컬로만 무대를 이끌어가기에 충분하다 평가했다. 덕분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안정적인 무대가 가능했다.
이진은 허밍으로 MR의 빈 부분을 메우면서 낮은 목소리를 몽환적으로 울려 환청이라는 콘셉트를 더 철저히 살렸다. 승현은 이진의 의도를 금세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합을 맞추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이진은 이렇게 된 이상 승현이 얼기설기 붙여 놓은 핑곗거리를 확실히 부각하자고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무대도 없었다.
“So, why don’t we drink?”
“So, why don’t we drink?”
처음으로 서로 같은 가사를 불렀다. 이진은 순간 척추를 타고 짜릿한 쾌감이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아까 전 홀로 완벽한 무대를 해냈을 때와는 다른 희열이었다.
두 사람의 교감은 무대 위에서 큰 시너지를 냈다. 비록 등을 맞대고 있어 서로를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이진은 자신을 위해 애드리브를 넣을 타이밍을 비워 두거나 불쑥 제 목소리 위에 화음을 쌓아 오는 승현을 느낄 수 있었다. 무대가 점점 더 즐거워졌다.
“다다익선 선승현! 개선장군 선승현!”
“눈부시다 선승현! 가시광선 선승현!”
어디선가 작게 시작된 응원 구호가 조금씩 커져 공연장을 가득 울렸다. 이진은 구호를 들으며 자신의 팬들이 그의 이름 세 글자 중 ‘진’에 유독 집착하는 것처럼 승현의 팬들은 ‘선’을 좋아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오는 구호에 앞서 한 생각을 철회했다.
“승승장구 선승현! 기승전결 선승현!”
“백전백승 선승현! 승천하자 선승현!”
좋은 건 아주 다 갖다 붙이는구나 싶었다.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관객의 호응이 강하면 강할수록 무대 위 공연자는 신이 나는 법이다. 이진은 승현을 응원하는 수많은 목소리를 감상하며 마치 자신이 응원받는 것처럼 더욱 힘을 냈다.
“넌 결코 모르지. 내가 왜 애타하는지.”
“나의 이 갈망은 꺼트릴 수 없을 거야.”
노래는 곧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진은 서포터로서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기에 가장 높은 고음이 등장하는 하이라이트 파트는 승현이 소화했다. 다행히 그는 좋은 성량을 타고났다. 시원한 목소리가 무리 없이 높은 음을 찍고 내려왔다.
안정적인 라이브는 관객들을 고취시켰다. 선승현하면 보컬보다는 댄스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었기에 예상외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갔다. 게다가 이진이 무대를 할 때에는 그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관객들의 의지가 느껴졌으나 다들 지금은 자유롭게 응원 구호를 외치고 소리를 지르는 분위기였다.
“난 오늘도 마신다.”
“This craving juice?”
그렇게 열렬한 환호 속에서 노래가 끝나고, 승현의 마지막 무대가 막을 내렸다.
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한번 인사하고 뒤돌아 이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진은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낼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체를 가려 주던 조명이 바뀌기 전에 후다닥 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찬우와 미열, 하늘 등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박수를 쳐 주었다.
“선승현 마지막 무대 못 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멋지게 해내다니. 진짜 대단하다.”
“이진아 너, 네가 서포터한 거 밝히지 않아도 괜찮겠어?”
“그럼. 괜히 형평성 문제로 시끄러워지는 것보다 나아.”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게다가 꼭 다른 참가자들 간의 형평성 문제가 아니더라도 서포터의 정체가 이진이었음을 밝히면 승현이 받을 스포트라이트를 뺏어 오는 꼴이 된다. 욕심을 채우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선에서 끝내기 위해서는 잠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옳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었다.
무대 밑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자 화려한 빛 아래 홀로 서 있는 승현이 눈에 들어왔다. 멘토들은 사전에 전달받은 내용이 있는지 서포터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대신 가사 해석과 무대 연출을 언급하며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칭찬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승현 씨를 보면서 성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서브 보컬2 그룹을 담당했던 멘토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무난한 인기를 누리다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메인 댄서로 현재는 유명 댄스 크루 활동과 소속사 신인 아이돌 트레이닝을 함께 이어 가는 인물이었다. 1라운드 때부터 스승으로서, 또 선배로서 승현에게 여러모로 관심을 보였 왔기에 그의 평가에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단순히 실력이 발전했다는 게 아니에요. 첫 만남에 비해 승현 씨 눈빛이 굉장히 달라졌어요. 어떻게 표현할까요……. 당시의 승현 씨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오해를 받아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포지션이나 분량에 욕심을 내지도 않았죠.”
승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멘토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실했지만 어딘가 억눌려 있는 게 보였거든요. 무대에서도 서브 보컬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어요. 모자라지도 튀지도 않는 적절한 밸런스를 잘 찾았죠. 물론, 그룹의 멤버로서는 나쁘지 않았어요. 프로듀서 입장에서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신기하게 지금은 뭔가 목표가 생긴 것 같아요.”
관객들의 아우성 소리로 장내가 떠들썩해졌다. 미열이 ‘참나, 언제 또 그렇게 변했대?’ 하고 중얼거렸다.
“사람 성격이라는 게 참 쉽게 변하지 않는데, 지금의 승현 씨는 무대 위에서 표현하고 싶은 게 확실히 생긴 듯하네요. 발산하지 못한 열망은 티가 나는 법이거든요. 그런 변화의 결과가 이번 마지막 무대에서 아주 또렷이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이진은 승현의 칭찬을 들으며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승현이 이진의 변화를 이끌어낸 만큼 이진도 그의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잘 지켜 나가길 바라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불꽃이 하나 타오르고 있어야 빛나는 법이니까요.”
멘토는 그 말을 끝으로 마이크를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 승현은 커다란 박수갈채 속에서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였다.
박수갈채는 승현이 고개를 들고 나서도 끊이지 않았다. 늘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던 그였다. 한 명 한 명 동료를 신경 쓰고, 무대 위에서는 절대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해를 받아도 변명 없이 묵묵히 제 노력을 이어 가는 모습은 그를 완성된 인물로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 승현은 불의의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특기를 내려놓고 모두가 약점이라 생각했던 부분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모두에게 당당하게 인정받았다. 그야말로 꾸준히 상위권에 머무르며 굳건히 1위를 지켜 온 숭현에게 걸맞는 결말이었다.
‘그래, 네가 바로 주인공이구나.’
이진은 문득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되어 우승을 거머쥘 사람이 승현임을 직감했다. 과거 온갖 루머와 구설수에 시달리면서도 이진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단단한 광채를 내뿜었던 승현이었다. 지금은 다소 날카로움이 무뎌졌지만, 그렇기에 더 온화하고 선명한 빛이 느껴졌다.
스크린에 커다랗게 잡힌 승현의 얼굴은 여전히 속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승현아, 네가 주인공이라면…… 나는 괜찮을 것 같아.’
이진은 언젠가 승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승현에게 지게 된다면 잠깐은 분해할지도, 또 노력이 부족했나 자책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응원해 준 팬들에게도 미안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들이 이진을 바꾸지도 못할 것이다.
승현이 웃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을 것이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면 부끄러워 뺨을 붉힐 테다. 그리고 때로는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싶어질 것이다.
“승현이 자식, 엄청나게 칭찬받네.”
“이진 형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대를 잘하긴 했지. 솔직히 다들 잘해서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아.”
“정하늘, 너 웬일로 평가가 후하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인데 깐깐하게 굴어서 뭐 해.”
찬우와 미열, 하늘도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큰지 무대 위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그나저나 하늘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너희 소속사에서는 네가 1위 못 하면 윈올 말고 따로 데뷔시키려던 거 아니었어?”
“응, 내가 메인인 걸로 새 팀을 꾸려 준다고 하기는 했는데…….”
미열의 물음에 하늘이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나는 내가 센터가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연습생 애들보다는 형들이랑 더 같이 하고 싶어.”
“이야, 뭐야. 감동인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나 때문에 다른 애들 데뷔도 미뤄지는 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뭘 그런 걸 고민해? 우선은 데뷔하고 소속사가 자꾸 간섭하면 확 재계약 하지 말아 버려.”
“정말 그럴까?”
찬우가 가볍게 말했다. 이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계약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소속사의 의견에 너무 휘둘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늘은 형들이 자신을 지지해 주자 마음이 놓이는지 씩 웃어 보였다.
잠시 후 모든 참가자들의 무대가 끝나고 결과 발표만이 남았다. 투표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참가자들은 무대 위에 올라와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투표 현황을 확인하며 미공개 영상을 보거나 소감을 말하거나 하며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냈다.
현재 투표수 1위는 선승현 2위는 유이진으로 3위인 한찬우와는 큰 격차를 벌리며 둘만의 경쟁을 이어 갔다. 1위와 2위의 표 차는 몹시 적어 간혹 이진의 순위가 승현을 추월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승현이 안정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이었다.
“지금부터 실시간 집계 현황이 블라인드 됩니다.”
정확히 투표 마감까지 5분이 남았을 때 집계 현황을 보여 주던 스크린이 검게 물들었다. 집계 현황이 블라인드 되기 직전, 그래프는 승현이 이진에게 점점 거리를 벌리는 모양새를 그렸다. 아쉬운 탄성이 관객석에서 가득히 흘러나왔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이진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남은 5분 동안 이진의 투표수가 승현을 추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슬프거나 허탈하지는 않았다. 무대가 끝난 뒤 어렴풋이 직감하기도 했고, 서로 최선을 다한 결과이니 진심으로 승현의 승리를 축하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이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기쁘기까지 했다.
아, 이게 바로 달콤한 패배라고들 부르는 감각인 건가. 이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