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66화 (166/173)

166화

한편 대기실 분위기도 후끈 달아올랐다. 요 근래 대부분 참가자들에게 이진은 경쟁 상대라기보다는 대단한 실력을 지닌 우승 후보로 인식되었기에 다 같이 관객이 돼 편하게 감상하는 분위기였다.

자신감에 찬 이진의 표정이 스크린에 가득 비춰지자 ‘우오오오!’ 하고 장난 섞인 야유가 쏟아졌다. 그 속에서 함께 야유를 보내던 미열이 불현듯 소파에 앉아 있는 승현을 돌아보았다.

“선승현, 너 이래서 1위 자리 지킬 수 있겠냐?”

별 뜻 없이 농담으로 물어본 것이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답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승현은 현재 이진의 거의 유일한 경쟁 상대였다. 자연히 그의 대답에는 무게가 실렸다.

“못 지켜도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승현은 맥이 빠질 만큼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야, 인마. 포기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어쩔 수 없잖아. 1위 못 하면 그냥 다른 거 하지 뭐.”

승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와서 다른 걸 한다니. 방송 초반 두 사람이 한 내기가 생각난 미열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거? 데뷔 안 하려고?”

“아니, 그건 아닌데. 흠, 결혼이나 할까.”

“얜 또 뭔 헛소리야?”

미열이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 같기는 한데 이해를 못한 탓이다. 승현은 자신이 잠시 정신을 놓고 생각만 하던 말을 내뱉어 버린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입가에 걸린 의미심장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아 미열에게 빈축을 샀다.

모니터 속에서는 무대를 끝낸 이진이 멘토들의 평가를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흡족함이 승현의 미소 속에도 배어 있었다.

***

“잠깐, 나 먼저!”

멘토단 중 이진의 가장 큰 팬인 조엘이 마이크를 들고 덥석 집어 들었다. 원래는 앉은 순서대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마이크가 넘어갔으나 이번에는 양보할 수 없었다.

“와, 진짜 대단해요. 이건 진짜, 우와…….”

조엘은 심사 위원석 한가운데에 앉아서 몇 번이고 감탄을 토해 냈다. 생방송이기에 평가에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생산적이지 못한 평가가 끊이질 않자 결국 옆에 앉은 멘토가 마이크를 뺏으려고 손을 쭉 뻗었다. 그에 깜짝 놀란 조엘이 옆 사람의 손을 피해 가며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진 씨는 늘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여 줬기에 여기서 더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틀렸네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겨우겨우 심사평을 시작했으나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곧바로 마이크를 넘겨야 했다. 그 모습을 모두 목격한 관객석에서 아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엘의 손에서 마이크를 뺏어 간 사람은 리드 보컬을 담당했던 멘토 김성진이었다.

“정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요즘은 그런 경우 많거든요. 그냥 고음만 잘 지르면 노래 잘하는 줄 아는 거요. 솔직히 저도 이진 씨가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일 거란 편견이 있었는데, 이번 무대 보고 생각을 싹 고쳐먹었습니다. 음악에 대해, 보컬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고민한 흔적이 느껴집니다.”

그는 한때 보컬 트레이너였다가 잘생긴 외모로 인기를 끌어 아이돌로 데뷔를 한 가수로 그룹 자체는 3년도 버티지 못하고 해체됐지만, 홀로 예능에 자리를 잡아 아직도 꾸준히 방송에 나오는 인물이었다. 특히 트레이너였던 전적 탓인지 보컬리스트로서의 자부심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방금 공연장 다 씹어 먹을 것같이 노래 불렀던 사람은 어디 가고 우리 윈올 귀염둥이만 남아 있네요.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귀염둥이라니, 이진 씨는 대장에 더 가깝지 않나요? 하하, 멘트에 사심이 좀 섞인 것 같은데요.”

프로그램 후반부로 갈수록 냉정하고 엄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 줬던 멘토들은 아주 오랜만에 흥분에 겨워 애정 어린 농담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진의 팬들은 멘토들이 입을 뗄 때마다 큰 함성을 지르며 기쁨을 한껏 발산했다.

이진은 처음에는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후한 평가가 이어질수록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기분 좋은 칭찬에 한껏 익어 버린 이진의 고개도 점점 아래로 향했다.

“제일 놀라운 건 가만히 앉아서 이 넓은 무대를 압도했다는 거예요. 저는 보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단신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건 댄서들에게도 큰 과업이거든요. 아주 훌륭했습니다.”

사회자이자 멘토인 홍서의 평을 마지막으로 이진은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기 전 관객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자 다시 열화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순간 긴장감이 확 풀리며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스태프가 마이크를 제거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을 보며 억지로 무릎에 힘을 팍 주어야 했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그 평가가 이진을 가장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번 무대에서 목표했던 모든 걸 이루고 내려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매워지지 않았던 구멍이 드디어 채워지는 것 같았다.

윈올에 출연하고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과거의 그림자에 발이 매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돌을 선발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노래 외 요소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이진이 초반부터 주목받을 수 있던 이유가 아이돌 지망생들 틈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외모 덕분이었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달랐다. 이진은 순수하게 노래로 승부하는 가수를 꿈꿨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인정을 받았다. 춤을 추면서도 안정적으로 노래를 잘 부른다거나 평소 발성을 버리고 그룹 멤버들과 조화를 잘 맞추게 되었다는 칭찬이 아니라 온전히 그에게만 집중해 받은 평가였다.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또 인정받고 싶었던 모습 그대로 온 힘을 다해 부딪쳐 결과를 얻어 냈다.

이진은 조금 전 들은 평가를 곱씹으며 그들은 이제야 안 눈치지만 자신은 원래 이렇게 잘했다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모든 걸 털어 낸 오늘만큼은 스스로에 대한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어깨가 으쓱한 것 이상으로 이제는 정말 과거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았다. 윈올의 마지막 무대에서 드디어 오랜 숙원을 이뤘다. 바라던 것은 모두 이루었으니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한가득 샘솟았다.

“형, 왔어요?”

“유이진! 이번에도 전설을 썼구나.”

“진짜 화면으로 보는데도 소름이 쫙 돋더라니까?”

대기실로 돌아가자 화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참가자들이 고개를 휙 돌리고 이진을 바라봤다. 미열과 찬우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칭찬을 이어 갔다. 만면에 웃음꽃이 활짝 피우고 기분 좋게 웃었다.

무대 전까지 휴식해 최대한 컨디션을 회복하라는 지령을 받은 승현은 소파에 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멀찍이서 슬픈 눈빛을 쏘아 댔지만, 이진은 눈앞의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백미열 씨, 무대 뒤에서 대기할게요!”

“아차.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잠시 뒤 미열이 다음 무대를 준비하러 대기실을 떠났다. 미열이 떠나며 모여 있던 사람들도 다시 화면 속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진은 떠나는 미열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미열의 다음은 다름 아닌 승현의 차례였다.

잘할 수 있을까. 슬그머니 불안감이 찾아왔다. 기껏 윈올의 마지막 무대를 완벽히 마무리했다는 충족감에 젖어 있었는데, 이제는 제 발로 아슬아슬한 흔들다리 위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 무대가 이진을 온전히 드러내는 무대였다면 이번에는 승현을 위해 완전히 존재감을 죽여야 했다. 물론 승현을 위해 선택한 일이고 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동기가 훌륭하다고 싫은 일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진은 승현을 위해 그야말로 희생을 하고 있었다.

‘연습할 때 호흡이 잘 맞았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게 만들어야지.’

일부러 굳게 다짐했지만, 급조된 무대를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이진이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승현이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승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장에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이었으나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린 팔이나 절뚝이는 걸음걸이에서 확연히 다친 티가 났다.

“괜찮아요?”

승현이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진은 애써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 너는 괜찮아?”

지금 가장 불안할 사람은 무대 두 시간 전에 갑자기 사고를 당한 승현이었다. 내 무대는 잘 끝내 놓고 돕기로 한 상대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연장자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하면 안 될 일이었다. 이진은 반성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 간지럽지도 않아요.”

방금 절뚝이며 걷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승현이 괜한 허세를 부리며 답했다. 이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시선을 슬쩍 피한다.

“한 번 정도는 음 이탈 나도 이해해 줄게.”

이진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비로운 척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승현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하나도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야말로 형이 지금 그만두고 싶다고 해도 이해할게요.”

그의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꽉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진이 그만둔다는 건 승현도 무대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진은 승현이 아주 사소한 흔들림을 배려하겠답시고 무대에 오를 기회를 쉽게 놓아 버리는 데 실망하면서도 저런 생각이 들게끔 만든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여기서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나 내 각오가 그렇게 가벼워 보이냐 다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필요한 게 있었다.

승현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것.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하지 마.”

이진이 승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다치지 않은 쪽 어깨가 맞나 다시 한번 확인하느라 손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승현은 이진의 행동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혹시 제가 드린 오르골 들어 보셨어요?”

“네가 나중에 열어 보래서 안 들어 봤어. 왜?”

“아니에요. 그냥…….”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고 스태프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선승현 씨, 무대 대기할게요.”

“네, 지금 가요.”

이진은 승현을 부축하듯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물었다.

“글쎄요. 형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승현은 실없는 소리나 하며 푸흐흐 웃어 댔다. 참나, 눈치는 더럽게 없으면서 쓸데없는 말은 참 잘한다 싶었다. 이진은 그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기고는 무대 뒤로 이동했다. 곧 스태프에게서 신호가 왔다. 두 사람은 발을 맞춰 함께 위로 올라갔다.

관객석을 향해 낮게 빛을 뿜어 대는 조명 탓에 역광이 드는 무대 위로 의자 두 개가 서로 등을 맞댄 채 대각선으로 놓였다. 하나는 관객석을 보고 다른 하나는 등지듯 무대 뒤편을 바라보고 있어 마치 하나의 의자가 거울에 비친 반사체같이 보였다.

전주가 시작되고 승현과 이진은 각자 무대 반대편에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역광 때문에 희미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리허설에 참가했던 팬들은 기민하게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쪽이 승현임을 알아차렸다. 둘이 동시에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들자 모습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마이크를 입가에 대자마자 반사적으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카메라에 잡히는 관객들의 얼굴에서는 특이한 연출 방식에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Craving juice, craving juice?”

“마시고 삼켜도 끊이지 않아.”

그때 승현과 이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이루는 절묘한 화음에 무대를 향한 기대감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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