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윈올은 곧 끝날 테지만 윈올과 비슷한 프로그램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의 잔혹함을 극대화시킨 시스템이 잘 팔린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오히려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날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흥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참가자들은 적어도 이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제작진의 농락에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고 참고만 있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야 했다.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참가자들은 결국 제작진에게 언제든지 교체 가능 한 약자일 뿐이니까. 그들은 절박하기에 불합리를 보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누군가는 제작진에게 제대로 경고해야 했다. 언제까지나 침묵하지는 않을 거라고, 도를 넘는 짓을 벌이면 반드시 훗날 탈이 생길 것이라고, 그날이 오면 시청자들 역시 참가자들 편에 서서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찾아낼 거라고. 단 한 명이라도 나서서 경고해야 했다.
“그게 이 프로그램으로 처음 데뷔할 사람으로서 질 수 있는 가장 큰 책임이라고 생각해.”
이진이 말을 마무리하자 승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알기 힘든 표정이었다.
‘……너무 멀리 나갔다고 생각하려나.’
뒤늦게 승현이 어떻게 생각할지 조마조마해졌다. 이러나저러나 이진은 이 프로그램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 선례를 만드니 책임을 진다느니 하는 소리가 위선적으로 들릴지도 몰랐다.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현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이진은 제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짧은 침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진지한 얼굴로 생각을 가다듬던 승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계약할 때 소송 전문 변호사랑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걱정이 무색하게 승현은 이진보다 최소 백보는 멀리 나가 있었다.
“변호사? 그, 그런 건 너무 돈이 많이 들지 않아?”
“생각보다 많이 들지는 않아요. 협상 전문가들도 좋지만, 아무래도 소송 쪽이 확실한 압박이 될 테고. 어차피 조건 협상은 다른 애들 소속사 법무 팀에서 한 번씩 점검할 테니까요. 이왕 하는 거 이름 있는 로펌을 고용하면 확실히 기는 죽여 놓을 수 있겠네요.”
“아니, 잠깐만. 우리가 갑자기 그런 이름 있는 로펌 변호사들을 어떻게 구해?”
이진이 생각한 조건 협상이란 방송국과의 기 싸움이었지 법정 싸움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고 회로가 대뜸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는 방향으로 튈 수 있는지 참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승현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태연한 얼굴로 비용 걱정은 말라고 말했다.
“우선 있는 돈으로 해 보고 안 되면 아버지한테 도와달라고 하죠, 뭐.”
“그래도 괜찮아? 불편할 텐데…….”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부탁하면 들어주시는 편이에요. 그리고 계약 문제는 신중해야 하니까 굳이 형이 한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해요.”
미리 준비라도 한 것인지 승현의 명쾌한 말에 이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얘는 무슨 부잣집 아들 버프를 이런 데서 발휘해? 새삼 그의 뒤에서 신사임당색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형은 이제 복잡한 생각은 말아요. 형이 관련되었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떠넘길 수 없는 책임만 다하면 돼요.”
떠넘길 수 없는 책임. 좋은 무대를 만들고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그들이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책임이었다. 이진은 승현의 말에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풀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형이 제일 잘하는 일이죠.”
승현도 그를 따라 웃었다. 이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러나 한껏 결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한 번만 더 맞춰 보자.”
가사지에 적어 둔 포인트를 유념하며 한 소설씩 연습을 시작했다. 이진은 중간중간 승현의 파트에 화음을 넣었다. 제법 완성도 있는 화음이 귓가를 울렸다.
짧게 맞춰 본 것치고 연습은 아주 순조로웠다. 듀엣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의 호흡을 읽고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무조건 MR에 맞춰서 연습을 해서는 부드러운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
성격이나 사고방식, 살아온 환경까지 여러모로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동안 서로를 신경 써 온 시간이 길었던 데다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이 닮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희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서 뭐 하냐?”
“연습.”
문득 미열이 물었다. 대기실을 같이 사용하는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바짝 붙어 앉았더니 남이 보기에 과하게 오붓해 보인 모양이었다. 이진은 숨결이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피부의 온기가 느껴질 만큼은 가까운 거리가 조금 애달프게 느껴졌다. 어쩐지 허전하게 느껴지는 손을 꼬물거리다 꽉 주먹을 쥐었다.
‘집중하자, 집중!’
그리고 연습에 몰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진의 순서가 찾아왔다.
***
피아노 소리가 시작을 알렸다. 서정적인 전주에 가벼운 휘파람 소리가 섞여 든다. 관객석에서 벌써부터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진은 철제 바 스툴에 걸터앉아 스탠딩 마이크를 가볍게 쥐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럴싸한 분위기가 풍겼다. 푸른빛 조명에 비친 머리카락이 신비로운 색을 내뿜으며 빛을 반사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셋.”
이진은 이번 무대를 완전히 보컬 중심으로 기획했다. 안무는 간단한 손동작 정도가 다였다. 오로지 성량과 음색, 그리고 기교만으로 정면 승부를 보겠다는 다짐이 느껴지는 기획이었다.
“언제나 바랐던, 바라 볼 수밖에 없던 소원.”
첫 소절이 시작되고 마이크를 타고 아진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대 어린 표정으로 서 있던 관객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이진의 음색은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고 아찔한 기분을 들게 했다. 무대를 심사하기 위해 앉아 있던 멘토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실소를 흘리는 이도 있었다.
“더 이상 바라만 보고 있기는 싫으니까.”
이진은 그동안 메인 보컬로서 훌륭한 기량을 보여 주었지만, 남들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춤 실력을 보완하고자 연습 시간 대부분을 안무 연습에 할애했다. 팀으로 서는 무대의 완성도는 보컬의 뛰어남보다는 안무가 얼마나 칼같이 맞아 떨어지는지, 동선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동하는지 등으로 결정되었기에 자연스레 그 부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사실이 마지막 라운드에 도착하고서야 아쉬웠다. 유이진의 강점은 노래에 있었다. 그런데 이진은 아직 제 기량을 완전히 보여 주지 못했다. 이번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낼 마지막 기회였다.
‘어중간한 건 싫어.’
이진은 자신의 특기를 모조리 보여 주겠다는 각오로 무대를 준비했다.
“이제 나를 알겠니. 내 이름을 불러 보겠니.”
마지막 음을 길게 끄는 애드리브에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 이진의 가슴도 한껏 벅차올랐다.
“너만을 기다리는 나를…….”
본래 진성으로 강하게 내질러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이진은 바람에 흩어질듯 가냘픈 가성을 사용해 아쉬움을 남겼다. 2절의 마지막 부근에서 폭풍처럼 쏟아져야 할 하이라이트 파트를 기다리게끔 만든 것이다.
“하나만 골라 봐. 선택의 때가 왔어.”
같은 노래를 공연하게 될 경쟁자들 틈에서 조금이라도 더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이진이 택한 전략은 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곡을 선사하는 것이다. 단순한 멜로디와 반복적인 비트로 사람을 중독시키는 후크송처럼 흠 잡을 데 없는 목소리와 호소력으로 자꾸만 듣고 싶은 노래를 만들자. 이진의 목표는 언제나 쉬운 법이 없었다.
그를 위해 기존 가사를 약간씩 개사해 지금까지 이진의 행보를 관통하는 단어들로, 그리고 이진을 연상시키는 문장들로 가득 채워 넣었다. 또한 느릿한 발라드풍 편곡을 통해 섬세한 감정선과 수준 높은 기교를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네 유일한 선택지, 내 손을 잡아 줄래.”
그렇게 해서 완성된 곡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수많은 관객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들을 잔뜩 여럿 만나 본 멘토단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정 하나 없이 라이브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을 아직 데뷔도 못한 아이돌 지망생 무대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들은 무대 직전에 틀어진 영상을 통해 이진이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영상 속 이진은 평온한 얼굴로 키보드 건반을 두드리고, 마이크에 대고 휘파람을 불어 보다 헛기침을 하는 등 썩 긴장감 없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일주일 전 공개되었던 사전 투표 영상에서도 화려한 댄스 퍼포먼스를 준비한 참가자들에 비해 심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 높이 날아가지, 너와 함께라면.”
가사처럼 이진의 목소리는 훨훨 날아가는 듯 가볍고 자유롭게 들렸다. 스크린은 매 순간마다 감격을 금치 못하는 멘토단의 표정을 비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힘 있는 진성과 부드러운 가성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테크닉, 악기를 연주하듯 청명한 음색과 정확한 음정, 도무지 한계가 보이지 않는 성량까지. 이진은 참 많은 강점을 지닌 보컬리스트였다.
“난 너의 유일한 선택.”
하지만 단연 첫 번째로 꼽을 만한 강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장르 소화력이었다. 소화하지 못할 장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목소리를 변주하는 데 능했다. 댄스면 댄스, 발라드면 발라드, 록이면 록. 각 장르마다 찰떡같이 어울리는 목소리를 흉낼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누군가는 이진의 이런 특징을 개성이 약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가이드 보컬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가수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한 곡에서 분위기에 따라 여러 가지 목소리를 연기해 낸다는 건 관객에게 몇 배는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나를 알겠니. 내 이름을 불러 보겠니?”
드디어 하이라이트 파트가 돌아오고, 이진은 아낌없이 지금껏 모아 온 힘을 쏟아부었다. 서정적이던 멜로디가 일순간 희망차게 변했다. 그를 지켜보던 이들은 허공에 멈춰 선 롤러코스터가 수직으로 낙하할 때처럼 짜릿한 오싹함을 느꼈다.
많은 사람이 이진과 함께 비명을 질렀고, 그가 선사한 음악에 흠뻑 취해 말을 잊었다.
“너를 기다린 나를, 너를 꿈꿔온 나를, 이제는 알아볼 수 있겠니.”
한 교수는 이진의 노래를 한 사람의 다각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고 평했다. 흘러넘치는 감수성을 지녔음이 장점이고, 그 감수성 때문에 오히려 가볍게 듣기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단점이라 했다. 그래서 이진은 감정을 조절하고 억누르는 연습을 했다.
보다 완벽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다듬은 감정 조절이 오늘 제대로 그 빛을 발했다. 이 자리에 선 누구든 바람처럼 가벼웠다가 대지처럼 단단해지고, 새털처럼 부드러웠다가 송곳처럼 날카로워지는 목소리를 바로 눈앞에서 듣고 소름이 돋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관객을 압도하는 능력. 이진은 라이브에 특화된 보컬이었다.
“나만을 골라 봐. 기다린 순간이 왔어.”
리허설 때는 준비해 온 응원 구호도 외치고 종종 뜻하지 않게 비명도 지르던 팬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진의 시간을 방해하지 못했다. 간혹 터져 나오는 감탄만이 웅성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네 유일한 선택지, 내 손을 잡아 줄래.”
이진이 관객석을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뻗자 그제야 꽁꽁 얼었던 빙하가 깨진 듯이 막혀 있던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멘토들은 이진의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첫 오디션 당시 엉뚱한 노래를 들고 나와서 웃음을 주었던 청년과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너만을 위한 한사람.”
마지막 소절을 부른 이진은 카메라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카메라 너머 시청자들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은 스크린에 커다랗게 담겨 이진의 팬들이 크게 열광했다.
무대가 끝나고 곧바로 멘토단의 평가가 이어졌다. 멘토들은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애써 갈무리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이진은 그들의 평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환희로 저릿저릿한 손끝이 결과를 말해 줬다.
‘이번 클립 제목은 반년 전 일반인 클래스, 윈올 유이진 레전드 무대 다시 보기다.’
생방송 무대를 내보내고 있는 제작진들은 벌써부터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이 예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