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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64화 (164/173)

164화

미열이나 하늘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남들의 눈에는 다소 이상해 보일 광경이긴 했다. 아무리 사이가 좋더라도 우승을 노리는 라이벌 입장이다. 공연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승현의 무대를 도와주는 건 과한 행동이었다. 하물며 두 사람은 ‘대외적’으로는 썩 친한 사이도 아니니 동기를 이해하기 힘들만도 했다.

다들 내심 이유가 궁금했는지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이진에게 꽂혔다. 여기서 이진은 무난한 대답을 내놓아도 됐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이유는 많았고 제법 괜찮은 미담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굳이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말만 듣고, 좋은 생각만 했으면 해서요.”

피디는 이진의 대답에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지었다.

“선승현 씨를 그렇게 아껴요?”

“네, 착한 애니까요.”

팔불출 같은 대답에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이진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보인 진심이었지만, 덧붙이는 말 없이 이진도 그들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확인 차 여쭤볼게요. 우승하면 뭐든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거 맞죠?”

“맞아요. 멤버, 소속사, 계약 기간, 그룹명, 데뷔곡 등등 여러 가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죠. 조건을 물어보는 걸 보니 이제 와서 좀 욕심이 좀 생겼나 봐요?”

피디가 놀리듯 능글맞은 어조로 답했다. 아닌 척 몰래 카메라를 방해한 과거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진은 곤경에 빠져서 자신을 찾아왔던 승현을 생각하니 다시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러나 태연한 표정을 가장한 채 ‘아…….’ 하고 말을 끌었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우승을 노리고 있었는데요.”

“진짜요? 요새 하는 걸 보면 아닌 것 같던데.”

“하하, 정말이에요. 그냥 피디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을 뿐이었어요.”

이진은 벙한 얼굴이 된 피디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회의실에서 나왔다. 제작진 한 명이 따라 나와 여건이 되는 한 최대한 이진의 설명대로 무대를 꾸며 보겠다고 말했다.

“꼭 잘 좀 부탁드릴게요. 승현이가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주고 싶어요.”

“어휴, 걱정 마세요. 이 정도는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제작진에게 신신당부하며 확답을 받아 낸 이진은 곧바로 대기실로 발을 옮겼다. 생방송 시작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든 승현과 호흡을 맞춰야 했다.

***

“Winner takes all! 기나긴 여정의 끝, 마지막 무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어두운 무대 위로 한줄기 빛이 떨어지며 드디어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걸어 나온 사람은 예상외로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그는 바로 윈올의 트레이드마크, 바로 내레이션을 담당하는 성우였다. 때로는 사전 녹음으로 때로는 카메라 뒤에서 마이크를 잡았지만, 오늘만큼은 정장을 빼어 입고 조명 아래에 섰다.

“오늘 이곳에서 전 세계를 비출 별 하나가 새로이 떠오릅니다.”

그가 오른손을 활짝 펼치자 옆 무대에서 푸른빛 조명이 뿜어져 나오며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틀어졌다. 푸르스름한 조명이 웅장함을 분위기를 조성했다. 밝아진 무대 위로 일렬로 나열한 참가자들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났다.

“꺄아아아!”

날카로운 함성이 무대가 떠나가라 쏟아졌다. 그에 화답하듯 팟, 하고 환한 빛이 천장에서 내려 참가자들의 얼굴을 비췄다. 빛줄기는 무대를 자유로이 오가며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카메라가 하늘을 날듯이 움직이며 긴장한 그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담아냈다.

“자, 그럼. Let's start the show!”

우렁차게 공연의 서막을 알린 성우가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사라지고, 조명 색이 알록달록하게 바뀌었다. 긴장감을 조성하던 낮고 묵직한 음악도 순식간에 발랄해졌다. 통통 튀는 비트와 함께 단체 무대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마네킹처럼 서 있던 참가자들은 노래가 나오자마자 짝다리를 짚으며 껄렁한 자세로 하품을 하거나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관절을 이리저리 풀어 대는 시늉을 하던 참가자들이 저벅저벅 걸어 제자리를 찾아갔다.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대형이 완성되었다.

21명이 모두 모여 만든 거대한 삼각형. 전 라운드 1위인 선승현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Our summer is just beginning. Why can't we meet?”

승현은 코앞으로 다가온 카메라를 향해 튕기듯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랩을 시작했다. ‘우리의 여름은 이제 시작인데 왜 만날 수 없는지.’ 학생이 같은 반 친구에게 투정을 부리는 어조였다.

“From now on, I'll call you every day.”

그는 손가락을 들고 관객석을 왼쪽부터 차례로 가리키며 선언하듯 가사를 내뱉은 뒤 무언가를 움켜쥔 듯한 손 모양을 만들어 귓가에 가져갔다.

“So if you don't hate the sunlight. Come and see me!”

매일매일 전화할거니까 나와서 나랑 놀자. 순수한듯 집요한 애정이 느껴지는 가사였다. 승현은 노래와 어울리는 미소를 지은 뒤 뒤를 돌아 대형 속으로 사라졌다. 승현의 다음으로 센터를 차지한 사람은 찬우였다.

“어느새 익숙해진 너와의 만남. 이렇게 보내기엔 한 달은 길어. 빨리 개학했으면 좋겠어.”

아쉽게도 승현은 이 소절을 끝으로 무대를 내려갔다. 본격적으로 시작될 댄스 파트를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대 옆면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절뚝이며 계단을 내려오는 승현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수영도 하고, 수박도 먹고, 숙제도 해야지.”

“너와 함께 보낸다면 한 달도 짧아. 매일 방학이면 좋겠어.”

승현의 빈자리는 포지션이 같아 이미 안무를 숙지하고 있는 찬우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의 표정이나 큼직한 안무는 다소 새초롬한 기색이었던 승현과 달리 당장 산책을 나가자고 조르는 대형견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옆으로 소형견 같은 하늘이 청량미를 뽐내며 나란히 중앙에 섰다가 동시에 양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형을 반으로 갈랐다.

“여름 태양 아래의 너는 눈부셔, 살짝 그을려도 좋을 만큼.”

갈라진 대형 사이에서 이진이 유유히 걸어 나오자 관객석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와 공연장을 뒤덮었다. 이진은 카메라를 향해 눈웃음을 짓고는 다음 소절을 이어 갔다.

“이번 여름도 너와 함께 바다로 떠날 거야. 푸른 파도 소리 들으면서 영원을 맹세하자?”

이진의 시원한 고음이 그대로 코러스로 연결됐다.

“오늘부터 매일 전화할게. 싫지 않음 나랑 놀러가자.”

“반짝이는 해변 조개껍질, 불가사리, 옆에 발자국을?”

참가자 모두가 입을 모아 합창했다. 다 같이 교가를 부르듯 한데 엉킨 목소리는 뛰어난 솔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다음은 다시 찬우가 앞에 나와 친구와 함께 먹고 싶은 여름 음식을 잔뜩 늘어놓는 랩을 했다.

가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자 마지막에는 관객들도 한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리허설 때 노래를 먼저 들었던 이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진은 애드리브를 넣어야 해서 함께 노래를 부르지는 못했지만, 온몸에 전해지는 즐거운 기운에 흠뻑 취해 무대 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름이 이제 시작인데 만나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이진이 마지막 소절을 부르고, 승현이 없는 오프닝 무대가 끝났다. 관객들은 이번에도 열렬한 환호로 좋은 무대에 대한 보답을 했다. 참가자들이 엔딩 자세로 몇 초간 멈춰 있자 잠시 후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곧바로 옆 무대에 빛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무대 위 계단에서 홍서가 손을 흔들며 걸어 내려왔다. 그의 등장에 공연장이 다시 소란해졌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의 특별 사회를 맡게 된 홍서입니다.”

홍서는 혼자서도 능숙하게 멘트를 치며 진행을 이어 갔다. 그사이 빠른 걸음으로 무대를 내려간 참가자들은 곧바로 의상을 갈아입고 개인 무대 준비에 들어갔다. 대기실로 돌아가자 승현이 이미 무대 준비를 끝낸 뒤였다.

이진은 쉴 틈이 없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승현의 곁에 앉아 핸드폰으로 MR을 틀어 호흡을 맞췄다. 채일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뚱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개인 무대를 하지 못하는 참가자들은 멘토석 아래에 앉아 적당히 무대에 호응하거나 질문에 답을 해야 했기에 그는 머지않아 스태프에게 불려 나갔다.

“발 아프지는 않아? 아까 절뚝대던데. 진통제 더 달라고 할까?”

“아니에요. 형이야말로 무대 준비 안 해도 돼요? 저보다 앞 순서잖아요.”

“괜찮아. 흠흠, 난 완벽하니까.”

승현이 미안해하는 기색이길래 이진은 괜히 센 척을 했다. 익숙하지 않은 허세를 부리고 나니 뺨이 화끈거렸지만, 큭큭 소리까지 내며 웃는 승현의 얼굴을 보니 부끄러움을 감내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저기 형 나와요.”

두 뺨이 달아오른 이진을 보고 한바탕 웃어 대던 승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벽면을 가리켰다. 대기실 벽 한쪽에는 TV가 매달려 있어 실시간으로 방송 모니터링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큰 화면으로 방송에 나오지 않은 일주일간의 일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쫙 펼친 이진의 모습이 잡혔다. 이미지 게임으로 포지션을 정하는 장면이었다.

이진은 화면에서 고개를 돌리고 승현을 툭툭 쳤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이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승현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승자는 그룹에 대해서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네, 그랬죠.”

“그럼 방송국이랑 계약할 때도 조건에 대한 협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방송국이랑요?”

승현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글쎄요. 자세한 건 참가할 때 사인했던 동의서인지 계약서인지를 한번 읽어 봐야 알겠지만….”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방송국이랑 완전히 돌아설 작정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강경책을 둘 만큼 제작진이, 특히 메인 피디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걸 알릴 수 있으면 돼.”

제작진이 승현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몰래 카메라를 기획했을 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생각이다.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기는 싫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이진은 틈틈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어떻게 알려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오늘 리허설 무대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한 가지 방법이 뇌리를 스쳤다.

“이미 제작진은 현장 관리 부실로 여러 차례 부상자를 낸 적이 있어. 연예 뉴스도 탔었고. 관리 부실 문제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상태인데, 상습적으로 참가자들을 입맛대로 휘두르려고 했다는 게 밝혀지면 반발이 제법 심할 거야.”

“그렇기는 하죠. 팬덤에서 들고 일어날 테니까요. 그런데 제작진이 욕먹는 걸 신경이나 쓸까요?”

“피디는 몰라도 방송국에서는 신경을 쓰겠지. 오늘 방송이 끝나자마자 후속 예능 프로그램으로 돈 벌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텐데, 내가 방송국 계약 조건을 거절하고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할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형이 협상을 통해 얻어 내고 싶은 게 뭔데요?”

승현은 이진의 주장을 쉽게 납득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진이 주위를 둘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선례.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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