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이유라면 차고도 넘치게 많았다. 인상이 닮은 사람끼리 한 그룹이라 불편했던 첫 만남에 이어 호감도를 대폭 깎아 먹었던 성대모사 사건. 그 뒤로도 2라운드 연속 한 팀에 있으면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멘탈이 약해 부상당한 이진의 케어를 필요로 했다.
이진의 순위를 역전했을 때는 어땠는가. 상대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기쁨에 젖어 대뜸 포옹을 했다. 또 본심이야 어쨌든 이후에도 사소하게 눈치 없는 언행을 일삼으며 이진의 신경 줄을 갉아 먹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왜 나만 밀어내냐니. 이런 이기적인 말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진은 우진을 밀어내지 않고 객관적으로 대하려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아직 미숙할 수 있는 나이니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힌 적은 없으니까. 이 정도쯤은 연장자로서 참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현을 걸고넘어진다면 얘기가 달랐다. 어떻게 그 입으로 자신이 승현보다 낫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넌 이런 순간에도 선승현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네 생각만 하고 있잖아.”
“아니야, 나는……!”
“선승현은 적어도 널 진심으로 걱정하고, 어떻게든 원하는 무대를 할 수 있도록 도왔을 거야. 그게 달라.”
이진은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두 걸음 멀리 선 우진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우진아, 하나만 묻자. 너, 나랑 같이 데뷔하고 싶기는 해?”
나직한 물음에 충격을 받은 듯 우진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눈빛 또한 양옆으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난 네가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조연 같은 게 아니야. 네가 무대를 잘했다고 해서 널 칭찬해 주고 기특해할 의무가 없어. 오히려 견제해야 할 경쟁자지. 그런데 너는 나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네 편이라 착각하는 것 같아.”
“아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어?”
우진과 승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났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승현은 이진과 함께 잘 지낼 방법을 고민하고 관계를 조율하려 노력했다.
과정이 모두 옳았다거나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이진을 무찔러야 할 라이벌이나 뛰어넘어야 할 멘토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다. 승현이 그리는 미래에는 이진이 존재했고, 이진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우진이 그리는 미래에 이진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아마 목표를 다 이룬 후에는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지 아무 생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진에게 인정받고, 친밀한 사이가 되고, 함께 데뷔를 하면…… 그 뒤는?
“내 마음은 네 성장에 대한 보상이 아니야.”
이진은 우진에게 퀘스트를 내려 주거나 보상을 지급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공략 방법을 제대로 탐색하지도 않은 그에게 마음을 열어 줄 이유는 없다.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쐐기를 박자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한참 쏟아 내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는데 화낸 뒤의 불쾌함이 꿉꿉하게 따라왔다.
‘큰일 났다.’
생방송 한 시간 전에 참가자 멘탈을 손수 짓밟아 주고 말았다. 충격받은 우진이 무대를 못 하겠다고 엉엉 울면서 도망가도 할 말이 없었다. 이걸 달래, 말아. 이진은 속으로 고민하며 끄응, 괴로운 소리를 삼켰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돼?”
그러나 의외로, 우진은 울거나 도망치거나 혹은 둘을 동시에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되레 고개를 들어 이진을 똑바로 마주 봤다.
“형이랑 데뷔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얼마 안 남았지만 내가 고칠게. 미안해.”
목소리는 떨렸고 눈도 붉게 충혈되었지만, 이진은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아봤다. 조금 더 매정하게 굴자면 그런 것쯤은 스스로 고민하라고 일갈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진은 노력하려는 이에게 그리 냉정하게 굴 사람이 못 되었다.
주위의 도움 없이 홀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게 도리 아니던가. 게다가 비록 이진이 욱하는 마음에 같이 데뷔하고 싶은 게 맞냐 묻기는 했지만, 이미 그는 7위 근처에는 어렵지 않게 진입할 수 있는 인기를 보유했다. 어쨌든 잘 지내는 게 상책이었다.
“네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봐. 내가 아니라 네 팬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 또 나랑 한 그룹으로 데뷔했을 때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뭐라도 길이 보이겠지.”
“응, 알았어…….”
우진은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은 메이크업이 지워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어깨를 어색하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승현에게는 혼자 가 볼 테니 감정을 추스르라 말했다. 눈두덩에 열이 올라 붉어진 게 느껴졌는지 부끄러운 얼굴로 눈가를 매만지던 우진은 이진의 말에 수긍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정말, 하나도 없어.’
잠시 고개를 들고 짧은 생각에 잠겼다. 이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며 다가와 실망하고 떠나가던 사람들. 문득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쓸데없는 상념에 잠길 시간이 없었기에 이진은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대기실로 돌아가 채일의 말을 전하자 의외로 백미열이 엄청나게 분개했다.
“은혜도 모르는 자식! 무대 서게 해 주겠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어야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다고, 그자식이 이렇게 배신할 줄 알았으면 서포터 죽어도 말렸지!”
“그럼 무대는 안 하기로 결정된 거야?”
열을 내는 미열의 옆에서 하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늘은 내심 승현이 계속 무대를 하길 원하던 것 같았다. 이진도 슬쩍 희망을 담아 승현을 바라봤다. 그가 분해서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다친 몸으로 혼자 무대에 올라서 주특기도 아닌 종목으로 승부를 보는 게 몹시 부담되는 일이긴 할 테지만, 이진은 그래도 승현이 용기를 내길 바랐다.
“어쩔 수 없죠. 준비된 MR은 댄스 퍼포먼스 위주로 편곡한 거고 그것도 두 명이 부르게끔 다시 수정했으니까요.”
하지만 역시 현실적인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무대 장치나 조명 효과 등을 다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준비된 게 너무 적었고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태연하게 말하는 듯싶으면서도 승현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도 이렇게 무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감정을 누르려 애쓰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왔다.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내가 같이 무대를 할 수는 없을까?”
“형은 형 무대 준비하기도 바쁘잖아요. 그리고 한 명이 두 번이나 무대에 오르는 걸 괜찮다고 할 리가 없죠.”
확실히 형평성 측면에서 어긋나기는 했다. 그러나 납득하는 한편 이진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무책임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만약 내가 내 무대를 포기한다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이건 팬들이 보내 준 사랑에 대한 배신이자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노력한 과거의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짓이었다. 잠깐이나마 이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을 상실한다니 이진의 인생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진의 뇌리로 괜찮은 그림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무책임한 생각을 곧바로 떨쳐 낸 것을 칭찬하듯 뇌가 좋은 아이디어를 던져 준 것이다.
“내가 유이진인 걸 모르면 괜찮지 않을까?”
“무슨 소리예요?”
이진은 승현에게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미열과 하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작진의 허락만 받을 수 있다면 현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승현은 회의적이었다. 이진은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위험이 많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우선 무대 연출이 너무 실험적이고 생방송에는 썩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진의 아이디어대로 무대를 꾸미긴 위해선 승현과 이진의 합이 잘 맞아야 했다. 미리 연습을 통해 호흡을 맞춰 본 것도 아니니만큼 순전히 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브 경험이 많았더라면 몰라도 무대 위에서 서로를 기민하게 감지하는 건 기계처럼 안무와 동선을 외우는 아이돌다운 방식이 아니었기에 딱히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진과 승현 둘 모두 연습생 생활을 거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승현아, 할 수 있어. 위험하더라도 하는 게 나아.”
그래도 이진은 희망적인 말을 건넸다. 다 잘 될 거라고, 내가 다 괜찮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런 말로 승현을 격려하고 절망 속에서 일으켜 주고 싶었다.
승현 같은 사람에겐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행동 하나를 보여 주는 게 나았다. 이진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인 승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이진의 손 안에서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자, 응?”
“형…….”
“날 믿는다면 포기하지 마.”
이진이 진실한 눈빛으로 호소하자 승현은 곤란한 신음을 내다가 결국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승현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럼 지금 피디님한테 허락받고 올게.”
“형, 그냥 같이 가요.”
“그래, 이진아. 나도 같이 갈게.”
“아냐, 내가 빨리 가서 데려오든가 할게.”
시간이 더 지체되기 전에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이진은 빠르게 말하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하면서 바삐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긴장과 초조, 그리고 조바심이 팔다리를 쥐고 마구 흔들었다.
혼자가 되자 승현의 부상 소식을 접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던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이 이진의 머리와 심장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칼로 저미는 듯한 아픔이었다. 왜 이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 한가득 벌어지는 걸까. 하늘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내리지 않는다는데, 그는 이제는 버티는 것조차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진은 고개를 흔들어 어두운 생각들을 털어 냈다.
‘내가 미쳤지, 정말.’
승현이 서포터를 지명했을 때, 이진은 그를 비판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멍청한 행동이다, 발목을 잡힐 것이다.’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제는 이진이 그 멍청한 행동에 합류한 것만이 달랐다.
복도를 오가던 스태프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이진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진은 그들에게 물어 가며 메인 PD가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회의실을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연출 팀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피디님,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어두운 걸 보니 고의로 승현을 다치게 만든 건 아닌 듯싶었다. 이진은 발언권을 얻고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말 중간에 은근슬쩍 ‘멀쩡한 참가자를 부주의로 다치게 해 놓고 이정도 보상도 안 해 주는 건 아니겠죠?’라는 뉘앙스를 흘려 넣기도 했다.
다행히 회의장에 모인 인원들은 그가 낸 의견을 괜찮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고조된 감정이 기분 좋은 심장 고동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인 PD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좋은데 말이야, 유이진 씨는 참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요. 이대로 놔두면 이진 씨 우승은 따 놓은 당상 아닌가? 참가자들은 무대에 오른 사람이 유이진인 것도 모를 텐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어요?”
……정곡을 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