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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62화 (162/173)

162화

이번 사고는 명백히 제작진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의 실수로 인해 시청자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1위 후보의 무대가 불발된다. 솔직히 며칠 전 이진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 이게 정말 실수가 맞는 건지 의심마저 들었다.

한 가지 확신하는 건, 승현이 무대에 서지 않는다면 제작진은 어떤 식으로든 사고를 축소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거라는 것이다.

당장 참가자들에게도 승현의 부상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생방송과 다른 참가자들 무대가 급하다는 이유로 승현의 순서를 얼렁뚱땅 넘긴 뒤, 방송이 끝나고 홈페이지에 공지 하나 달랑 올려 나 몰라라 회피하는 미래가 눈에 선했다.

‘그러면 모두가 선승현에게 해명을 요구하겠지.’

카메라 뒤 실질적 힘을 가진 이들이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면 화살은 스포트라이트 아래, 그중에서도 가장 힘없는 아이돌에게 돌아간다. 왜 무대에 서지 못했냐고 직접적인 질문을 듣는다면 방송국과 척을 질 수 없는 그들은 ‘제가 부족해서 부상 투혼을 보여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고 겸손한 자세로 사과할 수밖에 없다.

“걸을 수는 있어?”

“절뚝이긴 하지만.”

조용한 물음에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허설을 하며 느껴지던 무대의 높이는 대략 2m에서 3m사이로 결코 낮지는 않았다. 운이 나빴더라면 그대로 응급실에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은 높이. 부상이 이 정도에서 그친 건 천운이었다.

‘천운이라면 잡아야지.’

이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생각했다. 괜한 오해와 누명을 쓰느니 어떻게 해서든 무대에 오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가량, 생방송 시작까지는 이제 한 시간 남짓. 조금 무리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최선을 다할 수 없으면 차선이라도 택해야 한다. 완벽한 무대를 보여 줄 수 없다면 무대를 향한 열망이라도 보여야 한다.

제작진이 무슨 짓을 벌일까 봐 걱정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대로 포기해 버리면 분명 평생토록 미련이 남을 것이다. 손에 쥐어진 기회를 흘려보낸 적이 있는 이진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한 상황에서 그에게 같은 고통을 경험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하자, 무대.”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부상자를 앞에 두고 위로는 못할망정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이었다.

“이진아, 얘가 안 그렇게 보여도 지금 굉장히 움직이기 힘든 상태야.”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해?”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미열이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렸지만, 이진은 승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러서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지. 앉아서 노래라도 불러. 임채일은 다친 곳 없다면서. 드디어 서포터로서 쓸모가 생겼네.”

“야, 유이진. 상식적으로 그게…….”

신랄한 말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미열이 정색을 하며 일어나 앞을 막아섰다. 주의를 주듯 이름을 불렀지만, 이진은 완강했다.

“선승현, 너도 이렇게 끝내기 싫잖아!”

격양된 외침에 미열이 덥석 이진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너 이거 선 넘는 거야.”

“환자 취급하면서 아무것도 하면 안 될 분위기 만드는 건 괜찮고?”

미열을 노려보는 이진의 눈빛이 매서웠다. 승현에게 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마치 부모처럼 대답을 가로채는 게 짜증스러웠다. 누가 그에게 선승현을 대변할 권리를 주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진의 속마음을 모르는 미열은 답답하다는 듯 이를 꽉 물었다.

“생방송이야, 이진아. 잘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못했다고 편집으로 잘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오늘 리허설만 몇 번을 했는데. 오늘 무대가 어떤 자린지 알면서 왜 그래. 즉석으로 맨몸에 마이크 들고 올라가서 노래 부르고 그러는 곳 아니잖아.”

“무대를 통째로 새로 짜는 것도 아니고, 춤만 안 추겠다는데 못 올릴 이유가 어디 있어? 정당하게 무대에 오를 자격을 받아 냈으면 끝까지 책임져야지.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포기하는 게 말이 돼?”

“너 정말……!”

“잠깐! 둘이 싸우지 말고 승현이 형 의견부터 들어 보자.”

결국 안절부절못하던 하늘이 끼어들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승현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그저 미열과 이진의 대치를 무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으음.”

두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판결을 기다리듯 내려다보자 승현은 피곤한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다치지 않은 팔을 들어 뒷목을 주물렀다. 잔뜩 열이 오른 이진이나 미열과는 대비되게 차분한 기색이었다. 마치 남의 일을 논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우선 임채일 의사부터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 정리가 끝났는지 승현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포기하기 싫은 것도 맞고, 생방송에서 꼴사나운 모습 보이느니 몸 사리고 싶은 것도 맞아요. 그러니까 우선 임채일한테 물어보고 결정하기로 해요.”

승현이 결론을 내렸다. 사실 임채일에게 선택을 떠넘긴 것과 다름없었으나 당장 격앙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에는 적절했다.

“야, 선승현. 아직 병원 가서 제대로 된 검사도 못 받았어. 무슨 자신감으로 이래.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아도 노래 부를 때 온몸의 근육을 얼마나 많이 쓰는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중에 병원 갔는데 아무 문제 없다고 하면 그땐 또 후회할 거 아니야.”

그럼에도 미열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따지고 들었지만, 승현은 흔들리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채일은 욕심이 많으니 분명 무대에 오르겠다고 할 것이다. 망설이더라도 어떻게든 설득해 내면 된다. 이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욕적으로 말했다.

“내가 채일이한테 말해 볼게.”

“네. 걔는 아마 멘토단 대기실 옆, 빈 방에 있을 거예요. 저랑 같이 있으면 편히 쉬지 못할 것 같아 방을 따로 빼 줬거든요.”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승현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한 방에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하긴 할 것이다. 이진은 왠지 이 배려가 제작진이 아닌 승현의 머릿속에서 나온 의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나설 때 우진이 뒤를 따라왔다. 왜 따라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분위기가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방을 나서자마자 미열과 승현이 다시 말다툼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은 애써 귀를 막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채일아.”

“아, 깜짝이야!”

승현이 알려 준 방으로 들어가자 어깨에 아이스 팩을 얹은 채 핸드폰을 하고 있는 채일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액정을 가리다가 들어온 사람이 이진임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꼴을 보니 제작진에 대한 욕이라도 적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진은 채일의 맞은편에 앉아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뭐? 강행하자고?”

그러나 기대했던 바와 달리 채일은 완전히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거센 반응을 보였다.

“못 할 것도 없잖아.”

“절대 안 돼. 난 완벽하지 않은 무대는 절대로 안 해.”

그는 실력이 좋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지만, 그만큼 실패한 경험이 적었다. 욕심만큼이나 완벽하지 않은 무대에 대한 거부감도 몹시 심했다. 강한 자존심을 기반으로 이만큼 실력을 쌓아 온 것이겠지만 지금의 이진에겐 갖잖게 느껴질 뿐이었다.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만 할 수는 없잖아. 데뷔한 뒤에는 특히나.”

“전 국민한테 생방송으로 개쪽 당하는 거랑 몇백 명 모인 행사장에서 비실대는 거랑은 다르지!”

그동안 고생한 게 아깝지 않느냐, 네 팬들을 생각해라, 이번만 눈 딱 감고 해라. 몇 차례 이어진 설득에도 채일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진이야말로 채일의 인생철학에 감화되어 버렸다.

“영원히 박제될 게 뻔한 곳에서 인생에 오점을 남길 생각은 죽어도 없어. 남의 서포터로 무대를 서는 것 자체가 이미 굴욕적이라고. 더는 말하지 마.”

한번 똥고집으로 살 거면 저렇게 뚝심 있는 똥고집이 되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답답함에 아드득, 이가 갈렸다. 결국 이진은 자신의 어중간함에 환멸을 내며 방을 나왔다. 승현에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친 애한테 괜한 바람을 불어넣은 건가 미안하기도 했다.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네.’

이진이 한숨을 푹푹 쉬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할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우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형, 너무 애쓰지 마. 승현이 형은 어차피 인기 많으니까 떨어질 일은 없잖아. 괜히 무리했다가 부상이 오래 가는 것보다 지금은 잠깐 쉬는 게 나을 거야.”

“알아. 하지만 데뷔가 전부는 아니니까.”

“안타깝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그냥 이만 포기해.”

그때 어슴푸레 기시감이 느껴졌다. 온화한 말투 속에 가시가 숨은 듯한 위화감. 이진이 자리에 멈춰 서서 우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재차 말했다.

“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는 문제잖아. 응?”

위로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진을 단념시키고 승현이 무대에 오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체 왜? 승현이 경쟁자라서, 마지막 방송이 망쳐질까 봐, 아니면 진심으로 승현의 부상을 걱정해서 등등. 여러 가설이 떠올랐지만, 모두 오답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자 우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조금씩 흐려졌다.

“형…….”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승현이 문제를 내가 왜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그야 선승현의 친구인 백미열이나 정하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니까.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진의 모습이 유난으로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이우진이야말로 그의 행동에 대해 첨언할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이진이 지적하는 부분을 이해했는지, 우진은 시선을 피하고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 댔다.

“이우진.”

으름장을 놓듯 이름을 부르자 우진이 웅얼대며 입을 열었다.

“……왜 선승현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줘?”

“뭐?”

“형 다쳤을 때 걔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분한 목소리로 짓씹듯 내뱉는 말이 그저 당황스러웠다. 그 안에 실린 감정이 뜬금없었다. 이진은 황당함에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바라봤다.

이 정도로 승현을 싫어하고 있었나? 대체 왜, 언제부터? 의문이 피어올랐으나 답을 구하기 힘들었다. 기억을 샅샅이 뒤져 봐도 우진은 승현에게 고마워하면 고마워했지 적대심을 비친 적도 비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의문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형이 왜 걔를 위해 그렇게까지 나서야 하는데? 걔가 뭐라고. 내가 무대하다 다쳤을 때는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지 않았잖아.”

“야, 이우진.”

“왜 선승현만 걱정해? 걔는 형한테 재수 없는 말만 잔뜩 하고 형이 도와주려 해도 고마운 줄도 모르는데 왜 걔한테만 잘해 줘?”

어이가 없었다. 1라운드면 아직 우진의 성이 김 씨인지 이 씨인지도 헷갈리던 시절이다. 그런 오래된 일을 당당히 끄집어내고, 감히 승현을 콕 짚어 비교하다니. 그는 자신의 주장이 굉장히 합당하다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이진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억지로만 들렸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승현이랑 같아?’

이진이 뒷말을 삼켰다. 선승현과 이우진에겐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말을 하기가 꺼려졌다. 예민한 화제.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그 미묘한 간격을 직설적으로 언급해도 괜찮은가 하는 망설임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이진이 삼킨 말이 무엇인지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울컥한 그가 쏟아 내듯이 외쳤다.

“선승현이랑 내가 뭐가 달라? 나도 형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여러 번 다가갔어. 형이 싫어할 것 같은 일은 절대로 안 했고, 혹시 내 실력이 부족해서 싫어하는 걸까 싶어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 나 그래서 순위도 올랐잖아. 내가 훨씬 형을 좋아하고 또 존경할 텐데…….”

우진은 숨이 차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뱉는 숨결마다 울음이 섞여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나만 밀어내?”

기어이 우진의 입에서 최악의 말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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