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59화 (159/173)

159화

상황이 적당히 종료되었을 무렵, 제작진은 개인 인터뷰를 핑계로 참가자 전원을 차례로 불러내었다. 다른 이들은 대체로 오늘과 같은 돌발적인 행동은 삼가 달라는 경고가 끝이었지만, 이진은 인터뷰실에 들어가자마자 노골적으로 한소리를 들었다.

“이진 씨, 승현 씨랑 친해서 편들어 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래도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지.”

“네?”

그들에게 찍힐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이지만, 막상 돌아온 반응은 얼떨떨했다. 기획한 일을 방해받은 것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마치 이진이 승현 대신 제작진 편을 들었어야 했다는 어조였다.

“왜 승현 씨를 콕 집어서 명단을 줬겠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 이진 씨를 생각해서 그런 건데, 몰라주니 서운해요.”

그제야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의문이 해결되었다. 더불어 머리를 망치로 세게 때린 듯한 충격도 찾아왔다.

제작진이 승현과 이진 사이의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냈을 때, 이진은 자신이 승현의 라이벌 역할로 발탁되었다 생각했다. 그의 성장담을, 나아가 방송의 클라이맥스를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줄 대립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의 손에 쓰러져야 할 적.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이 예비한 역할 자체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진과 승현의 역할은 반대가 되었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지목한 이는 승현이 아니라 이진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재수 없는 모습을 보여 줬구나.’

게으르고 무기력하지만 1라운드 개인 평가에서 만점을 받아 낸 주인공. 한번 이미지가 박히고 나면 수면 아래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밝혀진다 하더라도 뒷이야기는 쉬이 잊히고 만다.

특히나 승현은 저번 학부모 면담 때 출연한 어머니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기 때문에 상류층 출신 도련님이란 이미지가 더해졌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로 누군가의 인생을 함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운과 재능을 겸비한 부잣집 도련님을 실력과 성실함으로 물리치는 가난한 고아. 확실히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긴 하겠네.’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청자 입장이었다면 이진이라도 열광했을 스토리다. 승현의 팬들이 가만있지는 않겠지만, 제작진에게 팬덤 간의 불화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건 오직 화제성 한 가지뿐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눈앞의 스태프는 ‘우리가 널 밀어 준다는데 이제 어쩔 거야?’ 딱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한마디에 태도를 바꿀 것이 분명하다는 거만한 믿음이 선명히 전해졌다. 이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례한 말로 이진을 캐스팅 하려고 했던 남자. 이진을 상품처럼 뜯어보고 평가하고 수준을 매기는 울렁이는 시선.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이진은 입꼬리를 올려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제 힘으로 우승할 수 있어요.”

“허, 참.”

이진이 전혀 태도를 굽히지 않자 그는 골치 아프단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방을 떠났다. 이진은 스태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가에 남은 미소를 지웠다. 우발적인 반항심으로 속을 긁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 어떤 공작을 벌이더라도 ‘이진을 위해’라는 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허튼 짓은 그만 두라는 경고였다.

잠시 후 다른 스태프가 들어와 개인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진의 차가운 표정을 보고 놀란 듯한 그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냐며, 기분 상한 게 있다면 자기가 대신 사과할 테니 화를 풀라고 달랬다. 이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온화한 표정을 끌어냈다.

어쨌든 제작진이 야심차게 준비한 몰래 카메라는 흐지부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이득이다. 이진과 승현의 상황극은 제법 요란한 사건이었지만, 방송에는 승현이 동료들을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는 정도로만 편집되어 나갔다. 승현의 편지 또한 그런 것이 존재했다는 정도만 등장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얼버무려졌다.

‘정말 제작진을 적으로 돌려도 되는 걸까.’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면 그런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사실 적으로 돌렸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저 가벼운 해프닝이 한번 있었을 뿐이지만, 사소한 일에 앙심을 품은 감독이나 피디가 사사로운 복수를 일삼았다는 일화가 이 바닥에 워낙 파다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혼자 날고 기어도 이진은 결국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일반인이다. 쓰고 버리는 일 정도야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승현이 한순간에 이진을 위한 발판으로 밀려났듯 이진도 언제든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승현이한테도 불이익이 돌아가면 어떡하지.’

마음속에 작은 불안이 도사렸다. 그리고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 속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지금부터 투표 결과를 공개합니다.”

무대 영상이 홈페이지에 올라간 지 닷새가 되었다. 투표가 마감되자마자 곧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번 촬영은 대형 포털에서 새로 출시한 스트리밍 서비스의 홍보 차원에서 짧게나마 인터넷 생방송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이미 사전 투표 상위 10명은 발표되었고, 지금은 참가자 간의 투표 결과 발표 차례였다. 참가자들은 투표함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놓인 의자에 앉아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동료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함 속에 집어넣은 참이었다.

생방송 탓인지 아니면 시청자의 선택뿐만이 아닌 동료들 손에 무대에 오를지 말지가 결정되기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공기에 흐르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여기서 잠시, 스페셜 룰을 공개합니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참가자를 위한 특별 구제 시스템!”

성우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까진 이렇게 기습하듯 새로운 규칙이 적용된 적이 없었기에 다들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스페셜 룰?”

“구제 시스템이 뭐야.”

곧 스크린에 간단한 이미지가 떠오르고 설명이 이어졌다.

“사전 투표 1위부터 차례로 자신의 무대를 보조할 ‘서포터’를 선발할 수 있습니다. 서포터는 사전 투표 상위 10명, 참가자 투표 상위 3명, 그리고 추첨 선발 1명을 제외. 즉, 무대에 오르지 못할 7명 중에서 고르게 됩니다. 또한 서포터로 선발된 참가자는 무대 점수의 70%에 해당하는 점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진이 서포터를 선택하고 무대 점수를 100점을 받는다면 서포터는 70점을 얻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아슬아슬하게 무대에 오른 참가자보다 서포터로 오른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아 갈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보자면 도움도 안 되고, 특히 상위권 멤버들에게 큰 부담이 가중되는 시스템이었다.

본 무대까지 이틀이 남았다. 이미 거의 완벽하게 완성된 무대에 굳이 한명을 끼워 넣는다 한들 기존보다 좋은 무대가 될 거란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런 위험 부담을 끌어안아 가면서까지 경쟁자에게 점수를 떠먹여 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서포터 선택을 사전 투표 1위부터 하게 만들어 놓으니 상위권 참가자들은 은연중에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참가자 투표 결과 공개합니다.”

사전 투표 상위 10명에 이름을 올린 선승현, 정하늘, 유이진, 한찬우, 강재규, 허동규, 제이슨 리, 박희영, 이우진, 강지흔. 이들을 제외한 참가자 투표에서 김태원, 백미열, 이진연이 순위권에 들었다.

“자,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입니다.”

남은 기회를 받을 마지막 1명의 참가자는 승현이 직접 추첨했다. 승현은 추첨함에 손을 넣고 휘젓다가 네모반듯하게 접힌 쪽지 하나를 꺼내어 읽었다.

“리웨이 참가자.”

희비가 갈렸다.

이것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할 사람의 명단이 추려졌다. 두주형, 김보원, 나봄, 최강희, 장현기, 민서호, 임채일. 그들은 하나같이 모자람 없는 실력을 갖췄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 그들을 선택하게 할 매력이 약할 뿐이었다.

이진은 씁쓸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스페셜 룰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다음 촬영을 이어 가기 전에 잠시 생방송 반응을 체크하는 시간을 가졌다. 말이 반응 체크지 오랜 시간 방송을 지켜봐 주고 있는 팬들을 향한 서비스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와, 지금 엄청 새벽인데 다들 누구 보려고 깨어 계시는 거예요?”

활발한 참가자 몇이 카메라 앞에 달려가 시청자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자 카메라 옆에 임시로 설치된 모니터에 실시간 반응이 뿅뿅 떠올랐다.

♥ 유이진

♥ 이진아 어디갔어ㅠㅠㅠㅠㅠㅠ

♥ 내새끼 정수리도 안보여;

♥ 차누야내가진짜미안한데얼굴좀만치워바ㅋㅋ

♥ 하늘아ㅠㅠ

♥ 선승현은 불러도 안오겠지?

♥ 미열아 친구들 좀 데려와라

“유이진, 면회다!”

미열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진을 불렀다. 어떻게 특별 구제 시스템에서 발을 뺄 수 있을지, 만약 분위기상 어렵게 된다면 누굴 골라야 할지 고민하던 이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고 터벅터벅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즐거운 새벽 보내고 계신가요?”

“유이진 내숭.”

줄곧 뚱한 표정이던 이진이 카메라 앞에 서자마자 눈을 휘며 웃자 옆에 서 있던 찬우가 구시렁거렸다. 이진이 등장하자마자 모니터에 띄워진 채팅창이 요동쳤다. 도저히 글을 읽고 답을 할 수 있을만한 속도가 아니었다.

“아, 이진이만 좋아하고! 너무하다, 너무해.”

채팅 읽기를 포기한 찬우가 삐진 척 투덜거리자 그제야 흥분해서 난리 법석이던 채팅창이 원래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 ㅋㅋ미안ㅠㅠ 이진이는 레어템이라ㅠ

♥ 선승현은 불러도 안오겠지???

♥ 얘드라 울 이슨이랑도 좀 노라조ㅠㅠ

제대로 된 진행은 없었지만 참가자들은 눈치껏 돌아가며 분량 조절을 했다.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화장실에 다녀온 승현도 느지막이 카메라에 얼굴을 비쳤다. 미열에게 떠밀려 화면 안에 실루엣이 잡히자마자 이번엔 채팅방이 얼어 버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 ;;;아니진짜볼수잇을줄은몰랏어ㅠㅠ;;;

♥ 얼ㄹ굴 실화야ㅑ? 손 떨ㄹ려서 채팅 못치겠어ㅓ

다들 승현의 등장을 황홀해했다. 이진의 팬들은 이진과 내적 친밀감이 높아 보이던데 승현의 팬들은 신기하게도 반대인 모양이었다. 승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나 부른 거 아닌가 본데?’ 하고 말하자 이번에는 그를 붙잡는 채팅이 쏟아졌다.

♥ 승현아 서포터 뽑아줄 거지?

♥ 입으로만 노력=보상 주장하는건 아니지?

♥ 실천해줘 제발ㅠㅠ

이틈을 타 예민한 질문을 하는 시청자도 있었다. 못 본 척 넘겨 버리면 그만일 텐데, 승현은 그 질문에마저 성실하게 답했다.

“솔직히 서포터를 뽑는 건 많이 무리수 같기는 한데, 우선 저는 뽑을게요. 대신 다른 애들이 뽑지 않더라도 뭐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예고도 없이 무대에 갑자기 한 명 추가하라고 하면 곤란하긴 해요. 그러니 다들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승현이 뺨을 긁적이며 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누굴 뽑을 거냐는 질문이 몇십 개나 올라왔다. 그러나 승현은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손을 살살 흔든 뒤 다른 사람에게 카메라를 양보했다.

모든 참가자가 카메라 앞에서 눈인사를 마치자 다시 다음 촬영이 이어졌다. 서포터 선택 시간. 지난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승현에게 가장 먼저 마이크가 돌아갔다.

‘과연 누구를 뽑을까.’

방금 전 팬들 앞에서 서포터를 뽑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기에 많은 이들의 기대 섞인 시선이 쏠렸다. 승현은 속마음을 읽기 어려운 무표정으로 서포터 후보들을 훑어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