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 시각,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던 제작진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승현의 행동을 제지해야 한다.’
‘그냥 뒀다가 쓸 만한 장면이 없으면 그냥 통 편집 해 버리면 된다.’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그중 가장 목소리가 큰 것은 이 두 개였다. 그리고 현장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메인 피디의 생각은 단연 후자였다.
쪽지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그렇고, 요란하게 돌아다니며 자진해 분란의 씨앗을 만들어 주는 게 뭔가 속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어지간히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쪽지를 건네받은 승현이 얼마나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만족스러운 숏이 잡힌 덕에 여러 차례 돌려 보기까지 했다.
‘거슬리게 의욕이 넘치긴 하지만 아직은 어리지. 제대로 찍어 누르지 않으면 이후로도 말을 안 들을 타입이야. 아직 내 손바닥 안에 있을 때 한번 기를 꺾어 둬야 해.’
시키는 일만 얌전히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승현이 어떻게 자멸해 갈지 지켜보기로 했다.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큰 위협이 되어 돌아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채였다.
“종이? 무슨 종인데?”
“뭐가 적혀 있어서?”
참가자들은 생각보다 싱거운 물건에 맥이 빠지는 한편, 대체 무엇이 적혀 있길래 승현이 이렇게까지 흥분해서 찾아다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찬우는 선승현에게 이런 귀여운 면이 있었냐는 듯 웃기까지 했다.
“하하, 우리 선승현이 일기라도 잃어버렸어?”
찬우가 농담을 건넸지만, 승현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미열은 고집스럽게 구는 승현을 보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알았어. 같이 찾아 주면 되잖아.”
“고맙지만, 찾더라도 절대 열어 보면 안 돼.”
“야, 인마.”
“야! 그럼 그게 네가 찾던 건지 그냥 종이 쪼가리인지 어떻게 알아! 똑바로 말 안 해?”
미열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 이진이 끼어들어 호통을 쳤다. 잔뜩 찡그린 얼굴도 그렇고 이진이 정말 화나 보였기에 한발 물러서서 방관하던 지흔이나 재규, 우진과 하늘이 그를 말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Shit! 누가 자꾸 소리를 질러!”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굳게 닫혀 있던 연습실 문이 벌컥 열리고 그 안에서 제이슨이 뛰쳐나왔다. 원조 버럭이가 출몰하자 모여 있던 참가자들이 일제히 절망했다. 그리고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상황을 수습하고자 다 같이 종이를 찾아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절대 열어 보면…….”
“주둥이, 주둥이!”
승현은 끝까지 열어 보지 말라고 주장했으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미열에게 입이 막혀 구석으로 끌려갔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사라지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들 어찌 해야 하나 눈치만 슬금슬금 볼 때, 아직 화가 다 가시지 않은 듯 인상을 팍 쓴 이진이 참가자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다들 속으로는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각자 탐색할 구역을 정해 주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등장한 제이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지시에 따랐다.
“아니 근데, 그냥 종이를 어떻게 찾냐?”
“방금 계단에서 쪽지 같은 거 주웠는데 혹시 이건가?”
의외로 쪽지는 쉽게 발견되었다. 누가 봐도 그냥 쓰레기는 아닌 듯 쪽지 모양으로 곱게 접힌 종이를 발견한 것이다.
“여기도 하나 있는데!”
“이거 아닌가?”
게다가 쪽지는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발견되었다. 여러 뭉치의 쪽지를 한데 모아 놓자 이것의 존재가 더 의문스러워졌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걸 왜 그리 요란을 떨었는지 승현을 향한 원망도 조금 쌓였다.
그때, 내내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쓰고 있던 이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어 보자.”
“엥, 그래도 될까?”
“열어 보고 아주 중요한 게 아니면 더 찾아 봐야 할 거 아니야. 강지흔 네 것부터 열어 봐.”
지흔은 원래도 반항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화난 이진에게 거스를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놀란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나흘 안에 당신 손을 떠나야…….]
쪽지 안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행운의 편지였다. 평소 미신과 오컬트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지흔은 내용물을 보자마자 발끈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일곱 명을 어디서 찾아!”
“다음 쪽지 열어 보자.”
이진은 분노해서 볼펜과 종이를 찾는 지흔을 내버려 두고 다음 사람에게 손짓했다. 허동규가 어이없는 얼굴로 손에 들고 있는 쪽지를 열어 봤다.
[Death Note: 정하늘, 강재규, 허동규, 박희영, 두주형, 나봄, 민서호]
이름을 적히면 죽는다는 노트. 그곳에 이름이 떡하니 오른 동규가 “엥?” 소리를 내며 모인 사람들에게 종이를 보여 주었다.
“뭐야. 승현이 이 자식 대형 출신들한테 원한이라도 있던 건가?”
찬우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이진은 침묵을 지키며 휘휘 손짓해 다음 쪽지를 열어 보도록 시켰다. 처음에는 승현이 그토록 열어 보지 말라고 애원하던 쪽지를 몰래 보는 걸 내심 꺼려하던 참가자들도 이쯤 되자 또 어떤 황당한 내용이 나올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다음 쪽지는 찬우가 들고 있었는데, 앞선 두 장보다는 확연히 두꺼웠다.
“어, 이게 뭐지?”
쪽지를 다 펼치자 A4용지 두 장 분량으로 빼곡히 적힌 글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행운의 편지 아니야?”
“그럴 수도.”
앞서 당했던 지흔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찬우는 가볍게 답하고는 편지를 읽어 보기 시작했다. 다들 재치 있는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찬우의 얼굴은 점차 황당함이 아닌 당황으로 물들어 갔다.
[우리는 경쟁자로 마주했지만 지금은 동료 그 이상의 사이가 되었다.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 이 편지는 나의 경쟁자이자 동료이자 친구인 너희들에게 시간이 지나면 더는 진실하게 들리지 못할 진심을 전하기 위해 적는다.]
앞선 두 장의 쪽지와 달리 승현의 글이 너무나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야, 이거……. 우리가 읽어도 되는 거야? 진짜 일기 같은데.”
찬우가 당황한 얼굴로 이진에게 종이를 건넸다. 다들 궁금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종이를 좇았다. 종이를 받아 든 이진은 무심한 얼굴로 찬찬히 종이를 훑어보았다.
“괜찮아. 편지라고 하잖아. 내가 읽어 볼게.”
그리고 승현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처음 촬영장에 들어서며 나는 몹시 불안했다. 원래도 인간관계가 익숙하지 못했고, 사람을 만나지 않은지 오래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꿈을 좇는다 말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무엇을 신경 써야 하는지, 어디까지 방관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 미안해.”
이진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답지 않게 섬세한 일을 꾸민다고 구시렁댔고,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방송 분량을 또 독차지 하려는 속셈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승현이 단순히 방송 분량 때문에 꾸민 일이 아님을 증명했다.
“나는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고 타협했다. 팀원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더 나은 방향을 함께 모색하고, 무대에서 좋은 결과를 내고. 그걸로 내 역할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며 이진은 승현을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이 상황극에 어울려 주되 제작진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도록.’
‘어떻게?’
‘도를 넘은 경쟁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짧은 시간, 모든 것을 기획하고 준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진이 도운 것이라곤 쪽지를 이곳저곳에 흩뿌려 놓고 승현과 연극하듯 호흡을 맞춘 게 전부였다.
‘시청자들에게 불편하게 들리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걸로 제작진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만들 수 있다면, 저 혼자만 욕먹고 끝나는 게 오히려 싸게 먹히는 거죠.’
손수 편지를 적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 연극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편지를 다 읽은 후에 동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것에서 눈을 돌렸지만, 가장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은 촬영장 밖에서 벌어지는 ‘세력 다툼’이다.”
“형, 이건 너무 예민…한….”
“나는 내 곁의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일반인 출신 그룹’으로, 내 친구는 ‘대형 기획사 출신’ 그룹으로, 그리고 어디에도 끼지 못한 이들은 ‘어중이떠중이 그룹’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승현은 그래도 다들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기에 이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말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소리 내어 글을 읽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촉박한 시간 동안 꾹꾹 눌러 적은 승현의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이진의 임무였다.
“이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세력 다툼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방송 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친분 관계를 넘어선 추측과 다툼은 차후 그룹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게 된다던 우승자마저 꼭두각시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꿈을 응원해 주시는 시청자분들과 나의 동료들이 이를 원치 않으리라 믿는다.”
이진은 이 대목에서 편지에서 눈을 떼고 참가자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다들 심란한 표정이었다. 승현의 말대로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애써 외면하던 문제였다. 데뷔권에 아슬아슬하게 들지 못하는 참가자는 오히려 이런 세력 다툼을 환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진은 침을 꼴깍 삼키고 다음 문장을 읽었다.
“……나는 하나의 명단을 받았다. 나와 함께 데뷔할 이들의 명단이라며 제작진이 손수 목록을 추려 준 것이다.”
고요하던 복도가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투표 결과의 진실성 여부는 늘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매 라운드마다 공개된 투표 내용이 포괄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세한 지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등수가 조작된 것일지 모른다. 모두가 그런 불안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제작진이 직접 명단을 추렸다는 폭로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음속 불안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다행히 누군가의 지혜로 이게 방송의 재미를 위한 연출임을 깨닫긴 했지만, 이 장면이 방송에 나가는 순간 일반인 출신 그룹과 대형 기획사 출신 그룹의 양분화가 더 심해지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래서 데스 노트…….”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적어도 우리 모두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았으면 한다. 시청자분들이 우리를 보며 즐거움과 기쁨 외에 다른 감정은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적어도 이 방송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진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눈물이 많은 하늘은 벌써 훌쩍이며 울고 있었고,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찬우조차도 장난기가 쏙 빠져 진지하게 경청 중이었다. 이진은 중간중간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읽는 속도를 조절했다. 그리고 기나긴 문장들의 끝이 다가왔다.
“다들 내게 행운이 따른다고 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이 운을 편지를 받은 모두에게 나눠 주고 싶다. 이 방송을 시작으로 모두에게 행운이 따르길.”
마지막 문장을 읽고 편지를 반 접자 미리 말이라도 맞춰 놓은 듯 모두가 일제히 박수를 쳤다. 글을 못 쓰는 줄로만 알았더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어떻게 눌러 담아야 할지 몰랐던 거였구나. 이진은 박수갈채 속에서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에 딱 맞춰 승현이 미열과 함께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승현은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있었는데, 가장 가까운 제과점까지 급하게 뛰어갔다 왔는지 뺨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소란 피워서 미안해. 이벤트라고 생각해 주라.”
승현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미열이 끌고 온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초를 꽂았다.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고 했지. 오늘은 우리 모두가 승자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고 하자.”
“와, 선승현 멘트 봐. 얼마나 준비한 거야? 내가 데스 노트 보고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초에 불을 붙인 승현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자 동규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늘이 그런 동규를 발로 한 대 차고는 앞으로 걸어와 승현을 꼭 끌어안았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달래듯 끌어안자 작은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이어서 한바탕 웃음이 피어났다.
이진은 한발자국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누구도 불편하거나 어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퉁명스러운 제이슨도 케이크를 집어먹으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고, 독불장군에 그간 사귄 친구가 죄다 떨어져 홀로 남은 임채일도 서슴없이 주변과 어울리고 있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촛불처럼 은은하지만 밝은 빛을 내뿜는 그들의 유대에 제작진이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