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윈올은 처음부터 참가자들 간의 갈등을 방송의 중요한 셀링 포인트로 삼았다. 약육강식 시스템뿐이 아니었다. 서로 처한 입장이 다른 참가자끼리 부딪힐 만한 상황을 조장해 그들의 다툼을 아주 자극적으로 다뤘다.
이진이 윈올에 참가하지 않았을 당시, 선승현은 존재 자체가 갈등의 온상이었다. 그때의 승현은 지금보다도 말을 듣기 좋게 포장하는 법을 몰랐고, 투박한 말은 여러 차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반성도 처음 한두 번이지, 나름대로 신경 써서 보낸 호의에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나중에는 승현도 가만히 참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운이 좋아서, 얼굴 빨로, 편애를 받아서, 간사하게 대형 출신들과만 어울리는, 그러나 매 라운드 부동의 1위를 지켜 주는 막강한 팬덤을 가진 선승현. 그는 제작진에게 있어 어떤 불리한 상황도 돌파시켜 주는 조커 카드였다.
“아마 이건 가짜일 거야.”
“가짜요?”
이진은 쪽지를 원래 모양대로 접어서 다시 승현에게 돌려줬다.
“응. 몰래 카메라 같은 거겠지. 이런 공작까지 써서 얘네를 데뷔시켜 봤자 제작진한테 무슨 이득이 있겠어. 네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두고 보려고 하는 걸 거야.”
“그냥 절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라고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걸 빌미로 상위권 멤버들한테 내분이 생기는 걸 기대했겠지. 그리고 여기 나랑 찬우 이름이 없잖아. 사이가 나쁘면 나쁜 대로, 친하면 친한 대로 설마 네가 나한테 상담하러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을 거야.”
일부러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은 승현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어렵도록 만들도록 위함이었으리라. 처음 보는 스태프였다고 했으니 본격적으로 속이기 위해 전문 배우를 고용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제작진은 이진과 승현의 싸움을 대대적으로 내보내 그간 사이좋은 이미지를 쌓아 왔던 두 멤버를 라이벌 관계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정작 둘이 카메라 앞에서는 티격대격대고, 촬영장 밖에서는 붙어 다니니 원하던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이런 일을 꾸민 것이고. 휴우, 이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냥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네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제작진도 악의적으로 편집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승현이 타깃이 되었지만, 이건 단순히 승현만을 노린 계획이 아니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참가자와 올리지 못한 참가자, 제작진의 부름을 받은 상위권 참가자, 그리고 손을 놓고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참가자. 5라운드의 생존자 모두를 겨냥한 것이다.
모두를 농락하기 위해 이런 수를 쓰다니. 이진은 알면 알수록 방송에 대한 정이 떨어졌다.
“네 다음엔 나한테 차례가 넘어온다고 했지? 그럼 나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야. 만약 찬우에게 넘어간다 해도 마찬가지고.”
그나마 승현이 제작진의 거짓말에 곧바로 넘어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선 어떤 행동을 취해도 이미지를 깎아먹을 뿐이다. 이 시기에 논란거리가 된다면 최종 투표에도 큰 타격을 준다. 이진은 승현이 화제성을 불러올 희생양이 되기 전에 벌어질 일을 미리 차단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왜 이진이 아닌 승현을 희생양 삼으려 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런 제안을 할 상대로는 꾸준히 1위 자리를 지켜 온 유력한 우승 후보인 승현보다 이번에 간신히 2위에 올라온 데다 라이벌이기까지 한 이진이 더 적합하지 않은가.
“형, 그보다는.”
이진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조용히 수긍하는 것 같던 승현이 돌연 눈에서 조용한 불꽃을 튀기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제작진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차라리 이걸 이용해 보는 건 어때요?”
“뭐?”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이용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이대로 덮어 두기엔 너무 억울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방송 초반부터 상위권 참가자는 꾸준히 하위권 참가자의 열등감을 도발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덕분에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눈 적 없는 이들에게 괜한 공분을 사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던 이름 모를 동료, 찬우와 미열의 싸움, 그리고 밤을 꼴딱 새워 가면서까지 모든 참가자의 이름을 외우던 승현. 그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어젯밤 일처럼 생생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제일 중요한 건 최후의 승자, 개인이지 결코 팀이 아니에요.’
이진은 언젠가 스태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제작진은 최후의 승자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개인보다 팀, 팀보다 개인. 순 말장난일 뿐이다. 둘 모두를 중요히 여기지 않는 그룹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시청자들한테 바로 고발하는 건요?”
“상황극이었다고 하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야. 그리고 자칫 잘못했다간 명단에 있는 참가자들한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갈 거고.”
승현은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애초에 참가자들은 제작진이 짜놓은 판 위에 서있다. 판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경고를 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얌전히 순응하기에는 제작진의 사고방식이 너무도 잘못되었다. 이진으로서도 기회가 된다면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행위를 더는 묵인하지 않겠다고 알리고 싶었다. 우승 후보라고 해서 동료들의 원망을 받고 무분별한 화풀이의 대상이 될 이유는 없다. 최후의 승자가 될 가망이 없다고 해서 존중받지 못할 이유도 없다.
처음 기획 의도가 어떻든 시청자들은 우승자 단 한 명만을 위해 방송을 보는 게 아니다. 자신이 응원하는 참가자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기를, 불공평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숨겨진 원석이 고난을 이겨 내어 하늘 높이 떠오르는 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열 띤 응원을 받는 이상, 그들은 순간의 유희를 위한 잔인함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승현이 자신의 계획을 조용히 설명했다. 과연 제작진이 이대로 말려들어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
“쪽지를 잃어버렸어요.”
“네? 어떤 쪽지요?”
“최종 데뷔 명단이요. 제가 마지막 방송에서 불러야 할 이름이라고 적어 주신 게 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주머니에 넣어 놨었거든요.”
말단 스태프에게 말을 흘리는 것으로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방송국 정식 직원이 아니라 파견 업체를 통해 고용된 인력이었다. 촬영분엔 큰 간섭을 하지 않고 현장의 허드렛일을 돕는 역할을 했다. 피디가 유출과 스포일러에 민감한 만큼 이들에게까지 대대적으로 지시를 내리진 않았으리란 추측이 있었다.
“최, 최종 데뷔 명단이요? 투표가 아직 안 끝났는데…….”
추측대로 말단 스태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진과 승현의 또래이니 한창 윈올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시청자이기도 할 것이다. 시청자가 아닐지라도 윈올 촬영 현장에서 일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가만 두지는 않았을 테니 상대적으로 시청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가능성이 높았다.
“모르세요? 그럼 메인 피디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잠시만요, 제가 연락을…….”
“승현 씨, 이리 와 봐요!”
급하게 상황을 전달받은 고참 제작진 한 명이 복도 끝에서 승현을 불렀다. 승현은 말단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향했다. 남겨진 말단 스태프의 머릿속에서는 비밀 유지 계약과 충격적인 정보를 소문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쪽지를 잃어버렸다고요?”
“네. 주머니에 넣어 놨는데 돌아다니다가 빠졌는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허, 참….”
제작진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는가 싶더니 심각한 얼굴로 승현을 다그쳤다.
“승현 씨 때문에 방송 내용이 유출되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러게…… 왜 쪽지에 적어서 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겁니까?”
“아뇨. 죄송합니다.”
물론 제작진은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명단을 말로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종이에 적어 물증을 만들어 둔 거다. 물론, 쪽지를 잃어버리는 상황 말고, 기껏해야 다른 동료에게 발각당하는 상황 정도를 생각했다.
어쨌든 이 일이 커져서 참가자들 간 골이 깊어지면 제작진에겐 이득이었다. 시청률도 높아지고, 자연스레 대형 기획사 출신 참가자들에 대한 반감도 키워서 은근슬쩍 데뷔 후보로서 힘을 약하게 만들 수 있으니. 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괜히 승현에게 한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가 책임지고 찾아보겠습니다.”
“혹시 다른 참가자에게 들키면 무조건 잡아떼세요. 알겠습니까?”
“네.”
그 뒤로 승현은 시무룩한 얼굴로 건물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뒤져 댔다. 그것도 굉장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덜컹, 쿠당탕탕! 콰앙!
좀처럼 움직이는 일이 없는 선승현이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며 시끄럽게 굴자 흥미를 느낀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모았다.
“저 형은 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대?”
“뭐 잃어버렸다는데?”
“아까는 화분을 뒤집어엎던데.”
그때, 옹기종기 모여 있던 참가자들을 가르고 이진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진의 분노한 기색에 참가자들은 발을 주춤주춤 움직여 그를 향한 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선승현. 너 대체 뭐 하는데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너 때문에 연습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잖아.”
“잃어버린 게 있어서요. 급하게 찾아야 해요.”
“뭔데 그래. 그러게 평소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았어야지. 맨날 맹한 얼굴 하고 돌아다니니까 물건이나 잃어버리지. 다들 집중해야 하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대체 무슨 민폐야?”
이진이 날카롭게 말하자 신기한 눈빛으로 승현을 구경하던 주변 분위기가 차츰차츰 얼어 갔다. ‘둘이 화해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누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들끼리 은근한 눈짓이 오고 갔다.
그러나 썩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괜한 싸움에 말려드는 건 다들 사양이었다.
“야, 이진아. 왜 이렇게 화났어. 선승현, 너도 조용히 좀 하지.”
싸움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건 미열도 마찬가지였지만, 누군가 그의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중재를 하게 되어 버렸다.
“급하게 찾아야 할 게 있다고 했잖아. 백미열 넌 가만히 좀 있어. 연습실이 방음이 안 되는 게 제 탓이에요? 귀를 막고 계속 연습하든가. 다들 가만히 있는데 왜 또 형 혼자 유난이에요?”
“내가 유난이야? 내가? 네가 물건 하나 똑바로 간수 못 해서 피해 끼치는 건 생각 안 해? 뭘 잃어버렸길래 그렇게 급하게 찾아야 하는데. 막방까지 열흘 고작 남았는데, 연습 방해받는 이유나 좀 들어 보자.”
“야, 야. 흥분하지 말고, 싸울 거면 카메라 없는 곳에서…….”
“말하면 뭔지 알기나 해요? 그러는 형은 평생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산 줄 아나 봐요. 그러니까 사회성이 그 모양이지.”
“사회성? 선승현 네가 나한테 사회성을 논할 입장이냐!”
가운데에 낀 미열은 점점 격해지는 언사에 사색이 되어 두 사람을 떼어 놓았지만 이진도 승현도 미열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서로를 향해 험한 말을 늘어놓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찬우도 미열에게 합류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선승현아, 대체 뭘 잃어버렸는데 그래.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까 중요한 것 같은데 말해 봐. 이 형님이 같이 찾아 줄게.”
이진이 험한 욕설을 내뱉는 걸 거의 처음 본 찬우가 기겁하며 승현에게 애걸했다. 승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답답한 심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흥분에 겨워 커진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인데, 아주 중요한 게 적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