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특히 요즘 이진의 인생은 혼란스러운 사건의 연속이었다.
“선승현이 유이진 제대로 먹이네, 좋아요 361개. 유이진 화나서 고개도 못 든다, 좋아요 279개. 이진이가 안쓰러워요, 좋아요 194개.”
“그만 읽어…….”
촬영 대기 중 며칠 전 찍은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악의적 편집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나, 방송 콘셉트에 맞는 가공은 들어간 모양이다. 아니. 모두 매력적으로 나오도록 편집한다 했으니 적절한 날조가 들어가는 건 당연한가.
“하아.”
이진은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곧은 어깨는 축 쳐졌고 핸드폰을 보며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댓글을 읽는 미열을 제지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어젯밤에도 승현이 이진의 꿈속에 찾아왔다. 저번처럼 남사스러운 복장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나왔지만, 씩씩거리며 ‘한찬우 때문에 못한 일을 마저 하자’고 덤벼대는 바람에 아주 곤란했다.
‘막상 진짜 선승현은 나랑 눈도 못 마주치고 있지만.’
이진은 근처에서 하늘과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승현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같은 방을 쓰는 하늘은 이진이 스트레스 때문에 꿈자리가 사나운 것 같다 여겼고 그 오해는 자체는 아주 고마웠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잠꼬대로 승현의 이름이라도 부르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승현이 신난 것 같은데 왜 먹인다고 하지? 저거 다 좋아서 저러는 거예요. 좋아요 28개. 답글, 님 눈치 없으세요? 빨리 삭제하세요. 다들 모른 척해 주잖아요. 좋아요 104개.”
“미열아, 제발.”
“아! 미안, 미안. 진짜 재밌어서. 나는 이런 인터뷰 언제쯤 해 보냐.”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되는 댓글 읽기에 이진이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미열은 아쉬운 표정을 하며 군말 없이 핸드폰을 내려놨다.
“무대 준비는 잘 하고 있어?”
“아니, 머리 터져서 죽겠다. 편곡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안나.”
미열은 버스킹을 하던 무렵을 떠올리며 3라운드 곡을 어쿠스틱 풍으로 편곡 중이었다. 우선 MR을 만들어 놓고 기타 연주가 가능할 것 같으면 아예 라이브 연주로 해 볼 생각이라는데 아무래도 불안한 면이 많았다. 이진은 무심코 물었다.
“도와줄까?”
“뭐, 네가? 그럼 고맙지만…… 아냐, 아니다. 나도 실용 음악 전공인데 여기선 내 힘으로 해야지.”
3년간의 작곡가 경력은 의외로 여러 순간에 도움이 되었다. 매 라운드마다 적절한 편곡을 요구하는 만큼 이진은 그다지 친하지 않던 작곡, 편곡 실력 덕을 보고 있었다.
미열이 어깨를 으쓱이며 도움을 거절했음에도 이진은 틈을 봐서 한 번 더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열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에는 큰 생각을 하지 않고 입 밖으로 먼저 말이 튀어나가고 말았지만, 막상 말을 뱉고 생각하니 5라운드의 콘셉트가 ‘최고의 무대’인 만큼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졌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동료들을 늘 경쟁자로만 보아 왔던 이진이다. 승현은 이진이 그동안 어떤 마음을 원료로 삼아 이곳에 도달했는지는 중요치 않다고 했지만, 사실 무엇이 원료가 되었는지는 아주 중요한 차이였다.
과연, 이진 자신도 경쟁심이 아닌 협동심을 불태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잠시 뒤 오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에서는 오랜만에 등장한 멘토들에게 합동 무대 안무를 배우고, 포지션을 배정을 위한 게임을 진행했다.
합동 무대는 기본적으로 참가자 모두에게 솔로 파트가 한마디씩 돌아가고 코러스 파트는 메인 보컬과 리드 보컬이 가벼운 애드리브를 넣는 구성이었다. 센터 세 명과 메인 보컬, 리드 보컬이 주요 포지션으로 센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안무는 동일했다.
“다음, 첫 번째 센터로서 윈올의 얼굴 마담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멤버는?”
포지션 배정 게임은 바로 이미지 게임이었다. 이진이 속한 보컬조의 게임은 싱겁게 일찍 끝나 버린 바람에 다 함께 댄스조 쪽으로 구경을 하러 갔다. 그곳은 아직 열띤 게임이 한창이었다.
“3, 2, 1! 지목해 주세요!”
마침 가장 주목도가 높은 첫 번째 센터를 뽑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클로즈업 샷이 잡힐 예정이니 외모가 출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방금 전 철저히 실력 중심의 질문을 받았던 보컬조와는 새삼 다른 분위기였다.
사회자가 카운트다운을 하자 각자 눈치를 보던 멤버들이 검지를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표가 갈리는 일은 없었다. 멤버 전원이 선승현을 선택한 것이다.
“역시 선승현, 얼굴 하면 빠질수가 없지.”
“승현이 형 아무도 안 가리킨 거 봐. 분명 자기가 뽑힐 줄 알았어.”
구경꾼도 게임 참가자도 거의 만창 일치를 받은 승현을 놀리듯 웃었다. 승현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빨리 한 명을 고르라는 동료들의 재촉에 결국 자기 자신을 지목했다. 이진은 그의 용기에 감탄했다. 하기야 지금처럼 표가 확실히 몰린 판에서 다른 이를 선택하는 것도 기만이긴 했다.
“세 번째 센터가 제이슨 형, 두 번째 센터가 찬우 형이야.”
“조금만 더 일찍 오지. 세 번째 센터 때가 진짜 경쟁 치열하고 흥미진진했어. 하늘이랑 우진이한테 표가 갈려 가지고. 지금은 선승현이 혼자 독식 중이라 영 스릴이 없네.”
하늘과 찬우가 뒤늦게 찾아와 구경 중인 보컬조를 위해 상황을 설명했다.
“다음 질문입니다. 첫 번째 센터로서 시청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멤버는?”
찬우의 말대로 이번에도 십수 개의 손가락이 일제히 승현을 향했다. 인기투표 현장이 따로 없었다. 소신껏 다른 사람을 고르는 임채일 같은 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분위기상 승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느낌이었다. 형식적인 질문 두어 개가 더 나간 뒤에야 첫 번째 센터가 선정되었다.
그리하여 합동 무대에서는 선승현, 한찬우, 제이슨, 유이진, 강재규가 각각 센터와 메인 보컬, 리드 보컬을 맡게 되었다.
“자, 여러분. 솔로 무대 라이브 촬영이 머지않았습니다. 모두 정진해서 좋은 결과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촬영 종료와 함께 제작진이 참가자들을 독려했다. 승현처럼 무대 구성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은 참가자들은 준비 진행 속도가 빨랐지만, 미열같이 편곡부터 들어가는 참가자들은 시간이 아주 빠듯했다. 그건 바로 어제까지 촬영을 하고 온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솔로 무대 영상 사전 투표 자체는 무대의 퀄리티보다는 팬덤의 화력에 결과가 좌지우지 되겠지만, 부족한 영상을 올린다면 팬들도 화력 싸움에 참가할 의욕이 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최대한 기대에 보답할 만한 완성물을 뽑아내야 했다.
‘이제부터 무조건 무대 준비만 한다. 열흘간 선승현의 선자도 생각 안 할 거야.’
이진은 굳게 다짐하며 배정받은 개인 연습실에 들어가 무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미리 구상해 놓은 대로 키보드를 연주해 트랙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자 상상 속 음악이 현실에 구현되어 가기 시작했다. 얼추 트랙을 완성한 뒤에는 방송국에서 준비한 엔지니어에게 후반 작업을 부탁할 수 있었다.
제작진 측에서 준비한 기본 틀에 개성을 추가하는 정도였던 기존 무대와는 다르게 이번 솔로 무대는 가이드라인에 의지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만 했다. 그나마 연출가에게 상상 중인 무대의 이미지를 설명하면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해 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형, 바빠요?”
회의가 막 끝나갈 무렵, 승현이 이진의 연습실을 찾아왔다. 열흘간 선승현의 선 자도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오전 내내 눈도 안 마주치던 그가 자진해서 찾아온 터라 차마 쫓아낼 수도 없었다. 무대 연출 팀이 적당히 눈치를 보고 방 밖으로 빠져나가자 승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까처럼 수줍은 태도일 줄 알았는데, 승현은 답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앞에서 말을 거는 이진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구석에서 이쪽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전원을 꺼 버렸다.
“갑자기 왜 그래?”
이진이 당황해서 물었다. 승현은 이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심각성을 느낀 이진이 한 번 더 재촉하자 간신히 입을 열기는 했지만, 말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방금 제작진한테 불려갔다 왔어요. 그런데….”
언제나 차분하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이진이 성큼 다가가 승현의 표정을 살폈다. 웬만한 일로는 동요하지 않는 승현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표정에는 분명한 혼란함이 어려 있었다.
“제대로 말해 봐.”
“……저한테 이걸 줬어요.”
승현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서 건넸다. 1위 참가자를 갑자기 부른 제작진, 그들이 은밀히 건넨 쪽지. 이진은 쪽지를 받아 펼쳐 보기도 전에 그게 무엇인지 흐릿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형, 다른 애들한테는…….”
“알아.”
쪽지를 쥔 손이 차가웠다. 이진은 그 손을 감싸듯 포갠 뒤 온기가 돌아오길 잠시 기다렸다. 이진의 체온이 닿자 거칠었던 숨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잠시 뒤 승현이 충분히 진정된 것 같자 이진은 희게 질린 손끝에서 쪽지를 받아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그 안에는 참가자 일곱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종 명단이래요. 제가 마지막에 불러야 할 이름이니까…… 외워 두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했어?”
“어떻게 이걸 미리 정해 놓을 수가 있냐고 화를 냈는데, 다들 원래 그러는 건데 몰랐냐고 뻔뻔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어차피 제가 안 하면 이진이 형한테 차례가 넘어갈 뿐이니까 잘 생각하라고 했어요.”
이진은 눈썹을 찌푸리고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분히 숨을 골랐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승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지 알아내야만 했다.
이진의 매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승현은 눈치를 보며 이실직고했다.
“처음 보는 스태프가 갑자기 의자를 발로 차면서 소리를 질러서.”
“너한테?”
“네. 놀라서 우선 이걸 받아 오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의자를 발로 차면서 화를 내다니. 평범한 상식인이라면 부하 직원이나 자식에게도 하지 않을 짓거리였다. 더군다나 그런 감정적인 행동을 명실 공히 인기 순위 1위인 선승현에게 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무례함이란 단어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진은 쪽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쪽지 속에 적힌 이름은 하늘을 비롯한 대형 기획사 출신들이었다.
‘왜 굳이 얘네를 데뷔시키려는 거지? 얘네가 소속된 그룹의 미래가 어떨지는 안 보고도 훤히 예측 가능 할 텐데.’
제작진 측에서도 이권과 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일반인 출신 참가자들을 띄워 주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자신들의 행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린다니 말이 안 됐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했다.
“승현아, 혹시…….”
“전 최종 순위만 신경 썼어요.”
혹시 꿈에서 본 미래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 했으나 서두만 뗐을 뿐인데, 말뜻을 알아들은 승현이 잽싸게 말을 가로채 답했다.
승현이 최종 순위만 신경 썼다면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승현에게 이런 쪽지를 쥐어 줘야 했던 걸까. 정 조작을 해야 한다면 마지막 방송 직전에 일러 줘도 되는 걸 미리 알려 줘 봤자 달라질 일이라고는…….
‘갈등.’
번뜩, 이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제작진의 속셈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