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승현은 드디어 해명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방을 쓰는 찬우가 둘이 오붓이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준 덕에 누군가 엿들을 걱정도 없었다.
“자, 정리할게요. 저는 원래 두 곡 중에 뭘 선택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요. 1라운드 곡을 마지막 무대에서 하면 확실히 멋있겠지만, 제가 소화하긴 어려워 보였어요. 2라운드 곡은 원곡 느낌만 그대로 살려도 좋은 퍼포먼스를 만들 자신은 있었지만 임팩트가 부족했고요.”
승현은 이진을 제 침대에 앉히고, 구석에서 의자를 끌고 와 마주 앉은 뒤 말을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아무런 생각이 없었겠지만, 하필 이상한 꿈을 꾼 이후라 그런지 그의 침대에 앉는 것이 몹시 의식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진을 거기에 앉혀 둔 승현은 빠른 해명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진은 머릿속에 들어찬 못된 생각들을 탈탈 털어 냈다.
“솔직히 형이 ‘Choose one’을 노린다는 얘길 듣고 ‘Craving juice’로 마음을 굳힌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건 형을 봐주거나 배려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저 말고 형이 공연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다예요. 그냥 형이 이 노래를 다시 부르는 걸 보고 싶었어요.”
“둘이 뭐가 달라? 결국 나 때문에 바꾼 게 맞잖아.”
승현의 주장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진이 불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달라요! 임팩트만 쫓다간 실력에 밀려서 이도저도 아니게 될 거라고 형을 보고 깨달은 거예요.”
그러나 승현은 자신의 혐의를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이진에게는 이거나 저거나 같은 이야기로 들렸지만, 어쨌든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애초에 그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긴 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맞았다.
“알았어.”
이진이 떨떠름하게나마 오해를 인정하자 승현은 정말 안심한 듯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위로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옷자락을 잡아당겨 이진도 침대에 눕혀 버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승현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고는 검지를 들어 눈앞의 하얀 볼을 콕 찔렀다.
“형은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요.”
“승현아, 난 네가 최고의 결과를 냈으면 좋겠어. 나한테 지더라도 변명할 수 없게.”
“변명 안 해요. 저한테는 형이 늘 최고인데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한 승현이 이진의 볼을 가만가만 쓸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진을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방금 전 대화가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탓인지 찝찝한 감정이 남아 그를 괴롭게 했다.
이진은 이제는 귓가를 만지작대는 승현의 손을 치우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승현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형…….”
아무리 생각해도 승현은 그만큼 마지막 승부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진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이미 데뷔가 확정시 되었기에 절박하지 않은 걸까. 그러나 쟁쟁한 참가자들이 이를 갈고 마지막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승현이 절박함을 잃고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다면, 과연 지금처럼 그리고 과거처럼 꿋꿋이 1위를 지킬 수 있을까.
이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승현을 꺾고 1위를 거머쥐고 싶었다. 그의 등 뒤에는 한찬우나 정하늘이 아닌 선승현이 있어야 했다. 이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승현. 너, 방심하다간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승현은 이진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진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만족하면 안 돼. 데뷔조에 드는 게 끝이 아니잖아.”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말이었다. 승현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정곡을 찔린 듯 표정을 굳혔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지지 마. 절대로.”
이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수긍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생님에게 이유도 모르고 혼난 아이처럼 시무룩해 보였다. 방 안에 고요함이 흐르는 동안 몇 번 승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진은 그가 입을 뗄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형, 저는 늘 최선을 다했어요.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알아.”
마침내 승현이 말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 듯 보여도 매사에 열심히 임한다는 건 이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방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승부욕이 없어 보인다는 뜻이라면 맞을지도 몰라요.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내심 형 말대로 데뷔조에 든 것만으로 만족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담담히 자신의 태도를 인정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진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형, 모든 노력의 원동력이 꼭 투지이고 경쟁심일 필요는 없잖아요.”
승현은 침착한 어조로 제 생각을 전하고 이진을 설득했다.
“지기 싫은 마음에서 힘을 얻을 수도 있겠죠. 이기고 싶다는 의지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동기일 거예요. 하지만 지금 이 행복한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의 행복한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승현에게는 단순한 명제가 이진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진은 눈을 크게 뜨고 승현을 바라봤다.
‘그게 가능하다고?’
이진은 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자존심을 짓밟히지 않기 위해,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힘이 부칠 때면 분노를 불살랐고, 지칠 때면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신을 달랬다. 그래서 남들도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실제로 그의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학교 선배이자 그가 회귀 전 몸담고 있던 회사의 대표였던 재민 역시 그랬다.
독해져야 한다. 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정상을 쫓는 이들은 누구나 독기를 머금고 가슴에 칼을 품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것이 경쟁자를 향한 예의이자 미덕이라 여겼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형이 절 이긴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거예요.”
“그건, 네가 겪어 본 적 없어서 그래.”
“물론, 잠깐은 분할지도 몰라요. 내 연습이 부족했나 자책할 수도 있겠죠. 응원해 주신 팬분들한테도 미안할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제 생각과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해요.”
이진은 혼란스러웠다. 승현의 말이 비현실적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이 설득당하고 있었다. 허튼 소리라며 의심하고 부정하기보다도 그게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이 더욱 커져 갔다.
“결과가 어떻든 전 유이진을 보면 여전히 기분이 좋을 거고, 유이진이 노래하는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생각할 거예요. 아, 형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긴 하겠네요.”
승현은 이진과 함께할 머지않은 미래를 상상하기라도 하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나 이진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추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변하고 싶었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열등감 대신 존경심을, 질투 대신 관대함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부터 변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승현에게 충고를 하다니. 또다시 그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고 만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진이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있자 승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형이 어떤 마음을 원료로 삼아 여기까지 왔는지 저는 잘 몰라요. 제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것도, 형의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건 그래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잖아요.”
안락함에 취해 도태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쟁심을 불태우다 자멸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감정을 장작 삼아 열정을 태워 왔는지보다는 그래서 어떤 행동을 했으며 어떻게 나아왔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니 이진은 잘못되지 않았다. 승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한 잔소리를 하고 있었구나.’
고개를 푹 떨구고 웃은 이진이 사과했다. 승현의 행동 하나를 확대 해석 해 그가 나태해졌다고 착각하고, 건방지게 충고까지 건넸다. 오만했던 건 이진 자신이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렸나 보다.”
“말했잖아요, 형은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고.”
“정말 그런가 봐.”
“아니요. 오지랖을 부렸다는 게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뜻이에요.”
커다란 두 손이 이진의 어깨를 감쌌다. 따뜻한 온기, 그리고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자 승현이 코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진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곱게 접으며 웃어 왔다.
“서로 대화할 의지만 있으면 오해는 얼마든지 풀 수 있잖아요. 저한테 보낸 관심을 오지랖이라고 하지 말아요.”
얼굴이 너무 가까워 승현이 한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숨결이 뺨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이진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 담아 듣지 못했다. 다른 데 신경이 쏠려 도통 뇌에 입력이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꼴이었다.
이진이몸을 뒤로 물리기 위해 손을 등 뒤로 기대자 푹신한 매트리스 때문에 몸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맞다, 우리 지금 침대 위잖아.’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오감에서 전해지는 자극이 강렬해졌다.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것 같았다. 시야에 가득 채운 선승현의 얼굴, 귓가를 간질이듯 속삭이는 목소리, 달고도 묵직한 체취, 뺨에 닿는 숨결. 남은 하나는…….
“저는 형 말고 다른 사람한테 지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너무…….”
“승현아.”
이진이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었다. 승현은 반성 섞인 위로를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뒷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진은 말을 더 잇지 않고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챘다. 승현이 놀라 토끼 눈을 떴다.
“나 못 기다리겠어.”
“네?”
“진도를 천천히 나가? 웃기지 마. 이게 사귀는 게 아니면 뭐야?”
“형, 잠깐.”
“선승현. 넌 나랑 같은 침대에 앉아 있으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이진이 씨근덕대면서 말하자 한 박자 늦게 승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자식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었구나, 분한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생각 하나를 삼키면 다른 생각이 불쑥 비어져 나왔다.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얼굴을 그렇게 갖다 댔단 말이야?’
어쨌든 승현이 연애 경험이 없는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이진에게 멱살이 붙들린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뺨이나 붉히고 있었으니까.
“싫으면 말해.”
이진은 그대로 손에 힘을 줘 승현을 제 입술 앞으로 끌고 왔다. 한 번 해 봤으니 두 번은 어렵지도 않다. 이제 이대로 눈을 감고 입술을 포개기만 하면…….
“얘들아, 대화는 끝났냐? 나 이제 샤워하고 싶은데.”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은 펄쩍 뛰며 승현을 침대 위로 퍽 밀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전 그가 가져다 뒀던 의자에 허겁지겁 앉으며 바깥을 향해 외쳤다.
“어, 어! 드,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찬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무어라 잡담을 하며 옷가지와 수건을 챙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진이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꾹 물었다. 쿵, 쿵. 뒤늦게 심장이 요란스레 고동쳤다.
또 선을 넘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