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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51화 (151/173)

151화

꿈이란 무의식의 발현이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오늘따라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이진아, 무슨 일 있어? 아침부터 표정이 안 좋네.”

아침 식사를 받아 온 미열이 테이블에 합석하며 물었다. 이진은 아침으로 나온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노려보며 간밤의 꿈을 잊기 위해 노력 중이었는데, 그 표정이 몹시 험악해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꿈자리가 사나웠던 것 같더라.”

이진이 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옆자리에 앉은 하늘이 대신 답했다. 미열이 ‘흐응.’ 하고 흥미로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얼결에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된 나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미열에게 인사했다.

맞은편에서 어색한 조우를 하거나 말거나 이진은 여전히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다.

‘어떻게 고작 그거 살짝 닿은 걸 가지고 이런 꿈을 꿀 수가 있지?’

자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개꿈으로 치부하고 깡그리 잊어버리기에는 꿈속에 등장한 요소 하나하나가 너무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민소매 셔츠를 입은 선승현. 꿈속의 그는 현실보다 뻔뻔하고 파렴치했다. 민망한 차림으로 안마를 해 주겠다고 침대 위에 올라오지를 않나, 안마를 하다가 은근슬쩍 엄한 곳으로 손을 내리질 않나. 게다가 내려가는 손길을 막으려 했더니 힘으로 가볍게 제압해 버리기까지 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하늘이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가능하다면 지우개로 싹싹 지워 버리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환상들은 점점 자세해지면 자세해졌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대체 자신의 무의식에 어떤 것들이 도사리고 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출해 낸 것인지 이진은 두렵기까지 했다.

“승현이 못 깨우겠다. 완전 포기.”

그때 찬우가 식판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자리에 합류했다. 승현의 이름을 들으니 절로 어깨가 움찔거렸다. 괜히 제발이 저린 이진은 한참 노려보고만 있던 찌개를 허겁지겁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토닥토닥해 주면 깨던데, 해 보지 그랬어. 그래도 안 깨면 강제로 일으켜서 앉혀 봐.”

“하늘이 너한테는 가만히 있든? 선승현 그 자식, 이제 내가 건드리기만 해도 난리를 친다.”

“그랬어? 나한테는 그냥 억지로 깨우지 않아도 된다고만 하던데.”

하늘이 조언하자 미열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끼어들었다. 찬우는 승현이 까탈스럽다며 구시렁거리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새삼 미열과 찬우, 승현과 한방을 쓰던 때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고작 몇 개월 전인데 멀게 느껴지다니, 그만큼 이들과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일 터였다. 이진은 생소한 감상에 고개를 들어 올리다 미열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다들 이번 경연곡 뭐로 할지 정했어?”

“글쎄, 1라운드 곡이 제일 무난해서 다들 그거 할 것 같은데.”

“나는 실장님이 ‘퍼플 러브’ 하라고 하시긴 했는데, 바로 저번 라운드 곡이라 좀 질리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 중이야. 어차피 게임으로 정하게 되면 선택권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봄이는 뭐 하라고 했지?”

“몰라. 똑바로 안 들었어.”

찬우와 하늘, 그리고 봄이 차례로 답했다.

“그나마 덜 겹치려면 3라운드 곡을 하는 게 낫기는 하겠네.”

“결국 이번에도 결국 컨셉 싸움이지 뭐.”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제일 잘할 수 있는 걸로 준비하고 싶은데 게임 안 하고 자유롭게 선택시켜 주면 안 되나?”

“에휴. 해 줄 리가 있냐.”

달그락 달그락, 작은 한숨과 함께 대화가 끊기고 각자 식사하는 소리만이 들렸다. 늘 유쾌한 모습을 보여 주려 노력하는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5라운드, 마지막 무대가 주는 압박감은 그만큼 강했다.

‘그래. 나도 쓸데없는 생각에 힘 빼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진은 찌개에 들어 있는 마지막 고기를 건져 먹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에 아침도 먹지 않고 자고 있을 승현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아침 식사 후, 단체복으로 갈아입은 모두가 스튜디오에 집합했다. 한자리에 모인 21명의 참가자들은 각기 비장한 표정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이진도 그들 틈으로 걸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 집합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들어온 승현이 메인 카메라 앞으로 가서 슬레이트를 치고,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슈퍼스타 3종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솔로 무대 경연곡 우선 선택권이 걸린 단체 게임이 5라운드의 첫 촬영이다. 이번 게임의 이름은 ‘슈퍼스타 3종 경기’로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철인 3종 경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물론, 예능인만큼 100% 실력으로만 겨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이어지는 설명에 집중했다.

“종목은 노래와 춤, 그리고 운.”

첫 번째 종목인 ‘노래’에서는 본인의 4라운드 순위와 같은 순위의 국내 음원 차트 곡을 부르게 된다. 노래는 1절까지만 부르고 채점은 노래방 기계가 하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참가자들이 커다란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쓴다는 점이다.

즉, 노래를 부르는 당사자는 MR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된다. 온전히 감에만 의지해야 했기에 그동안의 연습량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보였다.

두 번째 종목인 ‘춤’에서는 제시된 동작을 1분 동안 프리 댄스 속에 얼마나 많이, 자연스럽게 녹여 내는가로 점수를 얻는다. 반주로는 다양한 분위기의 EDM을 랜덤으로 틀어 주며 그중에는 무반주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 경기의 하이라이트인 운 종목에서는 여러분의 개성을 뽐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종목인 ‘운’은 말 그대로 운을 시험한다. 참가자들은 통에 든 종이 쪽지를 하나 뽑아 거기에 적힌 미션을 수행한다. 미션은 노래와 춤을 제외한 아이돌이 갖춰야 할 소양을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예능감, 연기력, 팬 서비스, 패션 센스 등 다양한 항목의 미션이 준비되어 있다.

운이 좋으면 특기를 선보일 수 있고, 운이 나쁘면 쥐약인 미션을 꾸역꾸역 수행해야 했다. 그 경우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방송 분량이나 챙기는 게 최선이었다.

“자, 그럼.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게임 설명이 끝난 뒤에는 효율을 위해 7명씩 세 팀으로 나뉘어 진행을 따로 할 것이라며 순위를 기준으로 나눈 팀을 안내받았다. 승현은 A팀, 이진은 B팀, 찬우는 C팀에 배정되어 각기 헤어지게 되었다.

이진은 우진, 재규 등과 함께 다른 방으로 이동하며 승현을 바라봤다. 잠시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기다려 봤지만, 승현은 이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앞에서 하늘이 떠들고 있기 때문일 수도, 타이밍이 엇갈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진은 그 뒷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서 분명한 결과를 내자.’

드디어 아침의 혼란을 잠재운 이진은 굳은 다짐을 하며 앞을 주시했다. 방금 뭘 보고 있었냐는 우진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씩씩한 뒷모습을 승현이 한발 늦게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이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승현은 동그란 뒤통수를 응시하며 웃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별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기분 좋은 미소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이진의 꽁무니를 쪼르르 쫓아가는 우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승현은 잠시 이진이 사라진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한 바퀴 굴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진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특별히 이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도 않았다.

‘하는 행동이 묘하게 기분 나쁘단 말이지.’

우진은 프로그램 초반부터 이진에게 여러모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에 어딘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한들 두 사람 사이의 문제이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우진이랑 놀지 말라고 투덜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승현은 한숨 한 번에 고민을 털어 버리고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편, 이진은 촬영 전 마지막 점검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우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 솔로곡 뭐로 할지 정했어?”

“가능하면 1라운드 곡으로 하려고.”

“진짜? 나도 그런데.”

몇 번이나 이진과의 공통점을 찾으려 하고, 무언가 닮은 점을 발견할 때마다 배시시 웃음을 짓는걸 보니 우진은 이진과 단순한 공감대 이상의 유대를 형성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묘하게 닮은 인상에 비슷한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건가, 이진은 생각했다.

“다들 1라운드 곡을 노리고 있지 않을까? 의미심장하잖아.”

“아, 그런가?”

재규가 이진의 말에 맞장구치듯 자기도 그 곡이 1순위라고 말하자 우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이진은 그런 옆모습을 보며 망설이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진아, 너 혹시…….”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참가자 분들은 여기 흰 선 앞에 한 줄로 정렬할게요!”

그러나 때마침 대기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이어질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건지 우진이 제일 먼저 일어나 카메라 앞으로 달려갔다. 흘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본 재규가 조용히 말했다.

“형이 말하기 불편하면 내가 대신 말해 줄까?”

“뭐를?”

“유이진은 이우진 롤 모델이 아니라 경쟁자니까 적당히 하라고.”

냉정하게 핵심을 꿰뚫는 말이었다. 역시 티가 났나 싶어 이진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야. 내가 잘 말해 볼게.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래, 그럼. 우진 형도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잘 말하면 알아듣겠지.”

재규와 이진은 느릿한 걸음으로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스태프는 두 사람을 재촉하고픈 눈치였으나 촬영 전 괜한 잔소리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는지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한 그룹 내에서 캐릭터 겹치는 건 의도했건 아니건 그냥 존나 잘못한 거인 건 알지?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마. 형은 소속사 압박을 안 겪어 봐서 모를 수 있으니까 내가 특별히 말해 준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자리인 양 비어 있는 우진의 옆에 가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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