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순조롭게 인터뷰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승합차를 타고 다음 촬영지로 이동했다. 차 안은 창밖의 가로등과 신호등 외에는 불빛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억지로 말을 붙여 대화를 이끌어 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부우우웅, 빈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바퀴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차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커어어, 하고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진도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붙였다.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곡을 선택하지. 편곡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 있는 보컬로 밀고 나갈까, 아니면 안무도 함께 소화해 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줘야 하나. 음방 준비는 어떡하지? 화보 촬영에 하루를 쓰면 또 연습 시간이 부족할 텐데……. 인터뷰는 잘 나왔을라나.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듯 여러 가지 생각이 중첩되었다. 각자 따로 노는 붓놀림이지만, 한 획을 꽃잎 삼아 차곡차곡 겹치면 어느 순간 화선지 위에 탐스런 꽃 한 송이가 피어나듯 이진의 생각도 쌓이고 쌓이니 무대를 어떻게 완성하면 좋을지 어렴풋한 윤곽이 그려졌다.
‘승현이는…….’
붓 끝에서 먹물 한 방울이 톡 떨어져 종이에 번지듯 결이 다른 생각 하나가 통 튀어 올랐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서로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하자던 다정한 목소리와 오늘 1위 발표를 듣고 활짝 웃어 보이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를 향한 질투심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승현을 볼 때마다 아직도 온갖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올랐고, 거기에는 분명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이것은 비단 승현의 순위가 이진보다 높다거나 하는 단순한 문제에서 기인한 감정이 아니었다.
윈올에 참가한 이상 모든 참가자들은 동등한 조건에서 오로지 실력만을 두고 경쟁한다. 얼마나 대단한 기획사에서 얼마나 오랜 기간 연습을 했는지는 전혀 상관없다. 오직 자신의 가치를 대중들에게 증명해 보인 참가자만이 살아남아 데뷔할 수 있다고 모두가 믿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러한 생각은 제작진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다.
어떤 참가자들은 한 라운드가 끝나면 주어지는 휴식기에 소속사에서 붙여 준 레슨을 받는다. 그러나 개인 참가자인 이진은 합숙이 없는 기간 내내 불량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적금을 깨야만 했다.
‘그러니까 더 우승하고 싶어.’
이진은 승현을 좋아하는 만큼 반드시 그를 이기고 싶었다.
윈올에서는 고작 한 계단 차이지만 스튜디오를 벗어나면 둘의 간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다. 이진은 제작진의 눈속임이라도 이용해서 자신이 승현에게 모자람이 없다 증명하고 싶었다. 물론 그 밖의 이유도 존재하지만, 지금은 그게 가장 강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여태까지는 승현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만약 이진이 그를 추월한다면 그때에도 자신을 같은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답을 알 수 없기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진이 맛본 패배들은 너무도 썼다. 그랬기에 더는 맞서고 싶지 않아 회피하기까지 했다. 그럼 승현은 어떨까.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만일 이진이 승현을 이기고 주인공 자리를 앗아간다면, 그 순간에 오늘처럼 환한 미소를 보여 줄 수…….
“으음.”
툭, 어깨에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뭐야?’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이진이 화들짝 놀라 몸을 크게 퍼덕거렸다. 그러나 큰 움직임에도 어깨에 얹어진 무언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란 심장을 달래고자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슬쩍 눈을 굴려서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현의 머리통이었다. 졸다가 고개를 떨구기라도 한 듯 그는 불편한 자세로 이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끼이이익, 때마침 차가 급히 좌회전을 하는 통에 승현의 몸이 더욱 기울어졌다. 이제는 머리뿐 아니라 아예 온몸으로 이진을 누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품에서 팔짱을 낀 채 고정되어 있던 손도 툭 떨어지더니 그의 허벅지 위로 안착했다.
‘이 자식 혹시 장난치는 건가?’
절묘한 위치와 갑작스런 타이밍. 혹시 어둠을 틈 타 은근하게 스킨십을 할 속셈인 건 아닌가 하고 괜한 의심이 들었다. 오늘 인터뷰 때만 봐도 승현은 이진에게 무어라도 장난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다들 잠이 든 것 같은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진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요놈의 장난에 어울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허벅지에 얹어진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추측이 무색하게 승현의 손은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는지 축 처졌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귓가로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까지 들려왔다.
‘뭐야, 진짜 자?’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팍도 그렇고, 어깨에 기대고도 무게 중심을 이기지 못해 주기적으로 꾸벅꾸벅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도 그렇고. 도저히 자는 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헛수작을 부리려던 게 아니라 정말로 졸다가 머리를 툭 떨구고 만 것이다.
‘……귀엽네.’
이진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놈이 남에게 기댄 줄도 모르고 잠든 꼴이 귀엽고 만족스러웠다. 차가 과속 방지 턱을 넘으며 덜컹거릴 때마다 중심을 잃은 승현의 몸이 점점 기대어 오는데, 이상하게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진은 잡고 있던 손목을 다시 제 허벅지 위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살짝 주먹을 쥐고 있는 가지런한 손가락, 끝이 단정하고 동글동글한 손톱들이 그저 순진무구해 보였다.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승부욕이나 승현이 말하는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생각 따위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이진은 요새 자신이 부를 수 있는 모든 사랑 노래의 가사에 조금씩 공감하게 되었다. 낯간지럽고 설레는 기분, 한없이 좋다가도 불안해지는 마음, 한 사람으로 인해 일희일비하는 나날들.
어쩌면 이진이 그동안 첫사랑이라 불러 왔던 순간은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새로운 감정이었다. 첫사랑이라 믿은 그 감정이 사실은 주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던 어른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던 마음이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는 첫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과 손을 잡거나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승현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달랐다. 엄밀히 따지자면 순애보다 동경에 더 가까울 것 같았다.
‘그럼, 이게 첫사랑인가?’
이진은 숱이 빼곡한 승현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히죽 웃고는 다시 창가에 기대 눈을 감았다. 아까처럼 복잡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쪽 어깨와 팔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자꾸만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만도 바빴다.
달콤하고, 폭식하고, 부드럽다. 커다란 딸기를 품은 빵을 입 안 가득 베어 물었는데 사르르 녹아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쉽고, 갈망이 인다. 이진이 행복이란 단어를 태어나 처음 제대로 이해했던 그날과 꼭 같았다.
‘승현이를 이기고 우승하고 싶어. 하지만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끝내 서로의 우열이 가려지지 않은 채,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없이 긴긴 밤이 지속되길 바랐다. 모순된 생각이지만, 그게 그의 사랑 방식이었다. 이진은 자신을 담요처럼 폭 껴안은 포근한 온기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형, 일어나요. 도착했어요.”
잠시 뒤,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승현이 잠기운이 덜 가신 얼굴로 그를 깨우고 있었다. 이진은 뻑뻑한 눈을 부비며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벌써라뇨. 두 시간도 더 지났어요. 형, 어깨 안 아파요?”
“어깨?”
“일어나 보니까 제가 기대서 자고 있던데. 뭉치면 어떡하지.”
승현은 잠이 덜 깬 와중에도 그게 걱정스러웠는지 차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는 내내 계속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물어 댔다.
“너야말로 목 안 아파? 내 어깨에 기댔으니 목이 적어도 90도로 꺾였을 텐데.”
“뒤돌아봐요. 주물러 줄게요.”
“어휴, 복도에서 이러지 말고 방에나 들어가라.”
숙소 문 앞에서까지 실랑이가 이어지자 미열이 타박했다. 이번 라운드는 2인 1실을 사용했는데, 이진과 승현은 마침 바로 옆방이었고 룸메이트는 각각 찬우와 하늘이었다.
“그럼 좀 들어갈게요.”
“야, 야. 승현아, 먼저 방에서 짐이나 풀어라!”
승현이 자연스럽게 옆방 문을 열려고 하자 찬우가 뒤에서 잡아챘다. 밤공기를 쐬었음에도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보이는 이진을 배려해 늦은 밤 남의 방에 놀러가려는 승현을 막아 준 것 같았다.
“나는 환영이니까 자주 놀러와!”
하늘은 그렇게 말하고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진도 찬우에게 잡혀 들어가는 승현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얼핏 본 바로는 승현은 찬우를 한 대 때릴지 말지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아닌 듯해도 둘이 잘 놀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나니 지금 당장 침대에 누워 잠들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늘은 아직 정신이 말똥한지 맞은편 침대에서 핸드폰을 쥐고 손가락을 바삐 놀리고 있었다. 이진은 이풀을 푹 덮고 잠을 청했다.
“아, 형. 지금 자려고? 불 꺼 줄게.”
“고마워.”
“응. 잘 자.”
하늘의 명랑한 인사까지 들으니 오늘은 아주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진은 정신을 잃고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아주 충격적인 꿈을 꿨다.
‘형, 여기. 좋아요?’
‘으응.’
숙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민소매 티셔츠에 타이트한 트레이닝복을 차려입은 승현이 이진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처음에는 승현의 잠옷 취향이 특이하다는 감상뿐이었다. 그가 어깨 결림을 핑계로 마사지를 해 주겠다고 이불을 홀랑 가져가 버릴 때에도 집요한 구석에 웃음만이 나왔다.
그러나 어깨를 주무르던 다부진 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가 허벅지에 닿았을 때,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진은 버둥거리며 다급히 말했다.
‘자, 잠깐. 하늘이가……!’
‘하늘이는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하늘은 제 침대 위에서 이불 틈으로 두 사람을 힐끔힐끔 엿보고 있었다.
‘아닌데? 야, 선승현!’
‘형, 많이 결리죠. 제가 차 안에서 형을 덮치는 바람에.’
‘무슨 소리야!’
검은 민소매 셔츠 차림의 승현이 넓은 어깨를 과시하며 이진의 허벅지를 세게 쥐고 위아래로 주물렀다. 큰 손으로 사정없이 떡처럼 주무르는데 이대로 다리가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승현은 한번 힘을 줄 때마다 후우, 후우, 하고 미묘한 신음 소리를 흘려 대는 통에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야, 선승현!’
‘왜요? 형이 제 손을 허벅지에 올려놨잖아요. 이걸 바란 거 아니었어요?’
‘이 새끼는 뭐 한번 잘해 주면 바로 기어올라! 당장 그만 안 둬?’
‘여기서 더 기어오르라고요?’
급기야 허벅지에 있던 손이 살금살금 움직여 점점 몸 위로 올라왔다. 이윽고 굉장히 낯부끄럽고 민망한 그곳에 닿을 무렵…….
“이진 형, 아침 먹자!”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굉장히 참담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