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기분 나빠.’
승현의 이야기는 그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억울함으로 가득 찬 마음이 시야를 흐려 모든 게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암흑기. 당시의 분노와 무력감이 스멀스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번져 오는 것 같아 이진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펴서 역한 감각을 떨쳐 냈다.
그때는 세상이 온통 삭막하게만 느껴졌다. 윈올을 통하지 않으면 어떤 기회를 잡아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상념에 사로잡혀 내밀어진 손길들을 모두 거절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자신이 윈올의 캐스팅을 거절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은 고집과 오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련과 후회는 짙어져만 가고, 이진은 과거의 고집에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막힘없이 성공 가도를 달리는 트라이엄프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잠식하는 우울감과, 분노, 질투심 따위의 괴로운 감정들은 쉽사리 벗어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이진은 그저 거대한 강물에 던져진 유리병처럼 세찬 물결의 흐름에 따라 휩쓸려 갈 뿐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도 이미 떠나간 기회를 되찾을 수 없었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낸다 한들 성에 찰 것 같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연히 연습생이신 줄 알고.’
승현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당혹감에 뻣뻣하게 굳어 버린 팔다리, 단숨에 호감을 비치던 얼굴, 그의 등 뒤 유리창에서 내리쬐던 햇빛 때문에 시리던 눈, 대리석 바닥에 마찰되던 신발의 느낌까지. 바로 어제 겪은 일인 양 모든 게 아주 생생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과거로 돌아오며 사라진 순간의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이게 가장 최근에 꾼 꿈이에요.”
다행히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승현은 이야기를 마쳤다. 이진은 그제야 저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자 그나마 역겨운 기분이 조금 가셨다. 뇌 속으로 산소가 공급이 되는지, 혼탁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맑아지며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미래에 대해서 완전히 알고 있잖아?’
그는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내용과 감정이 어찌나 자세하고 뚜렷한지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단순한 꿈으로 치부하기가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심지어 이진의 기억과 일치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이게 예지몽인 것 같다고.”
“정확히는 어떤 미래에 대한 꿈이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어쩌면 다가왔을지도 모르는 미래요.”
이진이 조심스레 질문하자 승현이 답했다. 그리고 단순한 감인지 논리적인 확신인지는 몰라도 그의 답은 정확했다. 그 꿈은 이진이 윈올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다가왔을 미래일 테니까.
“처음엔 스트레스 때문에 꾸는 꿈인 줄 알았어요. 촬영장이 배경인 데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낯선 환경 때문에 기분 나쁜 꿈을 꾼다고 생각했거든요.”
“일리 있는 추측이네.”
“제 스트레스 원인 1등이었던 유이진이 나오지 않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고요.”
승현이 장난치듯 덧붙였지만 이진은 그 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뻣뻣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승현도 이진의 태도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뒷말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형이 말했죠. 사실 형이 3년 후 미래에서 왔다고.”
쿵. 심장이 꽉 조이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처음 찬우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뒤로 한 번 더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점차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는 듯한 승현과의 관계에 일부러 미뤄 둔 주제였다. 잔잔한 수면 위에 누군가 큰 돌을 던진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처음에 저는 형이 저랑 비슷한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꿈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걸 보니 유이진이 의외로 허당에 순진무구한 면이 있구나 생각했죠…….”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크흠.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조금 가볍게 생각했어요.”
잠시 샛길로 빠질 뻔한 이야기를 칼같이 끊어 냈다. 승현은 뺨을 긁적이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형이 제 과거사를 증거라고 언급하기 전까지는요.”
주식이나 로또를 사 둔 것이 있느냐, 승현은 그렇게 물었고 이진은 그럴싸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대신 승현과 관련된 현 시점에서 이진만이 알고 있을 법한 정보를 말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지만.
“정말 별 생각이 다 들었거든요.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지. 유이진이 일부러 나를 엿 먹이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건가. 혹시 유이진 말고도 이런 얘기를 믿는 사람이 있나. 그럼……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승현은 여태껏 혼자만 생각해 왔을 속마음을 읊조리듯 털어놨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형은 바로 며칠 전에 저 때문에 부상을 당해서 프로그램에서 하차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런 형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얘기를 했을 것 같지는 않은 거예요.”
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던 서운함이 삐죽 존재를 드러내는지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걸 느낀 건지, 승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정한 눈길로 이진을 응시했다. 마치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듯한 따뜻한 눈빛이 이진의 마음을 오래도록 어루만져 차갑게 얼어붙은 속을 살며시 녹여 주었다. 휘잉, 공허한 소리를 내며 불어 대던 찬 바람은 어느덧 여름의 온풍으로 변해 시린 가슴에 열기를 가져왔다.
“형 말이 맞아요.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형이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그게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형이랑 같이 데뷔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같이 데뷔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고 그렇게 다짐했어요.”
승현이 지금까지 꿔 온 꿈을 단지 스트레스 때문에 꾸는 개꿈이라고 생각했을 걸 감안하면 그때의 모습이 이해가 됐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지가 않았다. 한때는 그의 인정이 듣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는데, 이제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생겨 버렸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그런 단어를 검색했냐고요?”
이진이 흐린 말끝에 숨은 질문을 승현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짧은 숨을 뱉어 낸 뒤에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러나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차분하던 승현의 태도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후우, 이번엔 긴 한숨이 터졌다. 승현은 살짝 고개를 올리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제 꿈에 나온 형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예상치 못한 말에 의문이 들기보다 왈칵, 하고 거센 감정이 목울대까지 차오르는 게 먼저였다. 승현은 마치 자신이 불행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슬프게 말했다. 작은 꿈의 조각 속에서 그는 이진의 슬픔을 읽어 내고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꿈속의 저는 과거로 돌아가 윈올에 출연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형을 부러워하기까지 했어요. 자기 분야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굳은 심지를 지킬 수 있는 형의 단단함이 존경스럽고, 계속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어요.”
당시의 이진은 엉망진창이었다. 열아홉의 겨울, 세상에 홀로 남은 그 순간부터 이진의 인생은 쭉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때에는 세상을 원망하기만 하면 됐다. 가난한 부모님, 애매한 재능,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들어질 때면 내가 뭘 잘못했느냐, 왜 나만 힘들어야 하냐 그저 하늘을 향해 원성을 쏟아 버리면 됐다. 그 뒤에는 다시 제 할일을 하며 때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스물넷의 여름, 어쩌면 잘못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올을 보고, 제가 가졌을지도 모를 영광을 손에 거머쥔 승현을 보고 가당치 않은 질투와 열등감을 품은 게 아닐까 하고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지독한 자기혐오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 지금의 형을 보니까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행복해 보여서.”
승현은 점점 목이 메여 왔다. 단어 사이사이,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도 좀처럼 진정하기 힘든지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형이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할지 다 아는데도, 그런데도 꿈에서보다는 지금의 형이 훨씬 행복해 보여서…….”
“승현아.”
“그래서 차라리 제 망상이었으면 했어요. 형이 정말로 홀로 그런 시간을 견뎠던 것보다는 차라리 제가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혀서 꿈을 현실이라 착각한 게 나으니까요. 물론 그런다고 현실은 변하지 않지만요.”
그런 이유인 줄은 몰랐다. 섣불리 승현의 과거를 입에 올린 자신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이진은 차마 승현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래를 떨궜다.
“……다 진실인 거죠? 형은 이미 겪었던 일인 거죠?”
대답할 말이 없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승현의 바람대로 이진은 상처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불우한 형편도, 방황했던 과거도, 그로 인해 모나진 성격도 뿌리까지 스며들어 더 이상 떨쳐낼 수 없는 삐뚤어진 마음까지. 아픔의 흔적이 남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겉으로 그런 척 연기를 하더라도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현실도 변하지 않는다. 이진은 자신이 바라던 이상의 인물이 될 수 없었다.
“맞아. 네가 본 게 바로 과거의 나야.”
이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했다. 지나간 일은 무엇도 바꿀 수 없다. 그저 지금의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미래를 바꿀 뿐이다.
“너를 미워해서 그래서 널 힘들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해서 정말 미안해.”
덥석, 불쑥 뻗어 나온 손이 이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이진은 승현의 품 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
“형.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요.”
“나는…….”
“제대로 믿어 주지 않아서 미안해요.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을 텐데 화내고 가 버려서 정말 미안해요.”
승현은 이진을 힘껏 끌어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귓가에 번지는 조용한 목소리가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다. 또 한 번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아까 느낀 어딘지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은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그때 자신을 등진 차가운 뒷모습이 마음에 남은 것이다.
“형을 믿는다고 더 빨리 말하지 못한 것도, 제가 외면하면 문제가 모두 사라질 거라 생각한 것도 미안해요.”
“선승현, 승현아.”
“저는 그냥…….”
머리 위로 흐트러진 숨소리가 들렸다. 이진이 힘든 만큼 승현도 이 순간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같은 시간대의 기억을 공유한 둘이 하루 종일 예민해진 신경을 억누른 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잘못을 끄집어내 잘못을 고하는 이유는, 단순히 쏟아지는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이진은 팔을 들어 승현을 마주 끌어안았다. 포근하고 안정감이 들었다.
“형이 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지금보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 힘들더라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중이다. 혼자서는 헛발질을 치고 제자리에 머무를 뿐이겠지만, 함께이기에 넘어지고 부딪혀 가면서도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따뜻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