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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44화 (144/173)

144화

이진은 그런 상투적인 변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가볍게 무시하고는 제 한탄을 이어 나갔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한테 기회가 와야 하는데. 너 같은 놈 말고 더, 더 간절한 사람한테.”

“저도 열심히 살았거든요?”

승현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취한 사람을 상대로 발끈해 유치한 대답을 하는 자신이 아주 한심했다. 그 순간 이진이 분한 얼굴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내가…… 했으면 넌…… 못 했어.”

“네? 안 들려요.”

“내가 거기 참가했으면 넌 데뷔도 못 했다고!”

이진이 도전적으로 외쳤다. 그가 윈올에 참가했으면 승현은 데뷔도 못 했을 거라고.

번뜩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유이진이 선승현에게 적대심을 불태우는 이유는 다름 아닌 질투와 열등감이었다.

“윈올에 참가하려 했어요?”

“내가 그때 그 재수 없는 새끼 때문에 캐스팅을 뻥 차 버리지만 않았다면…… 너 같은 건 데뷔도 못 했어. 내가 과거로 돌아가잖아? 그럼 넌 각오해야 돼.”

이제는 아예 승현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제 할 말만을 중얼거렸다. 이마를 손등에 기댄 채 훌쩍이면서 분한 듯이 말을 뱉는 모습이 누가 봐도 억지를 부리는 주정뱅이와 다름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만취 상태일 텐데 혀 한번 꼬이지 않고 어찌나 발음을 또박또박 잘하는지 헛소리 취급하고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됐어요. 저야말로 과거로 돌아가면 별로 데뷔하고 싶지도 않거든요.”

“한 번 더. 딱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기어코 승현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아프도록 울렸다.

‘만약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작 누군가 간절히 바라던 기회를 잡아 모두의 선망을 받는 위치에 도달한 승현은 모든 일을 되돌리고 싶어 했다.

연예계는 상상 이상으로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업계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저 제 재능을 꽃피우고자 뛰어든 이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곳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웬만한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승현은 윈올에 출연하면서 방송국의 실체를 맞닥뜨리고 연예계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개인에 불과했기에 연예계와 아이돌 산업이라는 질척한 늪지대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연습생이나 지망생이 아닌 진짜 연예인이 되면 카메라 앞에서보다 뒤에서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연예인은 그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그들은 그 뒤에 도사린 수많은 사람의 이익 관계에 사지가 묶여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최소 계약 기간만 채우면 해체하고 각자 갈 길 가자.’

멤버들은 그리 말했지만, 승현은 갈 곳이 없었다. 아이돌로서의 삶에 회의감을 느낀 지는 오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돌아간다 한들 이미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뒤라 진정 원하던 일상을 되찾기란 불가능했다.

또한 쉽게 발을 뺄 수 있는 업계도 아니니 좋든 싫든 유명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 관심이 결코 호의적인 시선이 아닐 것임은 분명했다.

승현은 과거 지금은 돌아가고 싶은 일상 속에서 도망치듯이 윈올에 참가했다. 거기서 우승해 데뷔만 한다면 바라던 꿈을 이루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고 이제 미래를 생각하면 망망대해를 홀로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참 전부터 아주 고독하고, 또 슬펐다.

감상에 젖은 승현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길 것이 분명한 이에게 물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스스로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을 그가 대신해 주길 바라서였다.

“선승현을 데뷔 못 하게 해야지. 그리고 내가 대신 데뷔해야지.”

유이진은 아예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승현이 원하던 말이었다.

“어떻게 그럴 건데요? 자신 있나 봐요?”

“내가 노래 부르면, 너넨 다 죽어. 나 완전 잘 불러.”

사실이었다. 승현은 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목소리에 매료된 적이 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이 정도로 실력에 자신이 있고 성공하고픈 욕심도 뚜렷한 이가 왜 지금에라도 데뷔하지 않는 건지 궁금해졌다.

“실력만 좋아선 인기 얻기 힘들어요. 재밌는 상황이 잘 받쳐 줘야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작곡가님은 좀 재미없는 성격 아니에요? 예능에서 살아남기 힘들 텐데.”

“끄응…….”

승현이 놀리듯 말하자 이진이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곤란한 신음 소리를 냈다. 풋, 웃음이 터졌다. 자는 것 같으면서도 긴 문장도 제대로 다 이해하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저 대신 데뷔하고 싶다면요, 그냥 저를 이용하세요. 작곡가님은 이미 실력이 충분하니까 저랑 라이벌 구도로 대치하다 마지막에 제가 나쁜 놈이었다고 몰아붙이면 저도 떨어지고 작곡가님도 데뷔할 수 있어요. 그동안 쌓였던 루머가 한꺼번에 터지고 과거사 들춰지면 일도 아니지.”

“으응,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떠오르는 대로 한 말이지만 제법 그럴싸한 계획처럼 들렸다. 실제로 성공시키려면 운도 따라야 하고 많은 사람이 협력해야 하겠지만, 저 얌전하고 딱딱해 보이는 사람을 성공적으로 띄우려면 이 방법이 제격이었다.

그런데 돌연 유이진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상체를 그가 있는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승현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니다. 역시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러고는 설레설레 손사래를 쳤다. 제 아이디어가 기각당하자 승현은 반사적으로 이유를 물었다.

“왜요?”

“왜냐니. 그건 너무 쓰레기 짓이잖아. 네가 아무리 재수 없고 싫어도 그 정도는 아니야.”

승현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문득 과하게 자기 파괴적인 말을 하고 말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

스트레스의 근원인 환경을 바꿀 순 없으니, 마음속에서만이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정신이 피폐해져 낯선 이에게 자학하는 듯한 말을 입 밖으로 낸 것이다. 만약 촬영 중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더라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정정당당해야지.”

승현이 충격받은 사이, 이진이 뒷말을 이었다.

“정당하게 싸워서 정당하게 결과를 얻으면 돼. 노이즈 마케팅이나 부모님 도움 같은 거 없이. 만약 네가 허튼 짓을 하는 것 같으면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

이진은 이제 몸은 세운 채 눈을 감고 입만 중얼중얼 움직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괴롭힐 필요는 없잖아.”

모든 말이 승현의 가슴에 깊이 박혀 들었다.

저런 상식적인 말이 온갖 루머와 편견을 모조리 믿고 있는 듯한 유이진에서 나올 줄이야. 허탈한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왠지 모르게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스운 일인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승현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거 말고는 뭐, 선승현 무대 하는 모습은 나쁘지 않으니까.”

욕이란 욕은 실컷 다 해 놓고 마지막에는 실력을 인정했다. 한국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던가? 승현은 상쾌한 기분에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따라 서울 하늘에서는 보기 드물게 별이 밝게 반짝였다.

‘저렇게 밝은 별은 보통 인공위성이라던데.’

하지만 빛의 정체가 무엇이든 하늘에서 별처럼 빛나는 그것은 위로가 됐다. 작고 희미해 고개를 들고 찾아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별이지만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힘을 낼 수 있다.

승현은 지금껏 자신이 별이 되지 못한 인공위성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껏 별인 줄 알았던 이들이 자신과 마찬가지인 인공위성임을 알고 많이 실망했다.

하지만 지금 깨달았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면 무엇이 별이고 무엇이 인공위성인지 구분할 수 없다. 팬들은 그저 승현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위로를 얻어 갈 것이다.

‘딱 3년만 버티자.’

그저 약속된 기간 동안 제자리를 지키면 된다. 그렇게 묵묵히 버티다 보면 조금쯤은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에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내려 여전히 눈을 감고 웅얼대고 있는 이진을 바라봤다. 그는 삐뚤어진 듯 반듯했다. 승현의 짧은 식견으로는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유이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왜 지금에라도 데뷔하지 않는지, 자신의 무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다.

“작곡가님, 나중에 저랑 같이 작업하실래요?”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처음보다 어깨가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진이 건넨 평범한 말 속에서 느껴지는 올곧은 마음가짐에 숨통이 트였다.

승현은 이진의 멍한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 매료되어 버린 것 같다고.

“무슨 헛소리를. 어우, 왜 이렇게 꿈이 안 깨지?”

“지금 말고요. 저 계약 끝나고 홀로서기 할 때요. 그때 저랑 같이 작업해 주세요. 그때는 작곡가가 아니라 아티스트 유이진으로 같이해요.”

아니나 다를까 이진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승현은 재차 부탁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 일어나 숙취에 시달릴 때쯤에는 이 대화를 모조리 잊어버릴 사람이기에 더 집요하게 굴 수 있었다.

“딱 3년만 기다려 주세요.”

웃으며 말하자 이진이 꿈뻑 느리게 눈을 뜨고 그를 흘끔 바라봤다. 그리고 도로 감고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이거 설마 꿈 아닌가?”

그 목소리와 함께 승현의 꿈같던 시간도 와장창 깨졌다. 낮은 목소리로 욕을 읊조린 이진이 두 손을 들어 제 뺨을 세게 두드렸다. 승현은 그가 감은 눈을 뜨기 전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왜 하필 이럴 때 술이 깨냐.’

여기서 들키면 같이 작업은 무슨, 평생 미움받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를 홀로 남겨 두니 마니 하는 갈등을 할 틈이 없었다.

승현은 방향도 모른 채 그저 앞을 보며 달리다가 하하,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힐끔 그를 쳐다보았지만 남들 시선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한 꺼풀 벗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이렇게 손끝까지 짜릿한 긴장감은 아주 오랜만이다. 들킬까 놀란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전신에 울려 퍼지는 심장 고동이 기분 좋았다. 들이쉬는 숨이 시원하고 내딛는 발걸음은 가볍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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