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진의 흘김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눈가에 남은 눈물을 모조리 손가락으로 훔쳐 주었다. 행여 살이 쓸릴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손끝까지 다정한 온기를 머금은 듯해 마음이 더 아파졌다.
승현은 쏟아지는 눈물에 밭은 숨을 내쉬던 이진이 어느 정도 진정한 듯하자 다시 입을 뗐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친구 사이도 서로 온도가 맞아야 잘 유지되는 거잖아요. 형이 힘들어하면 아무 의미 없어요.”
하지만 상냥하고 사려 깊은 말에도 이진의 마음은 쉬이 편해지지 못했다.
여유가 없다. 그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이진은 매일같이 닥쳐오는 사건들을 마주하기만도 벅찼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쉼 없이 달리다 보면 정신력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승현과의 첫 데이트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백화점에서의 일도 그랬다. 승현의 고백을 직감한 순간 그는 기쁨보다 불안함과 부담감을 먼저 느꼈다.
‘그래도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방송국에선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두 사람이 싸우길 바라고, 팬들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 채 이진을 응원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대처라면 그의 평정을 흐트러트리는 승현을 저 멀리 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그러고 싶지 않아 친하지 않은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아쉬운 소리라곤 죽어도 하기 싫던 승현에게 해답을 달라 애원했다.
단순한 오기나 집착이 아니었다. 해결해야 할 수 많은 문제들 속에서도 승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다면 한가지만을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었다. 솔직히 승현의 여러 면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서로 맞지 않는다 여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여유가 없기에 마음의 벽을 쌓을 틈이 없어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행동에도 쉽사리 마음이 설?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여러 해에 걸쳐 이진의 영혼에 각인되었던 그의 존재가 한순간에 뒤집히며 깊숙이 파고든 걸 수도 있었다.
승현의 그림자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이진이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한발 내딛는 순간, 바로 마주하게 될 빛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한다면 지금의 이 감정은 몇년 전부터 예정돼 있는 결과일 테다.
사실 이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계기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이진이 승현을 좋아하고 있단 사실 단 하나뿐이다.
“내가 요즘 피곤해서 기분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너랑 있을 때도 집중 못 할 정도로 힘든 건 아니야.”
이진은 뺨을 슥슥 문질러 아직 남아 있던 눈물 자국을 닦아 냈다. 그리고 물기에 젖어 살짝 눅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힘든 일이라면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어 봤다. 그리고 이진이 이뤄 낸 것들 중에는 상황을 핑계로 댄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오늘 어색하게 보였던 이유는 네 마음이 어떤지 확신하지 못해서 그래.”
“제 마음을요?”
“물론,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알아. 오늘도 많이 느꼈어. 하지만…….”
이진이 말끝을 흐리자 승현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답답한 기색이 보였지만 그는 이어질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두 번째는 혼란스러워서 넘어갔다지만 그 일로 상황이 이렇게까지 왔다면 이제는 말해야만 했다. 이진이 오늘 내리 심란했던 이유를, 승현의 속마음을 실수로 들춰 보고 말았다는 사실을.
“내가 봐 버렸거든.”
“뭐를요?”
“네 핸드폰 최근 검색어.”
이진으로서는 바닥을 치는 용기를 긁어모아 한 말이었는데, 어째 승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는 아직도 이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단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본인의 최근 검색어를 확인했다. 더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이게 왜요?”
“아니, 오늘 거 말고.”
“그러니까 형이 무슨, 제 검색 내역을 확인할 정도로 집착이 심한 타입인 게 문제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진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지만 들리지 않는 건지 승현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외쳤다.
“형, 저 가족들 말곤 연락 안 해요!”
설마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라도 생겼나, 이진이 의심한다고 생각한 승현은 자신의 빈약한 인간관계를 다급하게 까발리기 시작했다.
“동창들하고는 연락 끊긴 지 오래됐고 백미열이랑도 한 달에 한 번 문자할까 말까예요! 저는 형 말고 아무도 없어요!”
“그 말이 아니라……!”
“정 찝찝하면 평소에 핸드폰 봐도 뭐라고 안 할게요. 저 어차피 잠금도 안 걸어 놨어요.”
“잠금은 좀 걸어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기어이 이진이 잔소리하듯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몇 번 말해도 들어먹질 않던 승현의 입이 다물렸다. 어두운 골목길에 두 사람의 씩씩대는 숨소리만이 울렸다.
‘누구를 과대망상도 모자라 의처증 걸린 사람으로 보는 거야!’
이진은 기가 차서 소리쳤다. 대체 무슨 비약을 한 건지 상상도 안 갔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사람 말 좀 들어라! 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갑자기 어디서 나,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났겠어? 그런 의심 절대 안 해!”
“그럼, 대체 뭐가 문젠데요?”
호통을 듣고 기가 죽은 승현이 꿍얼대며 물었다. 이진이 어쩌다 검색어 내역을 확인하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이진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막막했다.
“후우……. 내가 네 검색 내역을 보게 된 날은, 전에 네가 손가락만 한 강아지 인형을 가지고 온 날이었어. 무슨 뜀뛰기 하는 과자 캐릭터들이 나오는 게임 하라고 했을 때.”
승현은 그날이 언젠지 곰곰이 떠올리다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방송 리액션 찍고 재수 없는 놈들 만났을 때요?”
“응.”
“그때 제가 뭘 검색했는데요? 전혀 기억 안나요.”
“그러니까…….”
정말로 짚이는 구석이 없는지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쪽이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말을 해야 하는 이진이 더 떨려 왔다. 그는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내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망상증, 과대망상, 망상증 치료…….”
차분한 목소리지만 내뱉은 단어가 가진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그의 혀끝에서 한 음절이 완성될 때마다 승현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또한 잠시 외면하고 있던 단어들을 소리 내어 발음하면서 이진 역시 다시금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비단 이번 일뿐이 아니었다. 이 일의 시초는 이진이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승현에게 말했을 때가 아니던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후회가 늘어 갔다.
‘괜히 땅 속에 영영 묻어 둬야 했던 비밀을 캐내어 버린 게 아닐까? 그때 과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지금에 와서 이런 상황을 마주할 일은 없었을 텐데…….’
당시 이진은 자신이 과거에 품은 열등감과 악감정을 승현에게 해명하고 또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관계를 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이진의 과욕이었고, 지금 두 사람 사이의 장애물은 이해나 소통 부족 따위가 아니라 다름 아닌 과욕이 부른 오해였다.
“이걸 보고 나니까 심란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형.”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너 혹시…… 나를 치료가 필요한 과대망상 환자라고 생각해?”
그는 결국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승현의 표정은 침울했고 그만큼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비밀리에 숨겨 왔던 마음이 들통나 곤란한 것 같다가도 다르게 보면 무언가 크나큰 오해를 산 것 같았다.
이 이상 오해를 쌓고 싶지 않았다. 전처럼 말을 두루뭉술하게 해 오해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진은 질문을 입 밖으로 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후회를 하고 말았다. 만약 승현이 맞다고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절대 아니에요.”
다행히 승현은 단칼에 이진의 후회를 잘라 냈다. 안도감이 찾아오는 한편 몹시 예상외의 반응이기도 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고 했는데도?”
“그건 좀 이상한 소리로 들리지만 그렇다고 형이 망상증 환자라고는 생각 안 해요. 손가락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이진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손가락 걸고 약속도 아니고 맹세라니.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손가락을 잘라 주기라도 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다급한 마음에 나온 표현이겠지만 어쩐지 섬뜩한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럼 그건 대체 왜 검색한 거야?”
“그게 형이랑 전혀 관련이 없는 건 아닌데요. 형을 의심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말하기 곤란한 거야?”
도리도리, 승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등 뒤에서 비춰지는 빛 때문에 도통 섬세한 표정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결국 이진은 양팔을 잡고 그를 빙글 반대로 돌려세웠다. 가로등 빛을 마주 보게 된 승현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손짓으로 말을 재촉했다.
“곤란하다기 보다는…….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알았어. 말해 봐.”
꿀꺽. 두 사람의 목울대가 한번 크게 오르내렸다. 대체 승현이 또 어떤 충격적인 말을 꺼낼지 몹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꿈을 꾸는데요.”
“응.”
“정확히는 윈올에 참가하기 전부터 꿨던 꿈이에요. 근데 이게 예지몽 같거든요.”
승현이 털어놓은 꿈에 대한 첫 기억은 고막을 찢을 듯 파고드는 셔터 소리와 쉼 없이 터져 눈을 멀게 하는 플래시, 그리고 피부를 태울 듯 뜨겁게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의 끔찍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