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지금인가? 지금……?’
택시에서 내리고부터 이진은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촬영 끝나고 피곤할 텐데 같이 나와 줘서 고마워요.”
말없이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긴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행동에 승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승현은 가만히 이진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시선이 느껴졌다. 전에 없이 진중한 태도였다.
‘지금이다.’
생각하기 무섭게 승현이 입을 열었다.
“……형.”
그러나 승현이 한 문장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휘이이 바람이 불었다. 긴장되는 순간에도 말을 잠시 멈출 만큼 큰 바람이었다. 옷자락이 펄럭이고 예쁘게 손질했던 앞머리는 사정없이 눈을 찔렀다.
서늘한 기운이 목깃을 헤치고 옷자락 틈으로 파고들었다. 이진이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
한바탕 세찬 바람이 지나가자 귀가 먹먹해졌다. 웅웅거리는 이명이 가시길 기다리며, 이진은 몸에 남은 찬 기운을 털어 내듯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승현도 한 손으로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온통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낮게 내리깐 시선만큼은 선명했다.
그러다 문득, 이명이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공기 중에 가라앉아 있는 침묵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불명확한 이질감은 형태를 뚜렷이 하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이진도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다 여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만약 이진이었다면 데이트 후 헤어지기 직전의 순간, 마지막 고백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조마조마 안달을 냈을 테다. 그런데 세찬 바람이 지나가고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니, 고백을 앞 둔 사람의 태도치고는 이상했다. 차라리 이별을 앞두고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해야만 하는 남자의 태도와 더 유사했다.
온몸을 쥐어짜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눈앞에 선 이를 불렀다.
“승현아.”
“네.”
찬 바람이 옷 틈뿐 아니라 가슴속까지 파고들었는지, 심장이 놓인 부근에 욱신욱신 시려 왔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 그 사이로 바람이 휑하니 지나다니는 듯이 시큰거렸다.
승현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이진을 응시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은 이진의 괜한 불안이나 피해망상으로 인한 착각이 아니란 것이다. 이번에는 직감이 맞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승현은 지금 고백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진과의 관계를, 혹은 그의 감정을 정리하고자 하고 있다는 것을.
‘대체 왜?’ 의문이 온통 머릿속을 가득 채웠으나, 이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때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이진이 불안정한 사람이라서, 추가그걸 감안하면서 사귈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이진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승현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가 형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죠.”
“……응.”
“형이 끈기가 없다고 해서요.”
“맞아.”
취조하듯 짧은 문장이 오고 갔다.
“전 그게 형이 절 받아 주기 위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승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비난일지 책임 전가일지 알 수 없어 두려워졌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어요.”
“으응…….”
“덕분에 제가 정말로 형하고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깨달을 수 있어 좋았고요.”
그러나 의외로 승현은 차분하게 그동안 정리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마지막 문장 끝에는 살짝 웃음이 걸려 있기도 했다. 이진은 슬며시 눈을 들어 그의 입가를 바라보았다.
“처음 본 날부터 느꼈던 알 수 없는 끌림은 호기심이 되고…… 호기심은 관심이, 관심은 설명하기 힘든 집착이 되었는데. 그게 이상하다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저한테는 너무 자연스러운 감정이었거든요. 형은 그만큼 대단하고 멋있는 사람이니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승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쿵. 쿵. 이러다가 승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크고 요란한 심장 소리가 이진의 고막을 울렸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원래는 오늘 고백하려고 했어요.”
그럼에도 나지막한 울림은 이진의 마음속 호수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잔잔하면서도 격렬하게. 물속에 빠져 숨을 잃어 가면서도 온몸을 감싸 오는 따뜻함과 안락함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하염없이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요하고 강력한 힘이었다.
“형이 이 정도로 용기 내서 먼저 다가와 준 게 처음이어서…… 혼자 너무 들떴었나 봐요.”
헤어 나올 수 없을 때까지 가라앉고 나면 숨통을 조여지면서도 발버둥 한번 치지 못하고 그저 괴로워할 뿐이니까.
“형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부드럽게 돌려 말했지만, 그건 분명히 이진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뒤 오들오들 떨리던 어깨처럼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형편없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진은 자신이 왈칵 눈물을 터트리기 직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형은 아직 준비가 덜 됐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이진이 형.”
“나도, 나도 노력했어.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오른쪽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순식간에 구슬이 되어 흘러내렸다. 왼쪽 눈도 마찬가지였다. 축축한 감촉이 먼저고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건 다음이었다.
이진은 승현에게 따지듯 물었다.
“내가 우스워? 소꿉놀이 잠깐 하고 나니까 흥미가 떨어졌니? 내가 충분히 어울려 주지 못해서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고백하기 전에 마음이 식을지도 모른다고 미리 예고했어야지. 나를 꼬시니 뭐니 듣기 좋은 소리만 할 게 아니라. 네가 정말 나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이러면 안 되잖아.”
사랑에 서툰 건 이진의 탓이 아니다.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도 말을 예쁘게 꾸미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평범한 연인을 온전히 연기하지 못하는 것도 이진의 탓이 아니다. 단 한 번도, 심지어 가족에게서조차 이런 따뜻하고 마음 저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모두 처음이니 서툰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너랑 있으면 너무 비참해져.”
그러니 자신이 승현의 기준에 미달된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이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왈칵, 다시금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눅눅히 젖은 눈가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긴 속눈썹은 서로 얼기설기 엉겨 붙어 눈꺼풀을 자꾸만 무겁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주변이 없어 제대로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진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어졌다.
“그런데도 어른이 되고 겪은 행복한 순간들은…… 모두 너랑 함께 있을 때뿐이었어.”
“형.”
“너랑 그저 그런 동료로 남고 싶지 않아.”
승현에게 특별한 사람이고 싶었다. 처음 과거로 돌아오고 얼마간 이진은 ‘선승현’이 관심을 갖고 좋은 대접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너무도 싫어 어긋난 열등감을 표출했었다.
“내가 노력할게.”
하지만 이제는 전후 관계가 바뀌었다. 선승현이 그렇게 여기기에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이진이 비록 아무 존재도 아닐지언정 승현에게만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설령 하루에도 수십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에 휩싸여야 한대도 이진은 그의 좋은 연인이 될 자신이 있었다. 승현이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노력으로 어떻게든 극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승현은 눈물범벅이 된 이진의 뺨을 닦아 주면서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형, 이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당연히 형 잘못도 아니고요.”
그리고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이진을 끌어안았다. 이진은 흠칫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가 이내 다정히 안아 오는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형이 싫어졌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승현은 가만히 이진의 등에 손을 얹고 손끝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작은 동작도 위로가 되었다. 이진의 울음이 조금 진정된 것 같자 승현이 중얼거리듯 농담을 건넸다.
“형은 혼자 두면 생각이 너무 멀리까지 뻗어가서 큰일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계속 옆에서 지켜볼게요.”
“시끄러워…….”
농담마저도 이진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녹아 있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이렇게 분명한데 도대체 어디에서 자꾸만 혼선이 생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승현은 농담에 이어 본론을 설명했다.
“그런데 형은 아직 천천히 연애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정해.”
“생각해 봐요. 우리는 지금 전 국민이 주목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참가자예요. 이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엄청날 텐데 최근엔 언론에서 인성으로 때리지, 같은 참가자 애들은 말썽이지. 특히 하위권 애들은 자포자기가 심해서 말도 잘 안 듣고. 그것 때문에 형이 바로 어제 충격적인 점수도 받았잖아요. 형은 섬세하니까 방금 말한 거 말고도 몇 배는 더 스트레스를 받겠죠. 아마 형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엄청 많았을 거예요.”
그중에서 네 핸드폰의 최근 검색어가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진은 부루퉁하게 생각했다.
“형은 또 성격상 뭐든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니까. 갑자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더 컸겠죠.”
“……아니야.”
“솔직히 오늘 엄청 어색했어요. 내가 아는 유이진이 아니라 윈올의 유이진이랑 데이트하는 느낌이었다고요. 저는 그것도 좋아서 가만히 있었지만.”
귓가에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승현은 이진이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라 눈치채지 못한 척을 하고 있던 거다. 곰탱이 같던 선승현에게 살짝 배신감이 느껴져 이진은 살짝 눈을 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