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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39화 (139/173)

139화

“못 먹겠으면 남기고 나가서 다른 거 먹어요.”

“아니야, 매워서 그렇지 맛있어.”

젓가락질 속도보다 물 마시는 속도가 빠른 이진에 비해 승현은 자신 몫의 음식을 금세 비워 내고 있었다. 혀가 타 들어갈 것 같고 속에서 열이 후끈후끈 올라오긴 하지만 확실히 맛있긴 했다. 승현도 잘 먹고 있는데 먼저 오자고 한 주제에 못 먹겠다고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진은 호기롭게 짬뽕을 집어 들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건져 올리자 붉은 국물에서 느껴지는 진한 매운 내에 코끝이 찡하고 아려 왔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면발을 후루룩 흡입했다.

“콜록, 콜록!”

그러나 기세가 너무 과했던 걸까, 한 젓가락을 채 먹기도 전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 채 팔꿈치로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자 놀란 승현이 곁으로 다가와 등을 쓸어 주고 냅킨을 건넸다. 코와 목이 화끈거리고 얼굴로 열이 몰렸다.

“괜찮아요?”

“응, 응. 괜찮아……. 사레 들려서 그래. 먹자.”

민망함 때문인지 캡사이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얼굴에 열이 후끈후끈 몰렸다. 이진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오기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보다 못한 승현이 이를 만류했다.

“정말 탈 나겠어요. 이제 그만 먹고 나가요.”

“아니야, 정말…….”

“형, 오늘 좀 이상해요. 왜 그러는 거예요?”

탁! 승현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일부러 요란하게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진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불안하던 유지되던 평화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였고, 팽팽히 당겨진 신경 줄이 퉁 끊어지는 소리였다.

이진은 슬그머니 손에 쥔 젓가락을 내려놨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묻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때로는 뜨거운 분노보다 냉정한 침묵이 더 무서운 법이다. 지금 이진은 승현이 자신의 행동을 관찰하고 분석할까 봐, 그리고 또다시 그의 안에서 비정상으로 분류될까 봐 두려웠다.

“미안해. 너무 긴장했나 봐.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저한테 맞춰 줄 필요 없는 거 알잖아요.”

이진이 나직이 털어놓자 승현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반쪽짜리나마 목소리에 섞인 진심을 느낀 것 같았다. 승현은 매운 음식을 못 먹으면서 왜 굳이 이 식당을 고집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진을 달랬다. 그 상냥함이 오히려 죄책감을 자극했다.

무리해서 승현에게 맞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진은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에서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괜한 피해 의식이 불쑥 치밀고 올라올 때마다 승현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고, 괜한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라 몇 번이나 되뇌어 봤지만 끝내 잘못된 행동을 했다. 그리고 그걸 은폐하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하고 결국 승현이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어 버렸다.

“내가 평소에 자주 까탈스럽게 굴었잖아. 그래서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거든. 근데 괜히 다 망쳤네……. 정말 미안해.”

이진이 자조하듯 웃었다. 웃음 끝에 고개를 푹 떨구자 안절부절못하던 승현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자꾸 미안해요. 저야말로 미리 괜찮은 음식점 좀 찾아놨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너무 비싼 덴 부담스러워할 것 같고, 형 음식 취향은 모르고……. 게다가 저 혼자 전부 정해 놓으면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리고 형 까탈스럽게 군 적 없어요. 너무 착해서 탈이었지.”

두서없이 나열되는 말에서 당황한 게 느껴졌다. 승현은 필사적으로 이진을 변명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이진이 죄책감과 미안함에 쓴웃음을 거두지 않고 눈을 내리깔고 있자, 승현은 말을 하다 말고 입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어요.”

“……그럴까?”

“네. 지금 형 입술 콕 찌르면 뻥하고 터질 것 같아요.”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이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진은 마주 싱긋 웃으며 손을 잡고 일어났다. 늘 승현에게만큼은 감정을 제대로 숨길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아주 능숙하게 표정을 감출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 들고 벤치에 앉았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혀가 따끔따끔하던 이진은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몹시 반겼다.

“지금은 괜찮아도 내일 되면 배 아플 수도 있으니까 좀 중화될 만한 것도 먹어야겠어요.”

승현은 게 눈 감추듯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운 이진에게 걱정 섞인 잔소리를 했다. 벌써부터 속이 화끈거리는 걸 봐선 정말로 탈이 날 것 같았다.

이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는지 승현은 그 뒤로 군것질거리가 보이는 족족 하나씩 사 들고 먹여 댔다. 오락실과 장난감 가게, 팝업 스토어와 옥상 정원을 차례로 들르는 와중에도 이진의 손엔 꼭 하나씩 먹거리가 쥐어져 있었다.

풀 향을 머금은 시원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간혹 가다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끼며 이마를 간질이는 게 기분 좋은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조명은 운치를 더해 주었으나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아니라 모처럼 비밀리에 걷기 딱 좋은 장소였다.

“배불러.”

“간식거리라 조금 있다가 다 꺼질 걸요. 더 먹어도 돼요.”

“이렇게 먹다가 살 찌겠다.”

“운동하고 자면 되죠.”

돌길을 따라 옥상 정원을 걸으며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편치 않은데도 도란도란 오고 가는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승현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낮게 퍼지는 감각이 좋았다.

어둠에 묻혀 장난감같이 작아진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신기하게도 이진을 괴롭히던 상념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아, 살 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오히려 형은 살이 좀 쪘으면 좋겠다고 생각…….”

“근처에 살면 밤마다 같이 운동할 수 있을 텐데. 그치?”

승현은 이진의 의미 없는 대꾸에도 얼굴을 붉히거나 작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뭐든 성실하게 반응해 주다 보니 이진도 쉴 새 없이 무슨 말이라도 내뱉게 되었다.

그때 이진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아.”

승현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여 바라본 물체는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한 사이즈의 작은 상자로, 얼핏 주얼리를 담는 케이스 같았다. 승현은 떨어진 상자를 보고는 잠시 멈칫하며 이진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소 뻣뻣한 동작으로 조용히 상자를 집어 들었다.

‘저건 설마…….’

팔에 걸치고 있던 겉옷 안주머니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승현은 아무 말 없이 상자를 도로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이번엔 떨어지지 않도록 겉옷을 걸쳤다. 슬쩍 곁눈질하자 긴장으로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모양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그리고 승현의 태도로 보나 저건 프로포즈용 반지 상자임이 틀림없었다.

밤이 깊어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쇼핑몰의 모든 가게를 구경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원래의 목적인 영화도 봤고, 약간의 실수가 있었으나 오붓이 저녁도 먹었다. 이제 남은 순서는 이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뿐이긴 했다. 그 사실을 직시하자 두근,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어……조금 더 걸을까요?”

승현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검지가 슬그머니 이진의 새끼손가락에 얽혀 왔다. 작지만 은근한 손짓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민망한 듯 눈을 피하고서는 반대편 손으로는 제 뒷목을 문질렀다.

지금 이 타이밍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엄습했다. 오늘 이진은 승현에게 여러 차례 잘못을 저질렀다. 그가 기껏 준비한 데이트 날을 스스로의 문제에 골몰하다 망칠 뻔했으니 벌충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좋아.”

이진은 용기를 내어 덥석 승현의 손을 잡았다. 어깨가 움찔 튀어오르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승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진을 마주 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승현의 목울대가 꿀꺽이며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이는 순간…….

-백화점에 방문해 주신 고객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희 백화점의 영업시간은 평일…….

하필이면 스피커에서 노래와 함께 폐점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승현은 잠시 허망한 표정이 되어 스피커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허공을 바라봤다. 반면 이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에 바짝 굳어 있던 몸에 힘이 풀리고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다행이다. 적어도 지금 고백을 받진 않아도 되겠구나.’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뭐?’

몇 초나 지났을까. 잠시 숨을 돌리고 나자, 이진은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경악스러웠다. 불쑥 치밀어 오른 생각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발끝부터 조마조마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감이 가득 피어올랐다.

사랑은 주는 것뿐 아니라 받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이진처럼 관심이란 이름의 폭력에 지친 사람일수록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몹시 길고 버거운 과정을 이겨 내야 했다. 그러나 이진은 이미 충분할 만큼 방황하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 불안감조차도 자신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번만 견디면 더는 힘들지 않을 거야.’

어렵고 먼 길을 돌아와 드디어 결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진은 이게 마지막 관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보여 주기 위해 이진은 승현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승현도 이진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옅은 미소를 띤 채 뺨을 붉히는 모습을 보니 마주 잡은 손을 타고 불안이 옮겨 가진 않은 것 같았다.

“나가자. 이렇게 꾸물거리다간 갇히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내고자 건물을 빠져나오는 승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승현은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보자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무슨 결심을 굳힌 건지 알고 있기에 앞으로 다가올 순간을 자꾸만 피하고 싶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형 좋아해요, 우리 사귈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세 음절도 되지 않았다. ‘그러자.’, ’좋아.’, 조금 더 힘내면 ‘그 말만 기다렸어.’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기다렸던 승현의 고백이다. 분명 설레서 어쩔 줄 몰라야 하는 게 맞는데, 지금 이진은 고백을 받고 답하는 일을 마치 어쩔 수 없이 해치워야만 하는 과정처럼 여겼다. 그리고 아직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유이진. 응, 이라고만 말해도 돼. ‘응!’이라고!’

이진이 머릿속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을 태운 택시는 어느새 이진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형, 내려요.”

“응!”

시뮬레이션을 과하게 돌렸는지 평소보다 다소 과하게 기합이 들어간 대답이 나와 버렸다. 택시 기사와 승현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이진은 덧붙이는 말 없이 손을 휘휘 내저어 승현을 택시에서 내쫓고 자신도 그 뒤를 따라 내렸다.

밤에도 떠들썩한 유흥가 바로 뒤 골목길에 위치한 자취방은 바로 옆 거리와는 다른 세상인 양 고요하기만 했다. 이미 여러 차례 영화나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되었던 익숙한 골목은 노란빛을 내뿜는 낡은 가로등마저도 서정적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했다.

건물 너머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불빛만이 이곳이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했음을 알려 주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승현이 가로등을 등진 채 작별 인사의 서두를 뗐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온통 어둠속에 가려지고 말았지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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