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승현이 고른 영화는 하필 영화와는 담 쌓고 지냈던 이진이 미래에서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볼 게 없었던 터라 이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공포 영화 시즌이라 그런지 선택지가 몹시 좁기도 했고, 개봉일이 바로 어제라 영화를 이미 봤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제외하면 로맨스 영화라고는 전부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가 붙은 것들뿐이었다.
라지 사이즈로 구매한 팝콘과 콜라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맨 오른쪽, 둘만 앉을 수 있는 좌석으로 선택했는데, 그럼에도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진은 누군가 몰래 두 사람의 뒤통수를 촬영할까 불안해 죽겠는데 승현은 태연하게 콜라에 빨대를 꽂고 팝콘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 두며 영화 볼 준비에 한창이었다.
“형,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갔다 와.”
그리고 광고가 시작하자 승현이 어둠을 틈타 자리를 비웠다. 방해 없이 영화를 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모양이었다. 이진은 혹시라도 승현이 나가는 길에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만나 곤란을 겪을까 봐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일까. 이진은 무의식중에 무언가를 찾듯 빈자리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좌석에 기대어 둔 크로스백의 앞주머니 틈새로 승현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이진은 팝콘 통을 안고서 캐러멜 팝콘을 씹다가 꿀꺽, 음식물을 삼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뭐라고 검색했는지 확인만 해 보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하던가. 이진은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 없이 자란 형편에 괜히 남의 물건에 눈독을 들였다가는 괜한 오해만 살 수 있단 걸 알아서 더 결벽적으로 굴었다.
그러나 얼렁뚱땅 처음의 고비를 넘고 나니 두 번째부턴 쉬웠다. 오히려 지난번 기억이 충동질을 불러일으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머릿속에선 도덕심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지만 손은 착실히 주인의 욕망을 따랐다. 곧이어 어두운 영화관에서 불빛이 번득였다.
[최근 검색어]
-마포구 맛집
-로맨스 영화 추천
-마포구 영화관
-꽃다발 당일 배송
-장미꽃 파는곳
-시티로열 강해인
-강해인
다행히 이진이 우려하던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승현의 사고 흐름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검색어들에 다소 민망해졌다.
‘다행이다.’
그저 꽃밭인 승현의 머릿속을 확인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이런 애를 덮어 놓고 의심했다니. 심란하던 마음이 진정되자 뒤늦게 죄책감이 찾아왔다. 이진은 자꾸만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불안하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뒤를 캐서는 안 되는데…….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러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손에 쥔 핸드폰을 재빨리 집어넣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승현의 그림자가 입구를 통과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걸어오는데도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거리가 성큼성큼 줄어들었다.
화들짝 놀라 열어 본 어플을 삭제하고 액정을 끄려던 찰나, 실수로 화면을 잘못 눌러 ‘ㄱ’을 검색하고 말았다.
‘안 돼!’
흔적을 남기는 치명적인 실수에 부랴부랴 기록을 지우려 했지만, 어느새 승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진은 하는 수 없이 허겁지겁 홈 버튼을 누른 뒤 화면을 껐다. 그리고 이진을 내려다보는 승현을 태연하게 올려다봤다. 속으로는 선승현이 제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형, 심심했어요?”
“응? 뭐가?”
“손에 제 핸드폰…….”
“아, 방금 어디서 진동이 울렸는데 혹시 네 건가 하고 봤어. 근데 아니더라. 여기.”
다급하니 거짓말이 아주 술술 나왔다. 승현은 의아한 듯 눈썹을 한번 찌푸리더니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이진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다시 가방에 넣어 뒀다. 넣기 전에 제대로 비행기 모드로 설정되어 있는지까지 확인했다.
그 뒤로 의심하는 기색이 없는지 슬쩍 살펴봤지만 승현은 별다른 내색 없이 팝콘을 먹고 콜라나 빨면서 광고를 열심히 시청했다. 간간히 ‘저거 사면 어떨 것 같아요?’ 하고 묻는 소리에 건성으로 ‘돈 아껴 써.’ 하고 답했더니 이진이 이상하게 군다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다.
우선 큰 고비는 넘겼다. 이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되려는지 광고 대신 비상 대피로 안내 영상이 재생되었다. 수군대던 영화관 내부가 조용해지고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운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사라락, 익숙한 영화사 로고들이 스쳐 지나가며 오프닝 신이 시작되었다.
영화는 이미 한번 봤기 때문에 지루할 거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초반부터 흡입력이 강했다. 3년 전 기억이라 그런지 아예 처음 보는 것 같은 장면도 있었고, 이전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대사들이 새로이 이해되기도 했다. 결말을 알고 있기에 비로소 찾아낼 수 있는 은유나 암시를 속속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머지않아 깨져 버렸다. 시간이 좀 지나자 이진은 점점 좀이 쑤셔 오기 시작했다. 주변은 컴컴하고 선승현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정말 가만히 영화만 보고 있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진은 초조해져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승현과 함께 보니 더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가 옆에 있어서 도통 집중이 안 되었다.
반면 승현은 의외로 영화에 푹 빠져들었다. 힐끔 곁눈으로 관찰해 보니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이진이 어쩌고 있든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 뒤엔 이진의 시선을 눈치채고 잠시 눈웃음을 지어 줬지만, 그게 전부였다. 승현은 도로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했다.
[재밌어?]
이진은 승현의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다가 글자를 적었다. 숨을 죽여 웃는 건지 간지러움을 참는 건지, 어깨가 작게 들썩거렸다. 승현은 마찬가지로 이진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간질였다.
[네]
영화관만 아니었다면 한대 콩 때려 주고 싶었다. 다행히 이진의 노력이 무색하진 않았는지, 승현은 보다가 할 말이 생기면 이진의 손을 가져가서 손가락으로 끄적끄적하 글씨를 썼다.
[마지막에 남자가 죽으면 어떡하죠?]
[여자가 너무 상냥해요]
[저 남자 형 닮았어요. 눈이 소 눈망울 같아요]
이렇게 할 말이 많으면 단둘이 앉은 김에 조금 더 고개를 붙이고 속닥여도 될 텐데, 그런 건 일절 없었다. 이진은 내심 아쉬워하며 손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승현의 손가락을 느꼈다.
그리고 멍하니 생각했다. ‘아, 스포일러 하고 싶다.’ 남자 주인공이 죽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결국 승현은 찔끔 눈물을 흘리면서 나왔다. 관객의 절반 이상이 눈물을 줄줄 흘린 얼굴로 나온 것에 비하면 양호했지만, 선승현이 영화를 보다 울었다고 하니 참 믿기지가 않았다. 촉촉해진 승현의 눈시울에 반해 이진의 눈가는 몹시 메말라 있었다.
영화는 다시 봐도 감동적이긴 했지만 결말을 알면서까지 울 정도로 영화에 흠뻑 빠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슬며시 하품이 나와 버렸는데, 승현은 피곤한 듯 하품을 참는 이진을 보고 ‘형은 냉혈한이에요’ 따위의 소리를 지껄였다.
“저녁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아무거나 좋아.”
“그럼 잠깐 괜찮은 곳 검색 좀.”
승현이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안 돼!’
그가 핸드폰을 꺼내든 순간, 위기감이 이진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군더더기 없이 당장의 관심사로만 도배되어 있던 최근 검색어에 뜬금없이 기록되어 버린 ‘ㄱ’이 떠올랐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아직 이진의 수상한 행동이 기억에 남아 있어 도로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잠깐만!”
“네?”
이진은 급하게 손사래 치며 승현을 막았다. 그리고 근처 식당가를 아무 데나 가리키며 말했다.
“검색까지 할 필요 있어? 그냥 저기 가자. 맛있어 보이네.”
“샌드위치 집이요? 저녁으로는 좀 그렇지 않아요?”
“아니, 거기 말고 그 옆집.”
이진의 노력이 통했는지 승현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한 가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휴우…….’ 이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승현의 시선이 꽂힌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판에 붉은색으로 ‘레스토랑 스파이시’ 하고 적힌 글자가 선명히 눈에 박혔다.
“형, 매운 음식 좋아해요?”
이진은 매운 음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떡볶이보단 김밥을 좋아하고 비빔냉면보단 물냉면을 선호했다. 냉장고에 포장 김치가 떨어진 지도 오래됐으며 가난할 때면 주식이 되는 컵라면도 순한맛으로만 사다 먹는 사람이었다.
“응. 가끔 생각나지.”
그러나 승현의 질문에 이진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지 않은 척 강하게 말하는 제 주둥이를 철썩철썩 때리고 싶었다.
“물론 승현이 네가 못 먹는다면…….”
“저 잘 먹어요. 근데 형 합숙할 때 매운 반찬 먹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관찰력도 좋은 자식. 거짓말을 단숨에 꿰뚫린 이진은 이젠 또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그럼 저거 먹으러 가요.”
다행히도 추궁하려던 의도는 아니었는지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기운이 물씬 흐르는 레스토랑으로 발을 옮겼다. 이진은 철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따랐다. 한 번의 잘못을 덮기 위해 몇 겹의 거짓말을 두르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번 고비를 간신히 넘기긴 했지만 이진에겐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다.
“사천 라즈지 나왔습니다.”
“고추 만두 나왔습니다.”
“홍초 해물 짬뽕 나왔습니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세요.”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다. 데이트의 꽃, 오붓해야 할 저녁 식사 테이블 위에 매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붉은 음식들이 자리하게 된 것은 오롯이 이진의 잘못이었다.
“와, 형 진짜 먹을 수 있어요? 엄청 매워 보이는데요.”
승현이 작은 그릇에 짬뽕을 덜어 주며 물었다. 이진은 라즈지를 하나 집어먹고 물을 세 컵째 마시는 중이었다. 그런 이진을 흘끔대던 승현이 그나마 덜 매운 큼직한 새우와 주꾸미를 접시 가득 덜어 주었다.
고마웠지만 동시에 민망했기에 이진은 ‘오랜만에 먹었더니…….’ 하며 구질구질한 변명을 갖다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