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똑똑똑, 간결한 노크가 들렸다. 이진은 마침 단출한 옷장을 전부 뒤집어 가벼운 겉옷을 찾는 중이었다.
“형, 저 승현이에요.”
“응, 잠깐만……!”
“오래 걸려요?”
부드러운 물음이 재촉처럼 느껴져 이진은 결국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비친 것은 커다란 꽃다발이었다.
붉은빛이 탐스러운 장미가 틈 하나 없이 빼곡했는데, 못해도 백 송이는 되어 보였다. 또 어찌나 싱싱한지 한 송이마다 물기를 가득 머금어 싱그러운 기운을 가득 뿜어냈다.
“……어서 와.”
“실례할게요. 점심 먹었어요?”
“아니, 아직.”
승현은 여상한 태도로 장미를 이진에게 안겨 주더니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흰색의 깔끔한 린넨 셔츠에 밝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늘 반팔에 트레이닝팬츠 같은 캐주얼한 차림새만 보다가 당장 뮤직비디오라도 찍으러 갈 듯한 옷차림을 보니 괜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도 좀 만진 것 같은데…….’
이진은 힐끔대며 승현의 외모를 구경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꽃다발도 이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 송이의 붉은 장미 꽃다발은 다소 촌스럽긴 해도 흡족했다. 돈이 있으니까 대충 고민 없이 메꾸는 게 아니라 정말 정석대로 이진을 유혹하려 노력 중인 게 느껴져서 좋았다.
사랑의 색은 빨강이라던데, 강렬하고 뜨거운 색이 이진의 심장을 사르르 녹였다.
“우와, 집안 꼴이 이게 뭐예요? 유이진 정말…….”
그러나 분위기 깨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가진 승현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방 꼴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어떻게 말려야 꽃다발을 오래도록 예쁘게 보관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들려온 소리에 이진이 눈썹을 찌푸렸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러다 일순 지난번 그의 머릿속에서 방 꼴이 이게 뭐냐며 타박하던 현실 편 선승현이 떠올라서 불퉁하게 대답했다.
“네가 갑자기 온다고 해서 그렇지, 평소에는 깨끗하거든?”
“이거 겨울 옷 아니에요? 이게 왜 아직까지 나와 있어요?”
급기야 승현은 바닥에 꿇어앉아 널브러진 옷을 하나하나 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잠시 이 집에 살았을 때 살림살이에 손댔던 이후로 이진의 집을 제 영역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집주인은 좁은 방이 뒤집힐 정도로 힘내서 데이트를 준비했는데, 정작 승현에게서는 고백 전 설렘이나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하고 원통했다.
“그냥 내버려 둬!”
만나자길래 데이트하자는 건 줄 알고 열심히 옷을 찾았는데 말을 꺼낸 이가 대뜸 집 안으로 들어와서 청소나 하고 있으려니 맥이 빠졌다. 혹시 혼자만 김칫국을 잔뜩 들이킨 거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진이나 승현이나 이제 어엿한 유명인 반열에 들었으니 밖에 나가면 피곤한 일이 많겠지만, 기대했던 방향과 다른 전개에 이진은 우울해졌다. 오해한 것이 민망해서 장미만 만지작거리는데 순식간에 바닥 청소를 끝낸 승현이 옷장 문을 닫으며 물었다.
“밖에 비 올 것같이 조금 쌀쌀하던데 나갈 때 겉옷 하나 걸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어라, 나가는 거 맞나?’ 이진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깔끔해진 방 안을 보니 다시 한숨이 나왔다.
“찾고 있었는데 네가…….”
이진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자 승현도 대충 상황을 이해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진은 품 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승현이 이진의 앞을 서성이다가 결국 나란히 쭈그리고 앉았다.
“어차피 없어 보이던데 나가서 하나 살까요?”
“……어디 갈 건데?”
“우리 영화 보러 가요.”
로맨스 영화. 승현이 덧붙이며 씩 웃었다. 이진이 얼굴을 붉혔다.
영화관. 일상 속에서 무난히 쉽게 찾을 수 있고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체력적 부담이 덜하며, 상대방과 짧지만 즐거운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에 있어서 제법 가성비 좋은 데이트 장소이다.
무릇 로맨스 영화란 알콩달콩 사랑하다 때로는 티격태격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나도 연애 좀 해 볼까?’ 하는 생각을 심어 주고, 하이라이트인 키스 신에서 문득 옆에 앉은 상대를 의식하게 하는 훌륭한 매개체였다. 덤으로 영화관이라는 장소적 이점을 이용해 함께 팝콘을 먹다가 손이 스친다거나 은근슬쩍 깍지를 낀다거나 하는 사소한 스킨십도 시도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여가 생활에 돈과 시간을 크게 할애하지 않는 이진에게는 누군가와 영화관에 함께 간다는 자체가 몹시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는 순식간에 일이 진행됐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택시를 타고 근처 영화관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영화 시간표를 확인한 뒤 남는 시간 동안 지하 쇼핑몰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둘 다 모자나 마스크는 들고 오지 않았기에 우선 쇼핑몰 입구에서 검은색 챙이 넓은 면 모자를 하나씩 구입했다. 계산을 하는 직원을 비롯해 여러 명이 얼굴을 알아본 듯싶었으나 승현이 워낙 뻔뻔하게 굴어서 그런지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 달라고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형 얼굴이 너무 작아서 모자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아요.”
“……사이즈가 안 맞는다는 뜻이야?”
“귀엽다는 뜻인데요?”
한 손에는 유행 지난 벌집 아이스크림을, 다른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걸으니 별다른 화젯거리 없이도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어제 집에 갔더니 수빈이가 자기 방 벽에 형 사진을 다시 붙이고 있는 거 있죠. 원래 저랑 형 싸웠다고 기사 떴을 때 다 떼 버렸거든요. 근데 생방송 무대 보니까 형 말고는 사랑할 사람이 없다나.”
“나 꼴등 했는데?”
“그러니까 형이 더 빛나 보였겠죠. 하여튼 걔가 말하는 사랑이 뭔지, 참 웃겨요.”
“내 팬 비웃지 마. 그래도 너보단 나으니까.”
“형은 저한테만 너무 매몰차요.”
처음 먹어 보는 벌집 아이스크림은 아주 달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고작 엄지손가락만큼 벌집을 올려 주면서 이름이 벌집 아이스크림이라니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입 무는 순간 그 치명적인 단맛에 혀끝부터 입 안의 모든 미각이 마비되어 버렸다.
“얇은 카디건이 나은가? 여름 코트도 잘 어울릴 것 같고.”
“남방이 무난하지 않을까? 이거 어때?”
“푸른 계열도 괜찮긴 한데 형 분홍색 잘 어울리니까 이걸로 해요.”
“무대도 아니고, 분홍색 이제 그만 입을래.”
고작 이 정도의 달콤함에 정신을 못 차리다니 문제가 심각하다. 이진은 승현과의 데이트를 말하는 건지, 벌집을 말하는 건지 본인도 모를 생각을 하며 분홍색 카디건을 밀어 냈다.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결국 이진은 남색 남방셔츠를 선택했다. 실내 에어컨 바람이 쌀쌀해 사자마자 태크를 떼고 옷을 입었다. 품이 큰 셔츠는 이진의 늘씬한 체형과 반듯한 골격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승현은 잘 어울린다고 몇 번이나 칭찬했지만 이진은 어두운 색 때문에 체격이 본래보다 왜소하게 보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나 잠깐 거울 좀 보고 올게.”
“정말 잘 어울린대도.”
결국 이진은 거슬림을 참지 못하고 거울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승현은 불만스레 중얼거리다가 근처 매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이진은 화장실 안에 사람이 없는지 유심히 확인한 뒤 벽면의 전신 거울에 몸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단추를 채우지 않거나 팔을 걷어 보는 등 여러 가지 스타일을 시도한 끝에 만족스러운 코디를 완성했다.
‘가뜩이나 선승현 옆에 있으면 좀 작아 보이는데…….’
이진의 체감상 두 사람은 키나 체격은 비슷한 편이지만, 방송으로 확인했을 때 제법 큰 차이가 났다. 그간 승현 옆에 서면 평소보다 작아 보이는 게 내심 신경이 쓰였는데 옷 때문에 이 이상 차이 나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진이 만족스레 화장실을 벗어났을 때 승현은 맞은편 매장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데다 다른 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열 걸음은 더 멀리서 보는데도 한눈에 그가 일반인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늘 촬영장이 아니면 코앞에서나 보았지, 사복 차림의 승현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파가 가득한 공공장소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은 새삼 신선한 감상을 주었다. 마치 그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승현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아랑곳 않았다. 관심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철저한 무관심이 주변에 두꺼운 벽을 치는 것 같았다.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흘렀다. 덕분에 승현의 곁은 흘끔대는 시선으로 가득했지만 막상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진은 살짝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여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갔다.
“형.”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던 승현은 이진이 다가가자 기민하게 알아채고선 고개를 들었다. 이진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하게 미소 짓는 승현을 보니 심장께에 따뜻한 물이 찰랑이며 차오르는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 중 그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고양감이 차올랐다.
‘설마 또 이상한 거 검색해 보던 건 아니겠지?’
그러나 문득 그 물이 턱 끝까지 차올라 당장에라도 숨통을 막아 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삐끗하면 순식간에 깨어져 사라질 얇은 유리병 속에 담긴 행복이었다. 손에 쥔 사탕이 언제 녹아 사라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아이처럼 이진은 달콤한 행복을 마음껏 만끽할 수가 없었다.
“아, 맞다. 형, 저 이거 샀어요. 귀엽죠?”
승현이 크로스백에서 네모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구경하러 들어간 곳이 디자인 문구류를 파는 가게였다.
“이게 뭔데?”
“편지 쓰는 카드요. 열면 이렇게 돼지가 튀어나와요.”
승현이 직접 카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과연 조그만 카드 속에서 귀여운 아기 돼지 일러스트가 팝업 형태로 튀어나왔다. 이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승현은 또 다른 종이를 꺼내 들고는 다시 펼쳤다. 이번엔 종이 속에서 분홍색 꽃이 활짝 피어났다.
“이것도 귀엽죠?”
“그러게.”
“별로 안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아냐, 귀여워. 아기자기하고.”
솔직히 이진은 이런 팬시 문구류에 큰 감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승현이 이런 걸 좋아한다는 게 의외였다. 승현은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 산 건지 그 뒤로도 카드 여러 개를 차례로 꺼내어 보여 주었다. 곰돌이, 토끼, 나비, 4인 가족, 파도와 갈매기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형도 들어가서 하나 골라요. 제가 사 줄게요.”
고작 2천 원짜리 카드를 사 준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승현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진은 거침없이 발을 떼는 그를 따라가 카드 한 장을 골랐다. 승현이 고른 것처럼 튀어나오는 팝업 일러스트는 없지만, 맨 앞면에 비오는 날 우산을 든 어린아이가 그려진 카드였다.
“왠지 형이랑 잘 어울려요.”
“그래?”
“네. 이 어린애가 우산을 야무지게 들고 있는 게 꼭 형 같아요.”
“우산?”
이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으로 자세한 뜻을 묻자 승현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설명했다.
“심리 테스트 알죠? 그런 건데요.”
“너 그런 것도 좋아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림 검사에서 비 맞는 사람을 그려 보라고 하거든요. 그때 비는 스트레스를 나타내고 우산은 스트레스 속에서 나를 얼마나 잘 보호할 수 있는지를 의미한대요. 얘는 이 비 속에서 혼자서도 잘 버티고 있잖아요. 그게 형이랑 닮았어요.”
설명을 마친 승현이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이진은 가만히 손에 쥔 그림을 바라봤다. 제 몸보다 커다란 우산을 짊어지고 비를 피하는 어린아이는 몸을 오른쪽으로 돌린 채 웃지 않고 있었다. 쓸쓸한 그림이었다.
이진은 그가 혹시 자신의 외롭고 공허한 마음까지 고려하여 닮았다고 했을까 싶어 가만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런 그림을 골랐다고 망상증이 있다 생각하진 않겠지?’
다행히 승현의 얼굴에서는 이진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심이나 우울한 기질을 향한 동정이 엿보이지 않았다. 속내를 떠보려는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떠한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승현은 그저 보이는 대로, 느끼고 묻는 대로 답하며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충실히 즐기고 있을 뿐이다.
“아, 슬슬 영화 시작할 시간이에요. 이제 올라갈까요?”
승현이 다정하게 물었다. 이진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은 팝콘을 무슨 맛으로 사니, 오징어를 좋아하냐느니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며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이진은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별거 아니야. 지금은 눈앞의 일에만 집중해. 선승현은 별 생각 없는데 계속 넘겨짚지 마.’
이진도 이것이 그저 자신의 과민반응일 뿐이란 걸 알았다. 이만큼이나 깊이 사람을 사귀어 본 적이 없기에 반사적으로 나오는 방어 기제일 뿐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진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이 순간을 망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