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후우…….”
이진은 작게 숨을 내뱉고 입 안쪽 살을 꼭 깨물었다. 승현의 얼굴을 보니 다시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검색창을 실수로 훔쳐 본 일에 대해서는 캐묻거나 아는 척하지 말고 묻어 두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오늘 무대에서 안 좋은 결과를 받고 나니 승현과의 관계를 재고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선승현. 카메라 있는 데서 친하게 굴지 마.”
“왜요? 어차피 편집해 줄 텐데.”
“그냥. 내가 싫어.”
승현은 이진의 거부를 투정쯤으로 알아들었는지 별로 심각하지 않은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먼저 집에 가.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을 테고.”
“형, 많이 우울해요?”
이진의 변명을 툭 끊고 승현이 물었다. 그의 미간이 걱정으로 구겨져 있었다. 이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팀원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잘만 웃었는데, 승현의 앞에선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좀 피곤하네. 아까 무대 중에 당황도 많이 했고.”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예요. 오늘은 형이 제일 멋졌어요.”
“……그래도 오늘은 그냥 가서 잠이나 자야겠어.”
축 처져 위로를 듣고 나자 문득 그의 팀이 오늘 1등을 했단 사실이 떠올랐다. 다들 기뻐하고 있을 텐데 홀로 쏙 빠져나와 이진의 대기실 앞을 지킨 것일까. 그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참 고맙고 기특했다.
“너는 기분 좋은 날일 텐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형이 우울한데 제가 어떻게 기분이 좋겠어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지금은 사적인 상황이니까 괜찮아요.”
아무리 사람이 빠져 한산하다지만 방송국 복도 한가운데에서 사적인 상황이라니. 조만간 카메라를 수거하고 다음 촬영을 준비하러 올 스태프들로 북적해질 곳이다. 승현도 모를 리 없는 사실인데 그의 능청에 자꾸 미소만 나왔다.
“형, 이거 제가 정말 가져도 돼요?”
승현이 제 손에 쥐여진 꽃다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진은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데에 마이크가 떡하니 박힌 소품인데 저게 그렇게 갖고 싶을까,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 냈다.
“그럼 보답으로 제가 내일 더 예쁜 꽃으로 가져다드릴게요.”
“뭐?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집에 가면 어디 구석에 짱 박혀 있다가 버려질 꽃이었다. 승현이 가져간다면 차라리 좋았다. 이진이 그럴 필요 없다고 여러 번 만류했으나 승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일 형 집 앞으로 갈게요.”
단정 짓는 어투에 이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승현은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같이 가기 싫다고 하니 저 먼저 갈게요. 꼭 택시 타고 가요.”
“알았어. 너야말로 조심해서 들어가.”
“누가 누구를 걱정해.”
승현이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이진은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불쑥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잠깐만!” 하고 외치는 소리에 승현이 자리에서 멈춰 뒤돌아봤다. 이진은 우물쭈물 하다가 진심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승현아, 오늘 1위한 거 축하해.”
“……고마워요, 형.”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승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크게 휘어졌다. 방금 전까지는 옆집 애가 받아쓰기에서 1등을 받아 왔단 소식을 접한 것처럼 시큰둥하게 굴어 놓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기쁘게 웃는다. 시원시원한 웃음이 보기 좋아 이진도 따라 환하게 웃었다.
“좋은 꿈 꿔요.”
승현은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자리를 떠났다.
***
늦은 시간, 모두를 먼저 보내고 홀로 집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우선 이진의 퇴근길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한동안 사진을 찍어 주어야 했다. 또 가까스로 팬들에게서 벗어난 뒤 콜택시를 불렀으나 하필 바쁜 시간대와 맞물렸는지 몇 번이나 예약이 취소되었다.
이진은 결국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평소엔 배차 간격을 신경 쓴 적이 없을 정도로 자주 보이던 버스는 20분이 넘게 기다려도 올 생각을 안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익숙한 색깔의 버스가 느릿느릿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진은 버스를 기다리느라 쭉 빼내었던 목을 도로 집어넣고 겨우겨우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듬성듬성 빈자리가 많아 적당히 구석진 곳에 앉아 유리창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다.
“혹시…… 유이진이?”
막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이진을 알아보고는 덕담을 해 주기 시작했다.
인생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시작되는 법이다, 이별의 아픔을 아는 사람이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은 없다 등등. 물론 좋은 말이었지만 종일 촬영장에서 시달렸던 터라 이진은 당장 휴식이 필요했다.
현재 그의 가장 큰 시련은 아직까지도 텔레포트 기계가 발명되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이진의 피로한 기색을 느꼈는지, 아주머니가 뒤늦게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어휴, 내가 주책맞았지?”
“아. 아니에요.”
“나도 유이진 씨 만한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그런지 유이진 씨가 꼭 잘됐으면 좋겠어. 꼭 내 자식 같아서 그래.”
덧붙여진 말 때문에 짧은 휴식을 방해한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게 되었다.
“계속 자랑스럽게 여기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정하게 건넨 마음이 자신의 피로감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이진은 남은 체력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 상냥한 한마디를 보탰다. 별것 아닌 말에도 눈물을 글썽이는 아주머니를 보며 새삼 자신의 말 한마디가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실감됐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버스가 마침 정류장에 멈춰선 틈을 타 이진은 대답을 듣지 않고 버스에서 내렸다.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마음에 어딘지 제대로 확인도 못 했다. 등 뒤로 고맙다는 인사말이 들려와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버스가 떠난 뒤 주위를 둘러보자 다행히도 익숙한 거리였다. 이진은 씩씩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세 정거장 정도만 걷자.’
고생 끝에 집에 도착한 이진은 곧바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뜨거운 물에 푹 지져진 몸을 차가운 이불 위로 뉘이자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무거운 눈을 꿈뻑이며 바닥을 더듬어 어딘가에 던져져 있을 핸드폰을 찾았다.
[윈올 생방송]
이진은 타닥타닥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했다. 그리고 검색 결과를 상단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어디선가 승현과 미열의 목소리로 ‘이런 거 읽는 거 아니랬지!’ 하는 호통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한 시간 가량을 훑어보았지만 이진의 첫 꼴지에 대한 반응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그의 팬들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기가 막힌 상황에 분통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은 팀별 순위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생방송 중 실수를 어이없어하는 글이 종종 커뮤니티 내 인기 글에 오르긴 했지만, 그만큼이나 이진을 불쌍히 여기는 제목들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실수를 한 이후론 계속 표정이 굳어져 있었음에도 태도에 대한 여론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진이 우스운 실수를 웃음거리 취급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긍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휴우…….”
오늘 무대가 그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기분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별것 아닌 일에 옹졸하고 치사하게 구는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이진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다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얘들아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 사소한 실수에는 연연하지 말자. 편히 쉬고.]
결국 팀원들에게 다시 한번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뭔가 착하고 너그러운 일을 한 뒤 착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팀원들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아 다시 우울해졌다.
‘이런 예의도 개념도 없는 놈들.’
이진은 속으로 팀원들을 욕하며 핸드폰을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
다음 날 이진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7시 무렵에 잠에서 한번 깨어났다가 눈이 잘 떠지지 않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웅크렸는데, 까무룩 잠이 들어 그대로 몇 시간을 훌쩍 보내 버린 것이다.
잠꼬대도 하지 않았는지 잠들었던 모습 그대로 깨어났다. 아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 자세로 숙면한 탓에 어깨와 등 근육이 욱신욱신 쑤셔 왔다. 오랫동안 푹 잔 덕분에 오히려 눈은 말똥해졌다.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지개를 편 뒤 창밖을 바라보자 하늘이 어두운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눅눅하더라니.’
이진은 잠시 그대로 멍하니 누워 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고 싶었다. 애초에 이렇게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날이 드문 만큼 몹시 소중했다. 가능하다면 숨조차 쉬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강박감이 이진을 편히 쉬게 놔두질 않았다.
‘어제 그 꼴을 겪고도 퍼질러 누워 있고 싶냐!’
머릿속에서 울리는 호통에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더듬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정오는 이미 훌쩍 넘었고, 1시보다도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기에도 늦었으니 적당히 라면으로 때우고 오랫동안 손을 놨던 작곡 작업이나 마저 할까 생각했다.
그때, 지이잉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형 저 3시에 갈게요. 전화하면 나와요.]
그러고 보니 어제 승현이 답례를 주러 오겠다는 둥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진은 잠시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승현을 향한 감정이 아직 채 정리되지 않아 허공을 맴맴 부유했다.
‘아마 오늘 고백하겠지?’
마침 4라운드도 끝났겠다,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감도 유지 중이겠다. 그의 생각에 고백을 하기에는 지금이 딱 적기인 것 같았다. 그간 눈치를 줬으니 이번에도 모른 척 지나가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진의 마음은 먹구름 낀 하늘처럼 불투명했다. 그때의 검색어도 그렇고, 승현과 사귀게 된다 해도 평화롭고 즐거운 나날이 예정돼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현상 유지라도 하는 게 나았지 않을까,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받아야지.’
승현이 고백을 한다면, 받아들이는 게 도리에 맞다. 고요한 호수 같던 승현의 마음을 파도치는 바다로 바꾸어 놓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다. 아무리 마음이 심란해도 묻어 두기로 했다면 깔끔히 잊고 책임을 져야 한다.
이진은 굳게 결심하고 답장을 입력했다.
[알았어.]
세 글자 뒤에 마침표 하나를 콕 찍고 나니 데이트를 수락하는 내용의 답장으로는 너무 딱딱한가 싶었다. 괜히 마음속 결연한 각오가 너무 티 나는 것 같아 뒤에 웃음 이모티콘을 붙이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진은 엄지손가락을 부들부들 움직여 꾹 답장 버튼을 눌렀다. 후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잠깐, 지금 몇 시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2시 10분이었다. 준비할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것이다.
‘오늘은 완벽해야 하는 날인데.’
쿵 하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에 조금의 오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진은 헐레벌떡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