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35화 (135/173)

135화

“어, 안녕하세요.”

대선배의 등장에 다 같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해인이 손을 흔들며 만류했지만 보는 눈도 많고 분위기 상 인사를 안 하고는 베길 수가 없었다.

이진은 대체 그가 왜 이진에게 꽃다발을 들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흘끗 곁눈질로 바라보자 승현은 강해인의 존재가 신기한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쁜 생방송 중에 이렇게 찾아와서 정말 미안해요. 다름이 아니라 저도 촬영 중이라서요.”

해인이 양해를 구하며 빠르게 설명했다. SSTV 채널에서 조만간 시청자들에게 새로이 선보일 예능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할 단발성 게스트를 구해야 하는데, 마침 이진이 떠올라서 물어봤더니 가능하단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촬영 시작일은 윈올 최종회 방영 이후지만 사전 촬영 일정이 빠듯해 어쩔 수 없이 지금 오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의 말대로 해인의 뒤에는 윈올이 아닌 다른 방송의 카메라가 따라붙어 있었다. 해인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이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다시 한번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 상황을 신기하게만 지켜보던 승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진 씨, 제 프로포즈를 받아 주실래요?”

“프로포즈요?”

“이게 프로그램 컨셉이에요. 결혼식 축가 불러 주는 게 주 활동이라. 하하하.”

이진이 조금 질색하는 기미를 보이자 해인이 재빨리 해명했다. 그는 별 이상한 컨셉이 다 있다 생각하며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꽃다발 자체도 방송국에서 준비한 소품인지 꽃다발 심지에 마이크가 박혀 있었다.

“유이진 씨, 그럼…….”

“선승현 씨, 이우진 씨, 제이슨 씨! 다음 무대 준비하실게요!”

마무리 멘트를 치려는 찰나, 뒤쪽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렸다. 멀뚱히 이진의 곁에 서 있던 승현은 그제야 메이크업을 수정받기 위해 이동했다. 사람이 다 빠져나가자 해인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이진 씨, 그럼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컨셉이라고 해도 그렇지 뉘앙스가 참 이상하게 들렸다.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하려고 하다가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어 곧장 답하지 못했다.

“단발성 게스트라면 파트너가 아니라 계약직에 가깝지 않나요?”

“이진 씨, 혹시 고정 자리 노려요?”

“아니요! 파트너 말고 계약직으로 할래요. 사장님이랑 아르바이트생.”

이진이 컨셉 수정을 요구하자 해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 씨는 정말 사차원이라니까? 제가 또 그 매력에 퐁당 빠지고 말았지만요.”

해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에 팔을 걸쳤다.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한 채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자 촬영이 종료되었다.

“갑작스런 촬영에도 성실히 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좋은 기회와 함께 먼저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메라맨과 이진이 서로 인사를 했다. 해인은 이제 막 시작된 승현의 무대를 잠시 감상하다가 이진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도 방송 중에는 사이 나쁜 척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정말요? 저 친구 눈빛이 수상하던데…….”

그러고는 어딘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진은 그의 말을 더 곱씹어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렸다.

총 5개의 무대가 모두 끝난 뒤 팀별 순위 발표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 팀별 순위는 관객 호응도와 멘토 평가, 그리고 생방송 문자 투표수를 통해 집계되었다. 데뷔 여부를 판가름 짓는 무대도 아니었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문자가 도착했다. 만 단위를 가볍게 넘어가는 숫자가 전광판에 떠오르자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1위를 한 팀은 핑크반의 댄스 팀. 바로 승현의 팀이었다. 저절로 핑크반의 보컬 팀이 2위를, 블루반의 댄스 팀이 3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4등은 블루반의 보컬 팀이었다.

그러니까, 이진은 이번 라운드에서 팀 점수 꼴등을 하게 된 것이다.

꼴등이라는 단어는 이진에게 크나큰 충격을 줬다. ‘여차하면 솔로 데뷔’의 여차하면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처럼 외우던 문장이 진지하게 다가왔다.

이진은 상위권이기 때문에 팀 점수가 최종 순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개인 투표수가 비슷할 경우 위아래로 한두 칸 정도나 움직일 정도이지, 팀 점수를 못 받았다고 해서 치명타를 입을 시기는 지났다. 그럼에도 이 지긋지긋한 팀플레이의 굴레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뭘 하든 평균 이상은 했던 이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었다. 2라운드에서는 5등이었지만 전체 순위로 따지면 딱 중간이었는데, 이번엔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마지막 등수였다.

‘내가 가장 못했다니, 말도 안 돼!’

이진은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골이 띵하고 울려 왔다. 혼몽한 정신 속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흘러나왔다. 생방송 중에 같은 팀 멤버가 멀쩡한 가사를 ‘네 앞에서 벗어 볼게’라는 선정적인 가사로 바꿔 부른 초유의 실수가 벌어졌다.

‘이게 악몽이 아니라면 뭘까. 현실?’

‘꼴찌’라는 글자가 이진에게 꼬리표가 되어 따라붙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에게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반성하고 다음번에 잘해 보자 다짐이라도 하겠지만, 이진의 실력이나 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걸 수포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내 탓인가? 내가 내 일로 바빠 팀장으로서 애들을 신경 써 주지 않아서?’

하지만 불쑥 ‘근데 쟤넨 나 빼고 단톡방도 만들었는데 대체 뭘 더 신경 써 주지?’ 하는 억울함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굴었던 주제에 무슨 염치로 실수를 하는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잠시 잊고 있던 분노도 되살아났다. 이진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결과를 떠안아야 한단 게 진저리가 날 만큼 싫었다.

어쩌다 보니 팀플레이를 하고 있긴 하지만, 자타 공인 이진은 솔로일 때 가장 빛나는 선수다. 개성도 재능도 노력도 감히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닌 윈올이었기 때문에 이진의 실력이 오히려 묻힐 때가 많다는 것을 다른 참가자들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까 늘 한수 접어주며 저들 나름대로 대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우는 결국 소외감이 되어 돌아왔고, 이진은 또 의미 없는 자책만 반복할 뿐이었다.

“괜찮아. 우리가 열심히 했단 건 다들 알아봐 주실 거야.”

하지만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요동치는지와 상관없이, 이진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마찬가지로 상심한 팀원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가 전부였다.

사회자 역을 한 홍서는 이진에게 팀 점수에 대한 소감을 물어봤다. 당장 혼이 빠져나가려는 그에게 꾸역꾸역 마이크를 들이밀다니 그도 참 프로 정신이 투철했다.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무대에서는 부족한 모습을 보여 드려 많이 아쉽지만, 다들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을 때, 이진은 사람 다리가 이렇게까지 후들거릴 수 있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간신히 볼썽사나운 꼴 보이지 않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그제야 그의 뒤에 선 멤버들이 보였다.

“너무 걱정 말고, 응? 편집 잘 해 주시겠지.”

“그렇겠지? 하하…….”

강희와 지흔, 진연은 그나마 웃으려고 노력이라도 했으나 실수를 한 당사자인 희영과 준현은 거의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진이라도 제대로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다음 스케줄을 수행하지 않고 다들 잠수를 타 버릴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직 대기실에는 녹화용 카메라가 꺼지지 않은 채였다.

“우선은 집에 가서 푹 쉬고. 다음 촬영 때 보자.”

“응. 형도 푹 쉬어.”

그렇게 팀원들을 격려하며 먼저 돌려보냈다.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복도에서 제 분에 이기지 못한 준현의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가만히 뒷목을 주무르며 그들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집에 갈 채비를 할 수 있었다.

‘……피곤하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해서 그런지 유난히 눈꺼풀이 뻑뻑했다. 이진은 4라운드 의상을 반납하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팀원들이 옷도 갈아입지 않고 떠나버렸단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가지고 가서 세탁을 해 오든 지금 반납하든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피로에 못 이겨 은연중 타인에게까지 퇴근을 재촉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진의 짐 위로 꽃다발이 보였다. 생방송 중간에 나타난 강해인이 촬영 차 주고 간 소품이었다. 바쁘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어딘가에 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누가 따로 챙겨 뒀던 모양이다.

촬영용 소품이면 그냥 해인이 도로 들고 가는 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정말이지 사람이 피곤하면 별게 다 귀찮아진다. 이진은 어쩔 수 없이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형. 왜 이렇게 늦게 나와요?”

벌컥, 문을 열고 나가자 승현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봤는데, 순간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치는 바람에 이진은 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선승현, 너 집에 안 갔어?”

“어떻게 형을 혼자 보내요. 기다린다고 문자했는데 못 봤어요?”

이진은 뒤늦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뒤적이며 문자를 확인했다. 승현은 고개를 픽 돌리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연락 안 되기로는 무슨 할아버지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뭐.”

“됐어요. 형 기분 안 좋을 것 같아서 걱정돼서 온 건데.”

승현의 시선이 흘끗 아래로 내려갔다.

“꽃다발도 받고.”

“이건 촬영하면서 받은 거 알잖아.”

“그래도.”

슬금슬금, 승현의 고개가 이진에게 조심스레 기울었다. ‘설마, 여기서?’ 짧은 생각이 스치는 찰나였다. 바스락 비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제가 가질래요.”

“어?”

잠깐 방심한 사이 꽃다발을 빼앗겼다. 이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승현이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꽁 부딪쳤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선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진은 민망한 기분이 들어 괜히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