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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34화 (134/173)

134화

대망의 생방송 날이 밝았다. 참가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버스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참가자들이 방송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무대가 설치되기도 전이었는데 벌써부터 문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선 이유가 윈올 공방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저렇게 간절히 이진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부담감에 가까운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이번엔 단순히 공개 방송일 뿐 아니라 생방송이기까지 해 리허설 과정이 몇 배는 꼼꼼했다. 그에 반해 무대 준비 기간은 짧았기에 실수가 여러 번 발생했다. 삑사리가 나거나 스텝이 꼬이는 실수는 애교로 봐주겠으나 가사나 동선 실수는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연속된 실수는 결국 리허설을 지켜보던 멘토단이 한마디를 하게 만들었다.

“100명이 넘는 참가자들 틈에서 살아남은 만큼 여러분한테 기본 실력이 부족하단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실수는 순전히 정신 상태가 해이해졌기 때문이에요. 합숙 기간 동안 정말 고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놀았던 건 아니겠죠?”

“여러분, 이거 관객분들과 함께하는 생방송이에요. 장기 자랑 봐 주려고 팬분들이 이 꼭두새벽부터 밖에서 줄 서고 있는 줄 알아요?”

조곤조곤 매서운 말에 참가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은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지만 정신이 살짝 해이해진 건 맞았기 때문에 멘토의 훈계를 뼈에 새길 기세로 진지하게 들었다. 반면 카메라가 앞에 있는데도 표정 관리를 못하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나서 재차 리허설에 들어갔을 땐 다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진 팀에선 오히려 생방송의 압박감 때문에 오히려 더 실수를 하는 멤버가 생기고 말았다.

“희영아, 진정 좀 해 봐. 괜찮아?”

“아…… 미안해.”

미열이 희영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그는 지금 좌변기에 얼굴을 대고 토악질을 하는 중이었다. 먹은 게 없어 나오는 것도 없는데 심리 상태 때문인지 자꾸 구토감을 호소했다.

희영은 윈올 이전 참가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인 케이팝 뉴비즈의 톱 10 생방송 무대에서 큰 실수를 하고 탈락했던 과거 때문에 미약한 무대 공포증이 있었다. 실력은 좋지만 순위가 지지부진한 것도 무대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못했기 때문이 컸다.

그런 희영에게 생방송 직전 멘토의 질책은 큰 악영향을 미쳤다.

“돌겠네…….”

“준현아, 왜 그래.”

“아니야. 그냥 착잡해서.”

거기다가 같은 팀인 박준현은 대놓고 희영이 아니꼬운 티를 냈다. 지흔이 몇 번 눈치를 줬지만 아랑곳 않고 대놓고 큰 한숨을 쉬거나 ‘망했네, 망했어.’ 하며 초치는 소리를 서슴없이 했다.

“박준현. 입 안 다물어?”

결국 리더인 이진이 준현에게 한소리를 해야만 했다. 준현은 이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큰소리를 듣고 다른 참가자들이 다가오자 몸을 사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는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리허설과 참가자들 간의 기 싸움에 지치다 못해 탈진하기 직전, 드디어 이진 팀이 무대에 올랐다.

“이번 무대는 블루반의 매력 넘치는 보컬들이 선사하는 달콤 쌉싸름한 이별의 아픔, ‘굿바이 블루’입니다.”

불이 꺼진 무대에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며 가운데에 선 이진을 시작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일렬로 선 멤버들을 차례대로 비췄다. 빈티지한 디자인의 스탠드 마이크를 쥔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열렬한 환호성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서로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싸움뿐이야.”

이진이 여유롭게 첫 소절을 뗐다. 비명과도 닮은 함성들이 인이어를 뚫고 고막을 울렸다. 함성이 잦아들기 무섭게 관객석에서 이진의 이름과 함께 미리 준비한 듯한 응원 구호를 연호했다.

“내가 널 위해 떠나야 할까. 내가 떠나 줄까.”

리드 보컬 자리는 결국 미열이 차지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진과 여러 번 무대를 함께해 본 경험 덕에 합을 맞추기가 더 쉽다는 점이 고려됐다. 지흔은 많이 아쉬워했지만 그 아쉬움을 연습으로 풀어냈다.

“Goodbye, blue.”

“이별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화음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진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인 화음을 찢고 올라갔다. 소름 돋는 가창력에 무대를 지켜보는 모두가 전율을 느꼈다. 이진은 힘든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돌려 미열과 지흔을 번갈아 보며 다음 퍼포먼스 타이밍을 맞췄다. 멤버들끼리 눈이 마주치는 모습 하나하나가 생생히 담겨 송출됐다.

“너에게 모든 걸 줬으니 후회는 없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래.”

이진의 신호에 맞춰 멤버들이 동시에 스탠드 마이크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그리고 곧장 마이크를 훌쩍 뛰어넘어 무대 끄트머리 관객석 쪽으로 달려갔다. 반전 연출 덕분에 무대 시작 때보다 함성 소리가 커지고 그에 맞춰 멤버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Goodbye, blue.”

“아마도 푸른 눈물 흘리겠지.”

노래는 점점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관객석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멤버들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발을 굴러 넘어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제히 마이크를 세웠다. 가장 핵심적인 퍼포먼스라 여러 번 연습했던 구간이었다.

연습 때는 물론이고 리허설 때도 이 부분에서 가장 실수가 많이 일어났다.

“앗!”

아니나 다를까 희영이 마이크를 놓쳤다. 다행히 떨어트리진 않고 어깨로 받아 내긴 했지만 안 그래도 계속 불안에 떨던 희영에게는 한 번의 실수조차 몹시 치명적이었다. 문제는 희영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널 잊어 볼게.”

“너 앞, 아 벗어 볼게.”

희영의 실수에 놀란 준현이 정신을 팔고 있다가 ‘이 아픔을 벗어 볼게’라는 가사를 ‘네 앞에서 벗어 볼게’처럼 발음하고 만 것이다. 지흔과 강희가 깜짝 놀라 준현을 바라본 탓에 실수 수습이 더 어려워졌다.

“슬픔은 잠시니까 보내 줄게. Goodbye, blue.”

준현은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불안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본인의 실수를 뼈아프게 체감했는지 마지막 소절을 부른 뒤 무대를 마무리할 생각도 못하고 쫓기듯이 계단을 내려왔다. 지흔은 너무 당황한 탓에 소품인 스탠드 마이크를 그대로 질질 끌고 내려왔다.

우왕좌왕 무대 뒤로 들어가자 대기 중이던 참가자들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싸늘했다. 생방송 중에 큰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으니 당연했다.

지척에선 카메라가 그들을 촬영하고 있었으나 이진은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은 관객들이 공연 열기에 취한 덕에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만 집에서 가사와 함께 보고 있을 시청자들이 문제였다.

‘큰일 났다.’

이건 정말 수습이 불가한 실수였다. 한동안 인터넷 커뮤니티를 후끈 달구며 몇 번이고 회자되지 않을까. 늘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이진은 이제까지 무대에서 훌륭한 활약을 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행보에 큰 오점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일 화가 나는 점은 곧바로 퍼플반 무대를 준비하러 가야 해서 화내고 있을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필 방금 전 엄청난 실수를 벌인 준현과 함께하는 무대라 아예 없던 일인 척 잊을 수도 없었다.

“형, 수고했어요.”

승현이 다가와 이진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핑크반 반장이자 댄스 팀 센터 선승현이다. 이진과 완벽한 대칭을 이룬 라이벌이란 뜻이다. 위로를 맘 편히 받을 수가 없었다.

이진은 재빠르게 메이크업을 수정받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번엔 무대에 보랏빛 조명이 가득 깔려 있었다.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진의 등 뒤로 승현이 서고 양옆으로는 임채일과 박준현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 번만 참자. 한 번만.’

이진은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니 지나간 일에 미련 두지 말고 용서하는 게 차라리 정신 건강에 이롭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동료의 실수를 비웃고 조롱하던 놈이 생방송 무대 절정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면 용서고 나발이고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어지는 게 보통 사람의 심리 아니던가.

‘이걸 어떻게 참아.’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서 박준현, 임채일, 남주헌과 함께 무대를 하려니 맥이 빠지고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이진은 잘해 봤자 남들이 점수를 깎아 먹고, 더 열심히 하면 맘에 안 드는 놈들이 덕을 보는 구조가 정말 짜증 났다.

속상함을 눌러 담으며 정신을 다잡는 사이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 응어리진 마음을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진은 그 순간 완벽히 사랑에 빠진 소년 그 자체였다.

“너의 블루와 나의 핑크를 합쳐.”

꿇어앉은 세 명이 팔을 나란히 들어 올렸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손짓에 그들 뒤에 선 네 명도 부드러운 동선으로 손을 움직이며 오묘한 춤사위를 만들어 냈다. 마치 밀려온 파도가 모래사장에 섞이는 듯한 모양새였다.

“It’s time to be a purple, purple.”

“우리의 사랑은 purple love—”

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형 정중앙으로 이동했다. 이번 무대는 분홍색과 하늘색이 섞이는 듯한 손동작이 포인트 안무였다. 왼손과 오른손을 서로 엇갈려 돌리며 톡톡 튀는 박자에 맞춰 주먹을 두 번 쥐었다 펴는 동작이 깜찍했다.

“너의 우울을 나의 사랑으로 녹일게. 꼭 하나만 정답인 건 아니잖아.”

몸을 왼쪽으로 돌리며 살짝 비켜서자 이진의 뒤에서 승현이 걸어 나오며 노래했다. 밝은 멜로디의 댄스곡인 탓인지 졸린 듯한 평소 목소리보다 몇 배는 감미로웠다.

“어우러지는 우리의 마음, 새로운 빛으로 물들어 가는 거야.”

“우리는 망쳐지지 않아. 섞일수록 선명한 색으로 빛날 테니까.”

승현은 자리를 이동하다가 이진과 눈을 마주치고는 아닌 척 슬며시 한쪽 눈을 깜빡였다. 누구는 화나 죽겠는데 혼자서만 여유부리는 태도가 짜증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이진이 못 말린다는 듯 미소 짓자 화답하듯 더 환히 웃어 왔다.

“Red, Orange, Yellow, Green.”

“What's your favorite color?”

이번엔 다 같이 번갈아 가며 대화하듯 랩을 하는 파트였다. 간단한 영어 문장으로 된 애교 있는 가사가 노래에 톡 숨을 불어넣는 매력적인 소절이었다. 그러나 이진은 이 부분을 노래 같지도 않고 민망하기만 하다며 썩 좋아하지 않았다.

“Black and White? Pink or Blue?”

“Oh, I think I know the answer.”

우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묻자 승현이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진은 그사이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다음 동선으로 이동했다.

“너의 블루와 나의 핑크를 합쳐.”

다시 센터 자리에 선 이진이 손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왼손으론 분홍색 페인트를, 오른손으론 파란색 페인트를 들고 와 서로 부딪힌 뒤 페인트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안무였다.

“It’s time to be a purple, purple.”

“우리의 사랑은 purple love.”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보여 준 뒤 전구가 깜빡이듯 손을 쥐었다 펴는 단순한 동작이 이어졌다.

“그러니 내 손을 잡아 봐.”

피날레는 메인 보컬인 승현의 고음부였다. 승현은 듣는 이가 놀라울 만큼 쉽게 기존 음역대를 뚫고 고음을 내질렀다. 본래 그는 안정적인 중저음이 매력점이자 강점이었는데 그사이에 이렇게 또 실력이 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선명한 purple.”

오른쪽 뺨 위에서 두 손을 교차시키는 동작을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났다. 이번에는 무대에서 내려오기 전 몇 번이나 크게 인사를 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시간적 여유보다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심적인 여유가 컸다.

“무대 잘 봤어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누군가 이진을 향해 불쑥 꽃다발을 건넸다. 받지 않고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시티 로열의 강해인이 이진에게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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