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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32화 (132/173)

132화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긴 했지만 학부모 상담 코너에서는 모든 참가자들을 한 번씩 꼭 비춰 주었다. 찬우 어머니가 병중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다는 것과 제이슨의 가족들이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들여 한국에 온 사연이 감동적으로 다뤄졌다.

특히, 제이슨은 오랜만에 본 가족들 앞에서 평소 재수 없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벗고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그 뒤로 퍼플반 선발 게임이 이어졌다. 이진이 노래하면서 베개를 휘두르는 장면은 제법 높은 퀄리티의 CG가 사용되어 모두의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 유이진 진짜 웃기다.”

누군가의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이진도 기분 좋게 웃었을 테다. 이진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예민한 건가 싶어 굳이 파헤치지 않기로 했지만 찝찝한 기분은 방송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참가자들이 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에 오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찍어 놓은 다음편이 없다 보니 미 방영분 영상 클립들이 예고편을 대신했다.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늦었다. 다들 일찍 들어가서 자자!”

파장 분위기가 되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랜만에 일탈을 누린 만큼 많은 쓰레기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익살맞은 참가자들이 벽에 설치된 카메라들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할 때, 잇속이 빠른 참가자들은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청소했다.

이진은 잘 보이기 위해 청소를 할 마음까지는 들지 않아서 자신이 손 댄 과자 봉지들만 적당히 정리했다. 이진 대신 쓰레기를 버려 주려던 승현은 봉투를 들고 다른 참가자들의 쓰레기마저 수거하러 다녀야 했다.

아까 들은 말이 신경 쓰여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먼저 자리를 뜬 사람이 없어 이진도 자리를 지켜야 했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분리수거를 위해 모아 둔 종이 박스들을 납작하게 펼치기 시작했다. 직육면체의 상자가 수학 시간에나 보던 전개도 모양대로 펼쳐지는 걸 보니 묘하게 심신에 안정이 찾아왔다.

“어? 형, 그냥 계세요. 제가 할게요.”

그때 이진의 뒤에서 불쑥 손이 뻗어져 나왔다.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참가자 장조근이었다. 조근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상자들을 빼앗아 갔다. 이진의 발치에 꿇어앉아 요란하게 박스를 정리하는 모습이 부산스러웠다.

“같이하지, 뭐.”

“아니에요. 그냥 앉아 계서도 되는데 뭘 굳이 이런 것까지 해요. 형은 이미 충분히 불쌍한데.”

이진이 그의 곁에 나란히 꿇어앉자 나지막한 빈정거림이 귓가에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먼저 얼굴에 화악 열이 몰렸다. 고개를 들고 조근의 얼굴을 바라보려 할 때 승현이 이진의 어깨를 잡아챘다.

“이진이 형, 쓰레기 버리러 같이 가요.”

“아, 알았어.”

표정을 보아하니 조근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조근은 “여긴 제가 맡을게요.” 하고 말하며 두 사람을 쫓아냈다. 이진은 승현의 품에서 쓰레기 봉지 하나를 빼앗아 먼저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형?”

타박타박, 승현이 뒤를 따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진이 바쁘게 자리를 피하자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진은 기다리지 않고 앞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장조근의 비아냥거림에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승현의 얼굴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형, 같이 가요!”

그를 붙잡는 목소리도 무시한 채 빠르게 걸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승현이 몇 번 더 불렀지만, 이진은 복도 끝 쓰레기통에 봉지를 쑤셔 넣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나 좀 그냥 혼자 있게 해 주면 안 될까?”

“역시 무슨 일 있었죠.”

이진의 부탁에 승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진은 고개를 숙인 채 승현을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은 잠시 거리를 두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일은 무슨.”

승현이 왼손으로 어깨를 감싸왔지만 이진은 팔을 움직여 손을 떨쳐 냈다.

“조금 심란해서 그런데, 제발 좀 혼자 있게 해 주라.”

“방송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요?”

“네가 뭔데 자꾸 아는 척이야. 그냥 좀 가라면 가라.”

쌀쌀맞은 목소리는 이진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정작 모진 말을 들은 승현은 얌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팔을 붙잡고 그를 계단 밑으로 끌고 갔다. 카메라는 물론 사람들의 눈에도 쉽게 띄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그리고 층은 다르지만 이진과 승현이 처음 입을 맞춘 장소이기도 했다.

“또 이런 식으로 사람 밀어내려고 하죠.”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이래 놓고 역시 나랑은 뭐가 안 맞는다는 둥 못 믿겠다는 둥 핑계 대면서 멀어질 거잖아요. 뭐가 맘에 안 들면 그냥 말해 주면 안 돼요? 형이 말을 안 해 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승현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이진의 정곡을 찌르기도 했다. 이진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전하지 않으면 승현은 모른다. 이진이 가진 불안을 승현에게 전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승현에게 자신이 망상증이 아니라 설명하는 일은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종이 버리는 데 어디지?”

“이쪽이다.”

그때 한 무리의 참가자들이 두 사람이 숨은 쪽으로 걸어왔다. 이진과 승현은 동시에 숨을 멈추고 기척을 죽였다. 다행히 둘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듣는 귀를 의식하는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대화를 나눴지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대화 내용이 선명히 들려왔다.

“존나 빡치게 걔는 왜 부모도 없고 난리냐.”

이진은 잠시 무슨 말을 들었나 곱씹어 보았다. 설마 저게 자신을 겨냥한 말인가 생각이 들기도 전에 승현이 먼저 반응했다. 이진이 반사적으로 승현의 팔을 붙들었다. 움찔거리는 근육에서 당장이라도 그들 앞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제 사연 팔이 해 봤자 걔랑 비교만 당하겠네.”

“불쌍한 애한테 왜 그렇게 심하게 말해?”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울렸다. 이진은 한 손으로 승현의 팔을 붙들고 한쪽 다리를 들어 나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우진 우는 거 봤어? 존나 꼴불견.”

“하는 짓이 너무 애새끼 같긴 해.”

“정스카이는 어떻고. 왜 말 안 해떠, 존나 웃겨. 그걸 너한테 왜 말해. 친한 척 오지죠.”

이진뿐 아니라 우진과 하늘의 욕까지 들려오자 승현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 분노에 찬 승현의 돌발 행동을 막기 위해 이진은 그를 벽으로 밀치고 온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형…….”

“쉿!”

이진은 불만스럽게 한마디 하려는 승현의 입마저 손으로 막아 버렸다. 승현은 목 안으로 ‘끄응’ 하고 싫은 소리를 내면서도 반항하지 않았다.

“걔한테 밀려서 내 인터뷰는 화제성 아예 물 건너갔어.”

“너 개그맨 시험 쳤던 거?”

“아니. 나 방송 중간에 외할머니 돌아가신 거.”

“뭘 어따 비벼, 인마.”

“하여튼, 빡돌아서 아까 걔한테 좀 꼽 줘 봤는데 바로 도망가더라. 유리 멘탈인 건 알아줘야 해.”

“너랑 같은 팀 아니야? 그 형 멘탈 아슬아슬해서 무대도 조지면 어쩌려고?”

“어차피 데뷔는 글렀는데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들은 끝까지 치졸한 대화를 나누며 서서히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잠시 후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승현이 이진을 밀어 냈다.

“저게 뭐예요?”

“뭐가.”

“왜 가만히 있었어요?”

승현이 분한 목소리로 이진을 다그쳤다.

“나서는 게 싫으면 막지라도 말았어야죠.”

“그럼 나가서 뭐라고 할 건데. 싸우기라도 하게?”

이진이 차갑게 말했다. 승현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이진은 승현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별일 아니라고 했잖아. 저런 애들은 어딜 가나 있어.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쟤들 때문에 기분 나빴던 거예요?”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까부터 아닌 척 저러더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그래. 쟤네가 험담하니까 혼내 달라고? 그냥 놔두면 잠잠해질 거 괜히 너까지 기분 나쁠 필요는 없잖아.”

승현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 때문에 속상해서 찌푸린 표정을 보니 왠지 조금씩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진은 손을 들어 승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입꼬리를 당겨 방긋 웃어 보였다.

“내가 또 예민하게 굴었지. 미안해.”

“……저야말로 죄송해요.”

승현이 사과하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목소리엔 아직 불퉁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더는 추궁하지 않고 넘어가는 걸 보니 이진과 싸우기 싫은 것 같았다.

이진을 감싸 안은 팔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꼭 이진의 마음을 보호하듯 둘러진 단단한 방벽에 감동이 뭉클 솟아났다. 가만히 안겨 있으려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진은 팔을 들어 승현을 마주 안았다. 그리고 그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이런 일에는 익숙해서 정말 괜찮아. 어차피 내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당당하게 못하는 놈들이야. 더 신경 쓸 것도 없어. 이런 일로 화냈던 게 오히려 부끄럽다.”

두 팔 가득 안고 있는 몸에서 힘이 서서히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진이 성심성의껏 달래 주자 화가 가라앉은 승현이 천천히 몸을 기대 왔다. 어깨에 와 닿는 묵직한 무게감이 이진의 마음을 들뜨게, 그리고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 우선은 이번 라운드만 잘 넘기자.”

이진은 승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진정될 때까지 한참 동안 부둥켜안고 있었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들 준비를 하는 그 시간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비록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상처입지 않기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오해를 넘어서도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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