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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31화 (131/173)

131화

승현이 이진 몰래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정도로 그때의 일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번 질색한 이후로는 더 그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길래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묻어 둔 줄 알았다. 이진 또한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을 위해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승현은 비밀리에 이진을 망상증 환자라 의심하고 있다. 이제 승현은 이진에게 감출 것도, 숨길 것도, 말하지 못할 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또한 헛된 망상이었다.

‘아니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너무 속단하지 말자.’

이진은 애써 스스로를 타일렀다. 손이 삐끗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보다. 아니, 애초에 승현의 메신저를 뒤지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진은 어플을 종료하고 도로 게임 화면으로 돌아왔다. 너무 놀라서 메신저를 확인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때맞춰 승현과 찬우가 두 손 가득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간식 추가요!”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살찌게 뭘 또 이런 걸. 감사합니다.”

찬우가 봉지에서 군것질거리를 꺼내 놓자 현기가 투덜대며 과자 한두 개를 쏙 집어갔다. 제작진이 구비해 둔 과자가 있는데도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신나게 반겼다.

승현은 찬우의 옆에 제 짐을 내려놓고는 곧바로 이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게임 재밌어요?”

“어? 응…….”

“어디까지 했어요? 치즈 랜드는 갔어요?”

“응?”

이진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만 만지작댔다. 승현도 잠깐 사이에 이진의 기분이 확 침체된 걸 눈치채고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형,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은 무슨. 그냥 곧 방송이니까 좀 싱숭생숭하네.”

“아. 제가 생각이 짧았나 봐요.”

둘러대는 말에 넘어간 승현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이진은 약점을 내세워 의심을 차단한 자신의 행동에 잠시 기가 질렸다. 이진을 걱정하는 승현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정말 별거 아니야. 별로.”

무어라 더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승현이 이진의 손을 잡았다. 움찔 놀라는 바람에 손을 뿌리칠 뻔했다. 이진은 뿌리치는 대신 힘을 주어 단단히 맞잡았다. 의도치 못한 상황이지만 그의 체온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불안감을 따스하게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이진은 더 이상 남들의 시선들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승현의 시선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서 받는 폭력적인 관심이 두려운 것과는 또 다른 공포였다. 전자가 빗발쳐 날아오는 화살 속을 달리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의 오해에 서서히 잠식되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막연하고 아득한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자신의 열등감이나 패배감, 불안감 등을 보상받기 위해 노력하다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 문장이 자꾸만 머리에 맴돌았다.

몇 편의 광고 후 드디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반 배정 게임은 이진의 파트가 편집되어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적나라하게 방송될까 내심 걱정했으나 아무래도 후반부의 감동적인 장면을 위해 드러낸 것 같았다. 재규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이진에게 엄지를 척 들어 올려 보였다.

초반부는 4라운드의 설명과 함께 대본으로 연출된 장면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큰 흐름을 보니 핑크반과 블루반은 라이벌 관계이긴 하지만 핑크반이 조금 더 우세한 입장인 것처럼 편집되었다.

핑크반에 열등감이 있는 블루반이 그들에게 도전을 하는 게 주 스토리였는데, 경연곡 컨셉 때문에 붙은 설정이겠지만 우연찮게도 직전 반 배정 게임에서 패배한 참가자들이 줄줄이 블루반에 가서 그런지 굉장히 실제 상황같이 느껴졌다.

특히 핑크반의 반장인 선승현과 블루반의 부반장인 유이진의 대립이 현실감을 더했다. 이진이 떨어뜨린 종이를 줍기 위해 승현이 허리를 숙였을 때, 당시 상황을 보지 못했던 블루반 참가자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좋아! 콧대를 짓눌러 버려!”

“와. 저기서 종이 밟아서 못 줍게 했으면 진짜 하이라이튼데.”

“이진이 형 완전 내숭쟁이네?”

이진은 들리지 않는 척하다가 잠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태연한 척 버티고 있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 화면 속 장면들이 고작 일주일 전 촬영된 내용이라 그런지 더 수치스러웠다. 시청자와 참가자 사이의 거리감이 대폭 줄어든 것이 새삼 체감되었다.

머지않아 여러 대의 봉고차가 교문 앞에 차례로 주차되는 장면이 나왔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여러 중년들은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화면 왼쪽 상단 로고 밑에는 학부모 상담이라고 적힌 소제목이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진이 아빠입니다.

-재규 엄마예요. 우리 재규 예쁘게 봐 주세요.

차에서 내린 부모들 중 한두 명이 인사를 했다. 곧바로 교실에서 방송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는 참가자들이 나왔다. 방송 속 이진은 제법 침착했지만, 얼굴을 클로즈업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이라는 자막을 달아 주자 불안을 속으로 숨긴 것 같아 보였다.

-이진아.

-……선생님?

이진이 촬영장을 이탈하는 순간은 아주 짧게 나왔다. 결국 촬영 중단 선언, 감정을 추스른 뒤 친구들과 함께 돌아온 이진, 늘 침착하고 의연했던 그에게 과연 무슨 사정이…… 등등. 자막은 이진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포장했다.

뒤이어 이진이 차분히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면이 나왔다. 말끝을 흐리거나 문장 사이 긴 침묵까지 편집 없이 고스란히 방송되었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생생히 전해지기 때문인지 방송을 시청하는 참가자들도 조용히 이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크응.”

그때 어디선가 콧물을 흘리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숙하기까지 하던 분위기를 깨는 소리에 참가자들의 시선이 슬그머니 그곳으로 향했다. 우진이 눈물을 참으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훌쩍이고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근처에서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와락 이진에게 안겨 왔다. 승현의 곁에 앉아 있던 하늘이었다. 하늘이 이진에게 답삭 안기자마자 승현이 미간을 구겼다.

두 사람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이진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정말 맞닥뜨리고 싶지 않던 순간이 찾아왔다. 이진은 한숨을 삼키고 애써 괜찮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늘의 등을 슬슬 쓸어 주자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하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형 자취하는 거 부럽다고 해서 미안해.”

“아니야. 왜 미안해하고 그래.”

이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하늘을 달래 주자 승현이 슥 팔을 뻗어 하늘을 떼어 놨다.

“형 피곤하니까 달라붙지 마.”

“미안.”

퉁명스러운 승현의 말에 하늘은 미안하다 사과하면서도 승현을 흘겨봤다. 새침한 표정으로 팔뚝을 가볍게 툭 치고 제자리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다시 우진이 ‘크으응.’ 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 진짜……. 다들 왜 그래. 다 옛날 일이고 나 정말 괜찮아.”

결국 이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과장된 태도로 모두를 다독이자 참가자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차츰 불편한 기색을 지웠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남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분위기를 무마해야하는 상황이라니. 현실이 꼭 작위적인 부조리극의 한 장면 같았다.

어느새 이진의 인터뷰가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연습하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듯 나열되었다. BGM으로 깔린 서정적인 음악이 이진 특유의 비현실적인 매력을 더 부각시켰다. 무대 위 이진이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발랄한 장면이 나오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화면이 바뀌자마자 아이의 조그맣고 동그란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발자국 소리에 퍼뜩 뒤를 돌아본 아이가 커다란 눈을 반짝 빛내며 환히 미소 지었다.

-형아아!

-선수현?

승현의 동생, 수현이 승현을 향해 우다다다 뛰어왔다. 승현은 당혹스러워 보였지만 우선 달려오는 동생을 냅다 안아 들었다. 그리고 대체 왜 동생이 여기에 있는지를 묻듯 카메라를 험악하게 노려봤다. 그러자 승현을 찍고 있던 카메라가 좌우로 몸체를 흔들었다.

-승현아.

그때 승현의 어머니가 화면 구석에서 나타났다. 동생을 반갑게 안아 준 것에 비해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는 가벼운 포옹조차 하지 않았다. 서먹한 거리감은 상담실로 들어간 뒤에도 여전했다.

방송 속에서 승현의 어머니는 재능 있는 아들을 믿지 못하고 구박하는 악역이었다. 그녀는 연신 동생이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아냐, 이곳에 너 하나쯤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데뷔를 한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냐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담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불평 한마디 없었다. 의기소침하게 혼나고 있는 게 아니라 무릎에 동생을 앉히고 손장난을 받아 주며 어머니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꾸만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결국 피디가 개입했다.

-아들이 어떤 아이돌이 되었으면 하시나요?

-망한 아이돌이요. 그래야 괜히 다른 애들이 허튼 꿈 키우지 않죠.

냉랭한 목소리가 거침없이 날아들었다. 승현은 “말 좀 조심하세요.” 하고 핀잔을 줬다. 그리고 승현의 개인 인터뷰가 이어졌다.

-제가 성공하면 달라지실 거라 생각해요. 만약 성공했는데도 여전히 변함이 없으시다면…… 그래도 데뷔하고 3년 정도 지나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에는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익숙한 듯 받아 넘기는 태도가 모진 말에도 상처받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진은 승현이 그저 지쳤을 뿐이라고 느꼈다.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어머니를 설득할 힘이 더는 남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어머니는 승현이 어떠한 성공을 거두든 상관없이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리란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마 스물다섯의 선승현도 마찬가지였겠지.’

욱신욱신 가슴이 아파왔다. 방송 때문이 아니었다. 승현이 수모를 겪는 장면을 보면서도 방금 전 검색어들이 잊히지 않아 괴로웠다. 과거 이진이 선승현을 오해하고 미워했던 것처럼 이제는 승현이 그를 좋아하면서도 오해하고 있다.

전부 이진이 부린 과욕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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