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결국 저녁 연습은 모두 취소되었다. 대체 단톡 방에서 말이 어떻게 오고 간 건지 제작진의 허가 아래 28명이 모두 모여 방송을 보기로 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각자 편안한 옷을 입고 휴게실로 모이라는 공지를 받았다.
처음 공지를 받았을 땐 난처하기도 했지만 고민할 것 없이 참여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되자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한편으론 이게 공동으로 논의된 것이 아닌 일부 멤버들만이 모인 단톡 방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동료들과 먼저 거리를 둔 건 이진이다. 어쩌면 당연한 업보인데도 찝찝하게 느껴지는 것은 억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인지 이진은 단순한 친분 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자세한 내막이 있을 것 같은 감이 왔다.
그래서 저녁 식사 전에 잠깐 승현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대놓고 단톡 방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요즘 촬영장 분위기가 어떻냐 물었다. 아까 블루 팀 멤버들이 다 같이 핸드폰을 잡고 단체 대화를 했으니 승현의 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승현은 이진보다도 생각이 없는 건지.
“형 덕분에 화사해요.”
……따위의 헛소리만 지껄였다.
그래도 승현은 하늘과 친하니 뭐라도 알고 있었을 것 같았는데, 단톡 방에 초대되어 있기 때문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번 촬영이 추가된 배경이나 누가 주축이 되어 의견을 냈는지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봐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듯 고개만 좌우로 기울였다.
“방송 볼 때 저랑 같이 앉을 거죠?”
“으음. 떨어져 앉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 방송 보다가 울면 달래 줘야죠.”
“뭐래, 진짜.”
승현의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 외에는 별 소득이 없는 대화였다.
이진은 일단 그 선에서 물러났다. 피해 의식에 젖어 별것도 아닌 일로 열을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 유이진. 단톡 방 그까짓 거 초대 안 받아도 괜찮잖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민한 것은 이진의 성격이 아니라 육감이었음이 밝혀졌다.
본방 시간에 맞춰 지흔과 희영, 미열과 함께 휴게실로 향했을 때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허름한 테이블과 안 쓰는 TV, 다 죽어 가는 소파 하나가 전부였던 휴게실은 제작진의 손을 거쳐 안락한 쿠션과 푹신한 카페트가 놓인 세트장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비록 분홍색과 하늘색뿐인 쿠션이나 푹신한 털이 달린 카펫이 여름과 썩 어울리지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붙어 앉을 참가자들을 배려해 에어컨도 틀어 준 데다가 시원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비롯한 다양한 주전부리도 준비되어 불만이 나오진 않았다.
이진과 룸메이트들은 휴게실에 준비된 간식을 위해 저녁도 대충 먹고 막 기숙사에 올라온 참이었다. 휴게실이 있는 층 계단을 중반쯤 올랐을 즈음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 빡쳐, 진짜. 무슨 리액션 촬영을 다 같이해. 또 유이진 들러리 서다 끝나겠네.”
“사운드는 우리가 다 메워 주는데 화면엔 왜 한마디도 안 하는 애들이 잡히냐?”
“지들끼리 데뷔해서 지지고 볶고 잘 해 보라 그래. 사상 초유의 노잼 그룹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듯.”
두세 명이 복도를 지나가며 대화하는 소리였다.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다른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유독 또렷이 들렸다.
“아, 이진아…….”
“아니야. 괜찮아.”
당혹스러운 건 이진만이 아니었다. 미열이 뭐라 위로하려 입을 열었으나 듣지 않았다. 참가자들 중 누가 한 말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어차피 곧 볼 일 없어질 상대일 게 뻔했다. 이진은 그런 애들을 위해 미열이 대신 변명을 해 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어차피 휴게실 가면 볼 텐데.”
그러나 휴게실에 도착해 보니 이미 절반 이상이 모여 있어 방금 전 말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었다. 이진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에게 악감정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 굳이 특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벌써 많이들 와 있네?”
“자리 맡아 놨지!”
이진 일행이 방 안으로 막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참가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지흔아, 여기 와서 앉아.”
“미열이 너도 이리로 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 미열과 지흔이 인사하자 조근과 명준이 손을 흔들며 맞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아 놓은 자리를 가리키며 미열과 지흔을 손짓해 불렀다. 그러나 뒤이어 이진과 희영이 들어오자 방금까지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어졌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이진은 의연한 태도로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몇 명은 밝은 미소로 화답했고 몇은 본체만체하며 인사하지 않았다. 희영도 이진을 따라 인사했으나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진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게 한두 명이 아니다. 이런 노골적인 질투는 익숙했기에 오히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네.’
속으로 짐작하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희영과는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적도 없지만 오늘 이진의 옆자리엔 미열이 아닌 희영이 앉았다. 그도 이 미묘한 기류의 원인을 눈치챈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이진과 희영이 한데 묶여 눈엣가시 취급을 받고 있다.
‘이 새끼들이 공사 구분도 못 하고.’
프로답지 못하게 사감을 섞어서 파벌을 형성하다니. 당장은 마음에 안 드는 참가자를 엿먹이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할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코 좋을 리 없었다.
‘길게 볼 필요가 없는 거겠지.’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이진은 현재의 불편한 분위기가 하위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조성되고 있다 확신했다.
초반 라운드에서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상위권 참가자와 하위권 참가자 사이에 갈등을 조장했다. 그때 쌓인 케케묵은 감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 채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이제 와서 반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법 사이가 좋았던 찬우와 미열조차 싸우게 만들 만큼 파장이 컸으니 감정의 골이 깊을 만도 했다.
지금에 와서야 이진과 희영, 미열과 지흔의 순위가 엇비슷하지만 초반 라운드에서는 투표수는 물론 인지도부터 확연한 차이가 났다. 그 싸움 당시 이진과 희영은 상위권의 입장이었고, 미열과 지흔은 중하위권의 입장이었다.
그러니 현재는 상위권 멤버라 할지라도 한때 자신들과 같은 편이었던 미열과 지흔은 나름대로 아군 대접을 해 주는 것이다.
반면 이진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순수한 자신의 능력만으로 화제성을 얻었다. 희영도 윈올 이전 오디션 프로에 참가했던 경력으로 초반에 바짝 화제성을 얻은 참가자였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남들 눈에는 이들이 고비 한번 없이 상승 기류를 타고 물 흐르듯 상위권에 안착한 것처럼 보였을 수 있었다.
‘요행으로 인지도를 얻었다 생각하면 지네 순위가 오르나?’
우스운 것은 이들이 처음부터 연습생 팬덤을 그대로 데리고 들어온 대형 출신 참가자들에겐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그들과 비슷한 경력의 일반인, 혹은 중소형 기획사 출신 참가자들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데려왔을 뿐 방송에 출연할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아 결국은 하위권으로 방송을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은 진작에 탈락해 더는 보이지 않지만, 개중에도 머리가 좋은 몇 명은 아직도 순위 끄트머리에 붙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몸을 던져 망가져서라도 확고한 캐릭터를 만들든가 팬들과의 소통을 활발히 해 코어 팬층을 쥐어짜는 등 그들의 생존 전략은 아주 다양했다. 하지만 대형 기획사 출신 참가자들에게 붙어 인지도를 높인 것이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의미한 성과를 보였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대형 출신 참가자들에게는 호의적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일반인, 혹은 소형 기획사 출신임에도 별 고생 없이 상위권에 안착한 참가자들을 배 아파했다.
‘그렇게 편을 갈라서 남는 게 뭔데?’
대형 출신들이 의리를 지켜 최종 선발 때 순위를 무시하고 하위권을 뽑아 주기라도 할 줄 아는 건가. 머리가 목 위에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그게 불가능하단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다. 그렇다면 정말 이진이 아니꼬워서 이렇게 선명한 악의를 표출한다는 뜻인가?
‘흥. 그럴 시간에 연습을 더 해라.’
이진은 끊임없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고개를 슬쩍 내려 보자 명품 로고가 선명한 반팔 티가 보였다. 오늘 이진은 서포트로 받은 반팔 티와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보니 방송 같은 곳에 입고 나오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어 들고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팬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옷을 골랐다. 장군이 전쟁터에 나갈 때 갑옷을 입는 것처럼 이 옷이 이진의 멘탈을 지켜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방송을 보며 나갈 멘탈을 걱정하며 고른 옷이었는데 당장은 참가자들 간의 기 싸움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찬우와 승현, 제이슨과 우진이 차례로 들어왔다.
“찬우 등장!”
“어, 어서 오세요.”
“하이룽!”
아니나 다를까 이진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던 이들은 이 네 명에게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평소엔 잘만 지내는 사이한테까지 이러는 걸 보니 처음 의도와는 달리, 자기들끼리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에 상위권 참가자들이 얹혀 가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지자 무척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진은 핑크반 멤버에 왜 블루반인 한찬우가 홀로 끼어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조근조근! 찬우찬우랑 같이 앉자!”
“아, 아항. 그래, 그래.”
찬우는 정말로 눈치가 없었기에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아 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한순간 똥 씹은 표정이 된 장조근이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으나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그의 기분이 나쁘단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차, 찬우 형. 나랑 여기 앉자.”
“왜? 오랜만에 조근이랑 놀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인 우진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물론 찬우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진만이 방 한가운데에서 쩔쩔매는 동안 제이슨은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벽 쪽에 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승현은 어느새 이진의 코앞으로 다가와…… 박희영에게서 자리를 삥 뜯었다.
“박희영. 자리 좀 비켜 줄래?”
“응? 그래…….”
희영이 얼떨떨해하며 자리를 비켜 주자 승현이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러더니 이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긋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아야.”
“애들 다 있는데 자꾸 이렇게 친한 척하지 마.”
“알아서 편집해 주겠죠.”
승현은 알게 모르게 그들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타고난 연예인 체질이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