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렇게 승현의 수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승현의 전략은 단순하고 효과적인 선물 공세였다. 첫날의 장미꽃부터 시작해 편의점에서 사 왔다던 체리향 립밤, 어디서 난 건지 모를 하트 장식 볼펜, 급식으로 나온 군것질거리, 선승현의 글 솜씨가 부족하다는 확신을 더해 준 손 편지까지. 매일같이 잡다한 선물 행렬이 이어졌다.
어디 인터넷에 사연이라도 올렸다면 ‘가성비 썸남’이라고 대차게 까였을 법한 목록이지만 이진은 조촐한 선물에도 기분이 쉽게 좋아졌다. 촬영장에 갇혀 하루 종일 연습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를 생각하며 선물을 골랐다는 게 기특했다.
“선승현, 너 왜 이렇게 저 형한테 자주 찾아가?”
“괴롭히고 싶어서.”
승현은 종종 쉬는 시간에 틈을 내 이진을 찾았지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불러낼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다 못해 둘 중 하나는 하차해야 하는 관계이니만큼 두 사람이 붙어 다닐수록 수상쩍은 시선이 붙었다.
“야, 저 형 화내면 무섭던데. 또 싸우기 전에 조심 좀 해.”
“……알았어.”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던 두 사람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매일 밤 운동장 벤치에서 비밀리에 만나게 되었다.
“형, 요즘 기분 좋아 보이네요.”
“내가? 아니야.”
사실은 같은 팀 멤버들도 이진이 요새 들떠 있음을 눈치챘다. 아닌 척 이유를 물어보는 그들에게 이진은 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만 답했다. 그러나 표정에서부터 워낙 티가 나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진은 결국 며칠 만에 미열의 호출을 받았다.
“이진아, 너 혹시…… 아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너 설마 여친 생겼냐?”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만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이진. 너 진짜야?”
“아니? 아니야. 아닌데? 전혀 아니야.”
미열이 기겁하며 진실을 추궁했지만 이진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선승현은 여자도 아니고 아직 사귀지도 않으니까. 미열은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그에게 이진을 향한 일말의 신뢰가 남아 있기는 했는지 그는 ‘아직은’ 솔로라는 이진의 주장을 힘겹게나마 받아들였다.
“요즘 유이진 씨의 웃음이 헤퍼졌다고 들었는데요.”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한밤의 밀회, 반갑게 달려오는 그를 보자마자 승현이 따지듯 말했다. 이진은 사소한 불평을 흘려들으며 승현이 건넨 종이가방을 열어 보았다. 종이 가방 안에는 한 입 크기의 네모난 초콜릿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날 보고 웃어야지 초콜릿을 보고 웃으면 어떡해요.”
승현이 간식거리를 보고 눈을 빛내는 이진을 보고 심통 난 목소리로 구시렁댔다. 이진은 부끄러움을 담은 주먹으로 가볍게 팔뚝을 툭 쳤다. 그러자 금세 표정을 풀고 작게 웃었다.
“이런 건 자꾸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나가서 사 오는 거죠. 몰래.”
“언제 나가는데? 아침은 아니겠고.”
그의 수면 패턴을 잘 아는 이진이 물었다. 승현은 정곡을 찔린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새벽에 산책할 때요.”
“새벽?”
“네. 산책하다 발견했는데 이 앞에 24시 편의점이 하나 있거든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아서 몇 번 다녀왔어요.”
그러고 보면 저번에 이진과 만났을 때도 승현은 잠이 오지 않는다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학교 교정을 몇 바퀴 걷다가 돌아왔지만 평소에는 촬영지를 이탈해 주변을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어두운데 돌아다니면 위험하잖아.”
“아. 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아서요.”
승현이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잠에 쉬이 들지 못한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늦은 밤 홀로 돌아다닌다고 하니 마음이 아파 왔다. 승현은 시무룩해진 이진에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에 넣어 줬다.
“연습하고 피곤할 텐데.”
“이번 라운드는 제법 할 만한 것 같아요. 춤만 외워도 되니까요.”
“너 퍼플반은 메인 보컬이잖아.”
“……형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진의 걱정에 승현이 능청을 떨었다. 승현은 노력하는 만큼 성장하는 편이라 며칠의 연습에도 노래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지만 4라운드는 두 배는 짧아진 기간 동안에 두 개의 무대를 소화해야 한다. 아무리 성장이 빠르다 해도 수월하게 소화할 만한 일정은 아니었다.
“형이야말로 피곤하지 않아요?”
“나야 노래만 불러도 되니까 편하지.”
“센터 부담스러워했잖아요.”
승현은 아직 저번 라운드에서 이진이 우진에게 센터를 양보하려 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그때 기회를 양보한 이유는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한 것 같아서였다.
이진은 승현이 과거의 사소한 대화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했던 시간 중 반절 정도를 다툼에 허비했다. 좋은 기억뿐 아니라 나쁜 기억도 가득한 바람에 승현이 아직 풀리지 않은 원한을 기억해 낼까 걱정이 됐다.
“하긴 형은 부담스러워 할수록 잘하니까.”
승현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그러자 이진의 마음을 뒤덮었던 불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쉴 새 없이 느끼고 있었다.
평화로운 밤, 구름에 가려진 달이 문득 모습을 드러낼 때 은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더운 밤에도 온기가 그리워 맞잡은 손. 그리고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멈춰서 더 다가갈까 말까 안절부절 못하는 발걸음이 이진의 새로운 행복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진에게 행복이란 달콤한 케이크였고 조그만 초콜릿이었다.
“아, 슬슬 들어가야겠네. 형 먼저 들어가요.”
그때 승현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꼬물꼬물 초콜릿을 하나 까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승현이 다시 활짝 웃었다. 이진은 그 미소를 머릿속에 꼭꼭 저장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다음 날 이진은 초콜릿 한 움큼을 주머니에 넣어 두고 연습실로 향했다. 심심할 때마다 야금야금 하나씩 꺼내 먹으니 수시로 행복감이 찾아왔다.
“이진아, 혼자 먹으면 당뇨 온다.”
미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초콜릿을 포착했다. 열량 소모량은 사람마다 다르니 혼자 간식을 먹는 걸로 뭐라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안 그러던 애가 자꾸 무언가를 주워 먹으면서 배시시 웃음을 지으니까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결국 이진은 팀원들에게 초콜릿을 하나씩 나눠 줄 수밖에 없었다.
‘내 건데…….’
이진의 소유욕이 하필 초콜릿을 향해 불타올랐다. 주머니가 가벼워질 때마다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다들 고마워하며 먹는 모습을 보니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그간 정신적으로 지쳤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닌가 하는 자책도 들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경 써 줘야지.’
승현의 별것 아닌 선물이 마음을 풍족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진의 호의도 쌓이다 보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진은 대체로 인간관계에 회의적이었으나 요새는 부쩍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여기 한 번만 다시 해 보자.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네게 보내는 작별 인사.”
“저 음 한 번만 맞춰 주세요. 이거 솔 맞아요? 아—”
“준현아, 넌 애가 아무리 막귀여도 어떻게 이렇게…….”
어젯밤 말했다시피 무대 연습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화음이 쌓이는 구간이 예상외의 고비이긴 했지만, 좋아하는 데다 잘하기까지 하는 일을 몇 시간이고 반복하는 것은 즐겁기만 했다.
이진은 자진해서 준현의 연습을 도왔다. 첫인상은 하늘에게 빈정대기나 하는 싸가지 없는 놈에 현인상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인간관계를 다소 등한시했던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서였다.
“형들 기숙사 휴게실에 안 쓰는 티브이 있었잖아. 그거 케이블 연결하면 잠깐 방송 볼 수 있다던데, 오늘 4라운드 첫방 다 같이 볼래? 핑크반에서 물어보네.”
이진이 준현의 음감을 교정하는 동안 음료수를 마시며 핸드폰을 하던 지흔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 하늘이가?”
“옙. 지금 얘기 중.”
미열이 아는 체하자 지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4라운드의 첫 번째 회 차이자 이진의 인터뷰가 방영되는 날이다. 승현과 노닥이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이진은 아직 자신이 벌인 일의 후폭풍을 맞닥뜨리기 전이었다.
‘같이 가서 봐야 하나? 다 같이 본방을 보면서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자리에 없으면 괜한 말이 더 나올 것 같은데……. 표정 관리가 안 되면 어떡하지.’
여러 고민들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되어 살짝 긴장한 채 눈치를 봤다.
“뭐임? 어쩌잔 거지?”
“형이 말해 봐.”
“엉.”
“아! 임티 뭐야!”
그런데 다들 말수가 줄더니 어느새 손에 핸드폰을 들고 타닥타닥 손가락을 움직였다. 핸드폰을 보지 않는 사람이라곤 박희영이 전부였다.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보던 이진은 그제야 이 상황을 눈치챘다.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 없는 단톡 방이 있다 이거지.’
지금 이들은 이진과 희영이 없는 단톡 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면서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짧은 문장을 주고 받는 걸 보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초대해 주기 바란 건 아니지만, 아니, 초대받았더라도 알림은 꺼 둔 채 참여하지 않았겠지만 처음부터 단톡 방 멤버로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는 게 충격이었다. 이 많은 사람 중 이진에게 ‘들어올래?’ 하고 물어보는 이가 하나도 없다니.
‘선승현도 저기 들어가 있나?’
미열은 초대하지 않은 게 확실하고, 찬우는 눈치가 둔하니 설사 초대돼 있다 해도 신경 쓰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선승현은 모를 일이었다. 만약 승현이 단톡 방 멤버면서 이진을 초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조금 상처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속상해도 내가 없는 단톡 방이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건 너무 구질구질했다. 구질구질한 건 이진의 기분으로 족했다. 겉모습만큼은 당당하고 냉철하고 침착하고 능력 좋은 유이진으로 보이고 싶었다.
“뭐 해? 연습 안 해?”
이진이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가르침을 받고 있던 준현이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 곧바로 팀원 중 몇 명이 이진을 돌아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진이 목소리를 내고서야 이곳에 단톡 방에 초대받지 못한 멤버가 있단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호의가 쌓이면 좋은 결과는 무슨.’
긍정적인 이진이 나타난 지 10분 만에 오리지널 이진이 다시 돌아왔다. 긍정적인 이진의 궁둥이를 뻥 차서 내쫓은 오리지널 이진은 대뇌에 앉아 ‘선승현이 단톡 방의 존재 여부를 알았는지’에 대해 몹시 집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