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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27화 (127/173)

127화

샤워를 끝낸 이진이 느지막이 교실에 들어가자 미열이 소품용 마이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진아, 소품 왔다.”

블루반의 보컬 팀은 스탠딩 마이크를 이용한 간단한 안무를 포인트로 공연을 구성하기로 했다. 아이디어 제공자는 종일 정신을 빼놓고 있던 이진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의견 중 하나가 꽤 괜찮았는지 냉큼 채택되었다.

보컬 팀 무대에선 안무가 필요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보컬 실력으로 다른 무대를 압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준비를 하는 게 좋다는 게 주 채택 사유였다.

“무대할 땐 새 거 사 준대.”

참가자들은 군데군데 녹이 슨 마이크를 물티슈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확실히 소품이 하나 생기니 가만히 서서 마이크만 쥐고 있어도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연습 모니터링을 위해 미열은 핸드폰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려 두고 정면이 담기도록 설치했다. 각자 목을 풀고 준비가 되자 하나둘씩 자리에 서서 마이크에 손을 올렸다. 당연하게도 이진이 센터였다.

“서로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싸움뿐이야.”

“내가 널 위해 떠나야 할까, 내가 떠나 줄까.”

메인 보컬과 리드 보컬은 이진과 지흔이 차지했다. 이진에 지흔, 미열과 희영, 강희까지. 평소라면 이견 없이 메인 보컬이나 리드 보컬에 들어갔을 멤버가 다섯이나 있기 때문에 순위가 높은 참가자에게 우선권을 준 것이다.

이진과 지흔의 목소리가 제법 잘 어우러진 데다 실력자들이 많으니 화음을 쌓을 때도 음계가 탄탄하게 잘 올라갔다. 이진의 만족도도 제법 높았다.

“Goodbye, blue.”

“이별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굿바이 블루에서 7명의 화음이 터질듯이 쌓이는데, 이때 서로의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리드 보컬의 성량을 묻어 버리지 않고 적당한 존재감을 내야 했기 때문인데, 지흔은 타고난 성량이 큰 편이 아니라 희영이나 미열에게 묻히기 일쑤였다. 코러스 직후 이진이 고음 파트를 치고 나오니 마냥 지흔에게 맞출 수도 없었다.

“형들 중에 리드 할 사람 있으면 저 바꿀 수 있어요. 싫지만, 바꿔 드림!”

결국 지흔이 두 손 들고 포기를 선언했다. 미열이나 희영이라고 리드 보컬이 탐나지 않는 건 아닐 테지만 지흔과 강희까지 포함해 넷이 한 자리를 노리는 꼴이니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앞문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이진이 형.”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드민 건 다름 아닌 승현이었다.

“뭐 하러 왔냐?”

“형 데려가려고.”

미열이 퉁명스럽게 묻자 승현도 퉁명스레 답했다. 승현은 이진에게 얼른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진은 지금 승현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바닥에 앉아 뭉그적거렸다. 그러나 미열은 말만 퉁명스럽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습 시간 아니잖아?”

“잠깐, 데이트.”

“이진이 바쁘니까 볼일은 금방 끝내라.”

마치 자신을 대여해 주는 것 같은 발언에 이진의 기분이 미묘해졌다. 어쨌든 승현이 이진을 데려가도 좋다 허락까지 받았으니 난 너랑 할 말 없다 뻐길 수도, 하필이면 지금 포지션을 다시 정하는 중이니 바쁘다는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이진은 꾸물꾸물 일어나서 승현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두 손을 뒷짐 진 채로 있다가 이진이 다가가자 뒤를 돌아 앞장서 걸었다. 복도 끝 사각지대에 와서야 멈춰 선 승현은 다시 뒷짐을 지고 이진을 바라봤다.

“왜 불렀어?”

“형이 어제 그러고 도망간 뒤로 생각을 좀 해 봤어요.”

승현이 어제 일을 언급하자 이진은 살짝 양심이 찔려 왔다. 먼저 불을 질러 놓고 승현의 정강이를 까고 도망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은 나한테 책임을 지라고 했지만, 저는 형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각 없는 행동으로 이진을 흔들어 놓았으니 승현은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동시에 이진도 자각 없이 평온한 일상을 지내던 승현에게 굳이 그 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고 일러 주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공평하다.

승현이 등 뒤에 숨겨둔 손을 꼼지락대더니 불쑥 이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탐스럽게 만개한 분홍색 장미 일곱 송이가 들려 있었다.

“한번 꼬셔 보지도 않고 포기하냐고 했죠? 그럼 지금부터 한번 유이진을 꼬셔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의하시나요?”

장미를 내밀며 말하는 승현의 목소리는 제법 비장했다. 이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그가 내민 장미를 받아 들었다. 받아 들고 보니 장미가 생화가 아니라 정교한 조화인 걸 알 수 있었다.

“참고로 그건 저희 팀 소품이에요. 하루 만에 꽃을 구할 수는 없어서…….”

승현이 멋쩍게 실토했다. 이진은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을 꼭 주고 입을 삐죽이며 답했다.

“누가 소품으로 고백을 하냐?”

“고백 아니에요. 고백은 형이 좋다고 하면 아주 성대하게 할 테니까, 우선 이건 선전 포고입니다.”

이진의 마음을 제대로 흔들어 보겠다는 선전 포고. 늘 결정적인 순간에 한발 뒤로 물리던 승현 치고는 아주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진은 왠지 벌써부터 감동이 몰려와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데?”

“형이 최대한 설레야 하니까 스포일러는 하지 않을게요.”

승현은 단호히,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기야 선승현은 유이진 설레게 하는 데는 박사였다. 자각도 없이 가만히 있던 유이진을 흔들어 놓았으니까. 그러나 이진의 눈앞에 소품용 분홍 장미 일곱 송이가 들어왔다.

‘아닌가. 그냥 내가 쉬운 건가?’

갑자기 승현의 센스가 의심됐다. 좋게 봐 주려 해도 솔직히 분홍 장미는 조금 촌스러운 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진은 승현이 줬다 하니 좋아서 냉큼 받아 챙기고는 홀로 감동까지 받아 버렸다. 아주 승현이 유혹만 하면 그대로 홀랑 넘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꼴이 드러눕기 직전의 피사의 사탑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너 연애 처음이라면서.”

혹시 잘못된 정보였나 싶어 이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승현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해 봤어요.”

“고백하는 법을?”

“이것저것요.”

쿵. 벌써부터 불안했다. 인터넷과 썩 친하지 않은 이진도 연애를 인터넷에서 배우면 안 된다는 정보쯤은 있었다. 승현도 이진 만만찮게 온라인 생활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설마 이 정도 상식도 없을까 싶었지만, 그는 늘 예상에서 빗겨 나갔던지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승현은 이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지 수줍은 미소나 지어 댔다. 학창 시절 첫사랑을 다룬 영화 속 남주인공 같은 미소였다.

“그럼 오늘 밤에 연습 끝나고 봐요.”

마지막에는 묘한 속삭임과 함께 머뭇머뭇 이진의 오른손을 가져가 손등에 쪽 입 맞췄다. 마치 기사가 귀부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난생처음 받은, 아니 받을 줄 생각도 못한 스킨십에 이진의 사고가 마비됐다. 손끝에서부터 뻗어 나온 저릿한 감각이 뇌리까지 퍼져 나간 것 같았다. 승현은 바짝 굳은 이진을 보고도 손을 여전히 입가에 둔 채 태연히 말했다.

“듣기로는 수영장 들어가기 전에 손발에 물을 먼저 묻혀서 심장에 예고를 해 주는 것처럼 스킨십도 손끝부터 차례대로 해 줘야 한다고.”

“야, 야.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있던 감정까지 다 사라지겠다!”

이진이 질겁하며 말을 잘랐다. 조금 과하게 오글거리지만 나름의 로맨틱한 맛이 있던 손등 키스는 승현의 설명 한마디에 감상이 변질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키스하다가 심장마비 걸려서 구급차 부르는 소리란 말인가. 대체 어디서 뭘 읽었길래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승현은 이진이 사색이 되어 말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씩 웃었다.

“그럼 형은 준비 없이 곧장 키스하는 취향인 걸로.”

승현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시야가 가려지고 곧장 입술에 보드랍고 말캉한 감촉이 닿아 왔다. 쪽, 짧은 소리와 함께 시야가 도로 밝아지자 이게 뭔 상황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얼굴로 서서히 열이 몰렸다.

가까이서 본 승현의 뺨과 눈 밑도 살짝 붉었다. 목욕탕이니 뭐니 하던 헛소리는 이진을 궁지로 밀어 넣기 위한 함정임이 분명했다. 임기응변으로 이렇게까지 여유롭게 치고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인터넷에서 이런 것도 가르쳐 주는 건가?’

그렇다면 이진은 인터넷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소폭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수작질이 이진의 심장을 사정없이 흔들어 놨으니까. 입술 끝에 은은한 과일 향기가 남아 혀끝을 타고 입 안 가득 퍼졌다.

“너어, 그…….”

“그것도 인터넷에서 가르쳐 준 거냐고요? 맞아요. 이건 편의점 가서 급하게 사 왔어요.”

단어조차 되지 못한 물음이 이진의 입 안을 맴돌았다. 혀는 이제껏 제자리에 얌전히 있었는데 지가 뭘 했다고 갑자기 뻣뻣하게 굳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다행히 승현은 용케도 알아듣고 이진의 물음에 답을 했다.

“아. 립밤은 체리향이에요.”

얄미운 한마디도 덧붙이며 이진의 손에서 장미 여섯 송이를 빼내어 갔다. 이진은 여전히 방금 전 입맞춤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선물을 갈취당하면서도 반항할 수 없었다.

“소품이라 전부는 안 되고……. 이거 하나는 잃어 버렸다고 할게요.”

고작 한 송이를 남겨 놓고 가는 주제에 생색이다. 빈약해진 선물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다시 이마 위에 꾹 입술이 찍혔다. 승현은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린 이진을 내버려 둔 채 분홍색 장미 꽃다발을 들고 본인의 연습실로 돌아갔다.

‘역시 내가 너무 쉬운 건가 봐.’

홀로 남은 이진이 생각했다. 그는 비틀비틀 옆걸음질 쳐 벽에 머리를 스스로 갖다 박았다. 쿵! 두개골이 욱신거렸지만 얼얼한 통증마저 잊을 만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아까부터 두근대는 심장은 말할 것도 없고, 후끈후끈한 두 뺨도 이진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벌겋게 달아올랐을 얼굴이 눈에 훤했다.

‘고작 이까짓 수작에 넘어갈 작정이냐, 유이진?’

아무리 스스로를 다그쳐 봐도 소용이 없었다. 울렁이는 마음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이진은 다시 화장실로 찬물에 한참이나 얼굴을 씻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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