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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26화 (126/173)

126화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고요 속에 홀로 남은 이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제이슨이 남기고 간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그래, 직접 확인하자.’

이진은 제이슨의 뒤를 따라 기숙사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익숙한 방문을 지나쳐 복도 제일 끝 승현의 방으로 향했다.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은 열리지 않고 승현이 아닌 다른 참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우진이었다. 우진의 뒤로 하늘이 ‘왜 자꾸 지랄이야!’ 하고 누군가에게 화내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진은 목을 가다듬고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승현아, 잠깐 나 좀 볼까?”

소란스럽던 문 안쪽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내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그는 이진에게 빌려 줬다가 돌려받지 못한 카디건 대신 트레이닝복 저지를 걸치고 있었다. 승현의 등 뒤로 눈을 동그랗게 뜬 하늘과 우진, 그리고 제이슨이 보였다.

‘같은 방이다 이거지.’

제이슨이 유달리 난리를 친 이유를 이진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제이슨은 이번 라운드 동안 승현과 같은 팀 점수를 받을 예정이다. 단순히 같은 반에 같은 포지션이기만 해도 상대의 컨디션이 신경 쓰일 텐데, 방까지 같으니 선승현의 저기압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무슨 일이에요?”

“잠깐 따라와 봐.”

두 사람은 계단으로 숨었다. 카메라는 확실히 없었고, 절대로 참가자들이 호기심에라도 쫓아오지 못할 곳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마주 서고 나서도 승현은 이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것도 엄청 거슬렸다. 그래서 이진은 오늘 내내 신경에 거슬렸던 승현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면서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승현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매너가 아니지.”

“어차피 카메라 앞에선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하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많이 티 났어요?”

어떤 게 매너가 아닌 건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승현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물론, 많이 티 난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이진이 눈치챘을 뿐. 하지만 따로 지적을 하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실토했다는 건 승현도 찔리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마음을 접겠다고 단언하더니 이진을 아예 시야에서 차단해 버렸다. 고작 몇 시간뿐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이없고 서운했다. 또 상처가 됐다.

경우가 다르다지만 의도적으로 멀어지려고 하는 걸 보니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 지난날 제멋대로 다가왔다 실망해서 떠나가던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전 형이 불편할까 봐…….”

“야, 어제까지 잘만 같이 다녔는데 뭐가 불편해. 내가 너랑 멀어지고 싶댔어? 마음을 정리할 거면 혼자 해야지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나는 이런 게 더 싫어. 알아?”

울컥해서 쏘아붙이자 승현이 곧장 사과했다. 그러나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치만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아무 생각 없었을 땐 괜찮았는데 지금은 형이 자꾸 신경 쓰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을 보면 추근대고 싶고, 근처에 알짱대는 애들 다 꺼지라고 하고 싶고.”

승현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예상치 못한 속내에 이진도 살짝 당황했다. 이건 좀 많이 과하게 솔직한 거 아닌가. 처음 추궁했을 때도 발뺌하지 않고 곧장 이실직고한 걸로 보아 어제 속마음을 털어놓은 이후로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추, 추근대?”

“그래요. 자꾸 음흉한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전부 형 탓이니까 감수하세요.”

“야, 그게 왜 내 탓이야!”

이진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그러나 머릿속 한구석에선 신나는 축제가 벌어졌다.

‘선승현이 날 보고 음흉한 생각이 든대!’

격한 반응에 금세 뚱한 표정이 된 승현이 긴장한 기색을 지우고 툴툴거렸다.

“그럼 어떡해요. 형이 말하기 전까진 맹세코 이런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거든요?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들쑤셔 놓은 탓이잖아요. 직접 책임져 줄 거 아니면 제 방식에 참견하면 안 되죠. 저도 곤란하단 말이에요.”

이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가에 화끈한 열이 몰렸다. 거칠어지려는 숨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생각인데?”

“……네? 그걸 왜 물어봐요!”

“내가 대상이니까 나도 알 권리가 있어!”

이진이 억지를 부리자 이번엔 승현이 기겁했다.

“형은 저랑 사귀고 싶지도 않잖아요! 저 가지고 놀지 말아요.”

“야, 너는 날 꼬셔 보지도 않고 사귀고 싶니 마니……! 이 근성 없는 자식, 무슨 포기가 이렇게 빨라!”

거칠어지려는 숨을 진정시켰더니 말이 거칠어졌다. 이 이상 질질 끌기 싫었던 이진은 승현의 멱살을 낚아채고 욕설을 뱉으며 따졌다.

“너야말로 책임져!”

“대체 뭘요?”

흥분한 이진이 점점 얼굴을 가까이 하자 승현은 최대한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그의 등 뒤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날 흔들어 놨잖아. 책임져.”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

덜컹, 쓰러지듯 주저앉자 침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이층 침대의 연약한 프레임이 삐걱삐걱 흔들렸다. 늘 차분한 이진답지 않은 행동에 대번에 시선이 모였다.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물기 직전이었던 미열이 돌아오는 길에 영혼을 어디다 떨구고 온 듯한 이진을 보곤 잠시 양치질을 뒤로 미뤘다.

“아닌 게 아닌데? 폭탄 삼 형제가 귀찮게 굴어?”

“아니…….”

폭탄 삼 형제 소리에 이층 침대 위에 올라가 있던 지흔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희영이 눈치껏 옆방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왜 그러는데!”

“그냥 지쳤을 수도 있지. 내버려 둬.”

미열이 답답함에 이진의 어깨를 쥐고 짤짤 흔들자 희영이 다가와 말렸다. 미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진은 무어라 말 한 마디 않고 그대로 가로로 픽 쓰러졌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혹시 승현이 형이…….”

“에이, 설마.”

위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열은 애써 제 친구를 옹호했지만, 유이진이 이렇게까지 정신이 나가서 돌아오는 일은 대부분 선승현과 관련이 있었기에 강하게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불 속 이진은 다른 의미에서 승현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게 맞았다.

곧 세 사람은 미동 없는 이진에게서 관심을 끄고 각자 제 할 일을 했다. 치카치카, 미열이 이 닦는 소리가 이진의 귓가에 맴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져 봤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살짝 부풀어 오른 듯했다. 연한 살결에 닿는 감촉이 상기시키는 기억에 이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

‘날 흔들어 놨잖아. 책임져.’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누가 먼저였냐 따지자면 처음엔 이진이 먼저 다가갔다. 당황해 바짝 굳은 승현의 뺨을 잡아 그대로 입술을 내리 눌렀다.

살짝 거친 촉감이 먼저 느껴졌다. 다음은 희미한 숨결이, 그다음은 입술 안쪽의 여리고 촉촉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벌리지도 그렇다고 다물지도 못한 채 놀란 상태 그대로 굳어진 입술이 움찔움찔 떨리고, 허공에서 멈춘 두 손은 어쩔 줄 모르고 방황했다.

부드러운 입술을 마음껏 맛본 이진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며 말했다.

‘별거 아니네.’

대체로 고민보다는 행동이 쉽다. 선을 넘는 것 또한 그랬다. 선승현과 입을 맞추는 일? 이진은 여태까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부딪혀 보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예상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무력하게 입술을 내어준 선승현을 느낄 때면 한순간 상대를 정복하고 찍어 누를 때의 쾌감이 들었다. 그러나 잔뜩 상기된 그의 모습이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고 나자 이진은 방금 전 생각을 전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라고요?’

이번엔 승현이 이진의 뒷목과 뺨을 감쌌다. 덥석, 뻗어 온 팔에 얼굴뿐 아니라 정신까지 휘어 잡히는 것 같았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은 이진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닿아 왔다.

입술 옆에 한번, 아래에 한번, 뺨과 턱에도 한 번씩 도장이 찍혔다.

‘잠, 잠깐, 선승현!’

이진이 당황할 차례였다. 입술이 한번 부딪힐 때마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고작 어린아이들의 장난 같은 간지러운 입맞춤이지만 짧은 순간 와 닿는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심장 소리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승현에게 잡힌 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진은 이대로라면 얼굴이 터져서 죽거나 녹아서 죽거나 승현에게 잡아먹혀서 죽을 거라 생각했다.

주춤대는 사이에 승현이 허리를 붙들었다. 시야가 휘청거린다 싶더니 한순간에 차가운 벽에 등이 밀어붙여졌다. 어느새 이진은 승현과 벽 사이에 갇힌 채 입술을 강탈당하고 있었다.

쪽, 쪽.

짧게 끊어졌던 소리가 점점 길고 질척한 소리로 변해 갔다. 승현의 손길은 늘 조심스러웠지만 지금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힘으로 이진을 힘껏 끌어안았다. 습한 공기와 온도가 답답할 만도 했지만 답답하긴커녕 알 수 없는 아늑함을 느꼈다.

반면, 옷 너머로 맞닿은 따뜻하고 단단한 육체는 너무도 선명해 심장 박동에 따라 두근거리는 작은 움직임마저 큰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마치 거대한 맹수에게 감싸인 것만 같았다.

‘그만……!’

이진은 있는 힘을 다해 간신히 그를 밀어 냈다. 그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했다. 이진은 뒤늦게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과감하고 대담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제 책임질 사람이 누구예요?’

승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겨우 맛본 쾌락을 가까스로 억누르듯 눈으로 이진을 탐하며 옭아맸다. 그리고 이진은…….

“유이진!”

허억, 이진은 깊은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햇살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찌르며 아침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쫓기는 꿈이라도 꾼 건지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너 요즘 왜 이래? 어디 아파?”

미열이 이진의 이마를 짚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자면서 무슨 땀을 이렇게 많이 흘렸어?”

부스스 몸을 일으켜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식은땀이 잔뜩 묻어나왔다. 이진은 미열에게 악몽을 꾼 것 같다고 말하고는 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지흔이 또 귀신 얘기를 하다가 미열에게 한 대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솨아아, 미지근한 물이 머리를 적셨다. 굵은 물줄기에 피부에 맺힌 열기가 씻겨 내려갔다.

선을 넘었다. ‘대체 왜? 어쩌다?’ 여러 번 자문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선승현이 날 포기하는 게 싫어서. 그래서 승현이 존중하며 물러섰던 선을 성큼 뛰어넘고 달려갔다. 고집과 자기방어가 똘똘 뭉쳐 있던 이진이 안전한 보금자리이자 스스로를 구속하던 감옥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뛰쳐나갔다.

승현이 먼저 자신을 외면했다는 서운함은 정말 단 한순간이었다. 그에게 닿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이진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했다. 남들의 시선, 대결 구도, 대본이 짜인 방송, 그들을 걱정하는 동료와 팬, 그리고 승현과의 관계. 이것 모두가 일이 벌어진 자리에서 제대로 매듭짓지 않고 도망쳐 버린 이진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그러나 어디선가 스멀스멀 기어 들어와 이진의 사고를 지배하는 또 다른 상념이 있었다.

‘기분 좋았지.’

무심코 손끝으로 입술을 짚었다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미지근한 물 아래로 뺨이 화끈화끈 열을 뿜었다.

‘한 번 더 해도 괜찮을지도…….’

불쑥 든 생각에 이진은 제 머리를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주먹에 맞은 머리통이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했다. 갑자기 어젯밤 벽에 밀어붙여지며 뒷머리를 쿵 찧은 게 떠올랐다.

망했다. 어떻게 해도 어제의 키스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정말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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