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이진은 그 뒤로 승현을 틈틈이 관찰했다. 의심이 확신이 된 것은 선승현이 이우진과 부딪히고도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걸 보았을 때였다. 심지어 승현은 이진과 우진 사이에 껴 있을 때 굳이 좁디좁은 우진 쪽으로 조금 더 이동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화나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승현이 접촉을 피하는 것뿐 아니라 아예 이진을 바라보지조차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눈을 한번 안 마주치냐.’
관심조차 주지 않는 남주헌이나 제이슨, 이우진 같은 애들과도 수시로 눈이 마주치는데 이렇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단 건 한쪽이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증거였다.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일찍 자러 가자.”
승현이 파장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진이 그를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이진은 터덜터덜 교실 문을 나섰다. 얼마나 급하게 간 건지 복도엔 승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다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먼저 떠나 버린 그가 야속했다. 남은 이들은 이진과 친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까 차갑게 대해서 그런지 우진도 쉬이 다가오지 못해 이진은 홀로 복도를 걸었다.
“형.”
그때 뒤에서 달려온 제이슨이 이진을 붙잡았다. 뜻밖의 부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진의 팔꿈치를 잡은 제이슨이 그를 다짜고짜 카메라가 없는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 있는데 설명도 않고 밀어붙이는 통에 이진은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신경질을 냈다.
“왜!”
“어제 선승현이 고백했죠.”
대뜸 물어 온 말에 이진이 경악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제이슨은 이진의 표정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것처럼 양손을 펼쳐들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음을 보여 주는 제스처였다.
“새벽 운동 하려고 나왔다가 들었어요.”
“거짓말! 그 정도로 새벽은 아니었거든?”
“알았어요. 담배 피우려고 나왔다가 들었어요.”
경위는 중요치 않았다. 결국은 엿들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나가다 들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던가? 어쨌든 제이슨이 이걸로 뭔 짓을 하려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이진이 경계 띈 눈빛으로 제이슨을 노려보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화를 냈다.
“이봐요! 나 그렇게 쓰레기 아니거든요?”
“넌 근데…….”
“의심하는 거 인정해요! 근데 아니라고요!”
제이슨은 몹시 억울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덮어 두고 의심한 게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다짜고짜 끌고 와서 선승현이 고백한 걸 들었다고 하는데 이진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뒷목을 때려 증거 인멸을 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진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어쨌든 형이 깠으니까 선승현이 저 지경인 거 아니에요?”
“걔가 뭐.”
“정신 나갔잖아요!”
“별로 그래 보이진 않았는데…….”
제이슨은 승현이 제대로 집중을 못한다며 짜증을 냈다. 그리고 그게 전부 이진의 탓인 것처럼 돌렸다.
“형 수작이죠.”
“뭐?”
“이번 라운드에 걔 이겨 보려고 고백하게 유도한 거잖아요.”
“뭐어?”
제이슨의 머릿속 이진의 이미지는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걸까. 그는 이게 전부 사악한 유이진의 계획이고, 선량한 선승현이 거기 걸려들었을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제이슨이 생각보다 선승현에게 호의적이라는 쓸데없는 정보만 얻었다.
“고백 받아 줄 것처럼 해 놓고서 안 받아 준 거잖아요!”
“야, 너 말 함부로 할래?”
“우리 팀 지면 당신 탓인 줄 알아!”
“너야말로 나 열받아서 앓아눕게 만들려고 이래?”
“차인 사람이 앓아눕지 찬 사람이 왜 앓아누워!”
둘은 한동안 소리를 질러 대며 싸웠다. 웬만하면 냉정하고 침착한 카리스마를 가진 유이진으로서 고고한 태도를 고수하고 싶었지만 상대방이 유치하고 시끄럽게 구니 똑같이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진이 뒷목을 잡으며 비틀대고 말았다. 제이슨은 이진이 아침 드라마 속 회장님처럼 뒷목을 잡고 쓰러질까 봐 깜짝 놀라며 부축했다.
“왜 이렇게 몸이 약해요!”
“귀 따가워! 좀 조용히 해라!”
“지금 목소리 큰 게 누군데!”
또다시 2차전이 벌어질 뻔했으나 이번엔 제이슨이 한발 물러섰다.
“어쨌든, 형이 책임지고 이 일 수습해요.”
“내가 뭐 어떻게 해. 걔 마음의 문제인데.”
“형이 안 받아 준 건데, 그게 왜 선승현 마음의 문제예요!”
“야, 좀!”
이진은 도돌이표처럼 자꾸 되돌아오는 대화에 혼란을 느꼈다. 제이슨은 몇 번이나 선승현을 책임지라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진이 대체 뭘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너 설마, 지금 나한테 선승현이랑 사귀라고 하는 거야?”
“나 여태까지 누구랑 얘기했냐!”
이번엔 그가 뒷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진은 제이슨의 답답함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겠어서였다.
“대체 왜?”
“뭐? 왜냐니. 형도 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잘 모르겠어.”
“에엥?”
제이슨은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자신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꼬집어 내지 못했다.
“고백까지 유도해 놓고 뭘 잘 모르겠단 거야.”
“그건…… 걔가 계속 답답하게 구니까.”
“그럼 선승현이랑 사귈 생각이 전혀 없다고?”
이진은 이유 없이 살짝 발끈했다. 제이슨의 말을 듣다 보면 자신이 정말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자세한 사정을 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진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건 승현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진이 어떤 망설임을 가지고 있는지 승현은 알 방법이 없다. 이번에도 이진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도 않은 채 승현이 스스로 알아채주길 바랐다. 그렇게 자책했는데 또 오랜 후회의 반복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진이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다. 남들 눈에는 처량해 보일 만한 모습이었지만 제이슨은 되레 화가 돋웠는지 발을 쿵쿵 구르기까지 했다. 이진은 자신이 잘못한 건가 싶어서 잔뜩 의기소침해졌다. 제이슨에게 마주 화내지도 않고 어깨도 축 늘어뜨렸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젠데!”
“우린 아이돌이잖아.”
“돌겠네.”
이진은 자신이 승현의 말을 빌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작 본인은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면서 무심코 승현이 스쳐가듯 했던 말을 변명거리 삼았다.
제이슨은 답답한지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여 바닥을 탁탁 치더니 이진을 데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 코앞에 있는 자판기로 데려가 돌연 차가운 캔 음료를 하나 뽑아 줬다.
“이봐요. 아이돌 할 거라 사귈 맘은 없지만 선승현이 고백하는 건 듣고 싶었어?”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그럼 데뷔 안 하면 사귈 거야?”
“뭐? 그게 또 어떻게 그렇게 돼.”
“아이돌인 건 별로 상관없는 거네, 그럼.”
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가만 지켜보던 제이슨이 직접 뚜껑을 따서 다시 쥐여 줬다. 이진은 차가운 캔 표면의 감촉을 느끼다가 한 모금 들이켰다.
“사실, 내가 대답을 망설였어.”
“들어서 알아. 보아하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랬냐고. 우리 팀이 괜히 물먹잖아. 페어플레이가 아니지!”
“아니, 대답 좀 망설일 수 있는 거 아니야?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길 어떻게 생각하냐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
당을 충전한 이진이 다시 버럭 화를 내자 제이슨이 마주 소리쳤다.
“사귀자고 해야지!”
이진은 일상 속에서 ‘Fucking’이라는 욕설을 사용하는 사람을 난생처음 봤다. 제이슨은 평소 자제하던 영어권 욕까지 사용할 정도로 흥분했다. 새삼스럽지만 참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잖아. 너도 알다시피 나랑 걔는 한 번 싸웠던 사이고, 방송에서도 계속 라이벌처럼 나와야 하니까. 그리고 대답을 망설였던 걸 보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보지. 걔도 딱히 내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이진은 횡설수설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하나씩 이유를 내어놓을수록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사실만 명확해졌다. 그런데 제이슨은 말 속에서 무언가를 포착한 듯 검지를 들고 이진을 가리켰다.
“다시 말해 봐.”
“내 대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곱씹고 나자 이진도 생각이 온통 막혀 버린 부분이 어디인지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승현이 먼저 이진을 외면했다. 줄곧 그게 걸렸다. 그게 서운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자꾸만 제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이슨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았는지 의기양양하게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형, 만약 선승현이 조금 더 기다렸더라면 사귀자고 할 거였지?”
그러나 이진은 속 터지는 말로 한 번 더 제이슨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잘 모르겠어.”
“뭘 또 몰라! 왜 자꾸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망설였단 건 변함이 없잖아. 난…… 확신이 없는 거야. 이런 상태로 누굴 만나. 아이돌 해서 돈이나 벌래. 성공해서 다 되갚아 줄 거야.”
이진이 울적하게 중얼거리자 참다못한 제이슨이 “야!”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몸이 뒤로 밀려나고 손에 쥔 음료수가 흘러넘쳤다. 이진은 갑작스런 폭력에 당황해 반격도 못 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랄하네. 그렇게 확신이 없으면 키스나 해, 이 겁쟁이야! 주둥이를 맞대고도 아무 감각이 없으면 깨끗이 네가 쓰레기라고 인정하고 그냥 하차나 해! 근데 뭔가 느껴지잖아? 그럼 네가 저지른 일은 똑바로 책임지고 하차해!”
결국 어느 쪽이든 하차하란 소리였다. 제이슨은 미적지근한 이진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잔뜩 화를 쏟아 냈다. 그러다 끝내 이진의 손에서 음료수 캔을 빼앗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벽에 부딪히며 쾅, 소리를 낸 캔이 쓰레기통 바닥에 떨어지며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당황한 이진이 몸을 뒤로 물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소리가 컸는지 제이슨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진과 쓰레기통을 번갈아 보다 고함을 빽 지르고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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