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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24화 (124/173)

124화

“두 번째 대결! 핑크 팀 정하늘, 블루 팀 유이진 앞으로!”

앞서 경기를 펼쳤던 두 사람은 우월한 신장을 이용해 경기대에 훌쩍 뛰어 올라갔지만 그들보다 키가 작은 하늘은 조금 버거운 듯 끙끙 기어 올라갔다. 이진은 멋있게 올라가고 싶어 머뭇거리다가 블루반 무리 속의 찬우와 눈이 마주쳤다.

장난스러운 표정이 된 찬우가 돌연 미열과 속닥거렸다. 무슨 작당을 했는진 몰라도 곧바로 찬우와 비슷한 표정이 된 미열이 또 지흔에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총 네 명의 블루반 학생이 우르르 달려와 이진을 번쩍 들어올렸다.

“보스 올라가십니다!”

“내려놔!”

갑자기 몸이 번쩍 들린 이진이 기겁하며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장정 네 명의 힘은 이길 수 없었다. 체념한 이진은 최대한 멋있어 보이는 자세로 원통 위에 몸을 올렸다.

“형, 살살 부탁할게요.”

하늘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은근슬쩍 애교를 부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진에겐 통하지 않을 애교였다.

“준비하시고, 시작!”

이번 선공은 블루팀이었다. 그리고 노래는 난데없는 동요가 흘러나왔다.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마이크를 쥐고 있던 미열이 얼결에 첫 소절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다음 가사를 몰라 당황한 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마이크를 넘길 사람을 찾아 댔다. 이진은 곧 공격권을 넘겨줘야 함을 눈치채고 있는 힘껏 베개를 휘둘렀다.

“하얀 털옷을 입은 예쁜 아기 곰.”

“언제나 너를, 바라보면서! 작은 소망 얘기하지.”

다행히 남주헌이 마이크를 넘겨받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거친 이미지의 주헌과 사뭇 다른 목소리라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너의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해.”

이진은 스타카토로 끊기는 부분까지 완전히 재현하는 주헌의 목소리가 귀에 몹시 거슬렸다. 몸이 휘청이지 않게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베개를 들어올렸다.

“아야앗!”

그런데 이진이 휘두른 베개가 닿기도 전에 하늘은 엄살을 피우며 경기대 아래로 뚝 떨어져 버렸다.

‘의지가 없었구나…….’

하늘은 퍼플반 무대를 탐내기보단 본 무대에 전력을 다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괜한 사람을 상대로 승부욕을 부린 것 같아 이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진이 내려올 때에도 블루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진은 다시 부끄러운 꼴을 겪고 싶지 않아 친구들을 향해 마구 베개를 휘두르다가 반대쪽으로 픽 돌아간 기둥 때문에 경기대 밑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이진아, 그냥 우리의 부축을 받지 그랬어.”

깔깔깔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이 장면은 편집도 안 되고 방송에 나올 게 분명했다. 이진은 화끈 열이 오르는 뺨을 붙잡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라운드는 이우진과 강지흔의 대결이었다. 이번엔 핑크반이 선공이었으나 중간에 가사를 한번 틀려 공격권이 블루반으로 넘어왔다. 이진은 마이크를 잡고 열성적으로 노래를 불렀고, 지흔은 이진의 기운을 받아 아주 빠르고 매섭게 베개를 휘둘렀다.

“야, 유이진 대박. 버퍼 같아.”

“전장의 보컬리스트. 공격력 30퍼, 크리티컬 확률 25퍼 증가…….”

그러나 이진의 공격력 상승 노래에도 불구하고 지흔은 제 힘에 제가 미끄러져 어이없게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차례로 승패가 결정지어졌다. 1차전 승패가 판가름 나자마자 곧장 2차전이 시작됐다. 이번엔 개인전이기 때문에 1차전보다는 공수 교대가 빨리 일어났다. 베개를 휘두르면서 가사를 놓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진은 2차전에서 승현과 붙을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이번엔 랜덤으로 대진표가 짜였다.

“You raise me up!”

이진은 운 좋게 템포가 느린 곡이 걸려 고음을 지르면서 마구 베개를 휘두를 수 있었다. 덕분에 상대방은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다 뚝 떨어지고 말았다.

반면 선승현은 허동규를 상대하느라 꽤나 고전했다. 그는 워낙 맷집이 좋아 승현이 베개로 툭툭 치는 것 정도로는 떨어뜨릴 수 없었다. 스스로의 힘을 못 이겨 휘청거리거나 경기대가 돌아가면서 균형을 잃길 기대해 봐야 했는데, 노래를 부르면서 동시에 작전을 짜다 혼란이 온 승현은 오히려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나 했다.

승현이 간신히 기지를 발휘한 것은 맞을 만큼 맞고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와, 매트릭스!”

“저렇게 해서까지 이겨야 하다니.”

베개를 방어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던 승현은 타이밍을 재다가 베개가 날아올 타이밍에 몸을 뒤로 아예 젖혀 버렸다. 마치 가상현실 영화 속에서 허리를 꺾어 총알을 피하는 주인공같이 유연하고 재빠른 동작이었다. 잘 버티던 동규는 자신이 휘두른 베개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균형을 잃어 탈락했다.

결국 승현과 함께 공연 준비를 하고 싶었던 이진의 비밀스런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기에는 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다. 2차전 승리자는 게임이 끝나자마자 포지션이 적힌 제비를 뽑았다.

“유이진, 센터 포지션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퍼플반에 합류한 건 이진이었다. 이진은 경기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제비를 뽑고 카메라 앞에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갑작스레 중요 포지션을 맡는 게 부담되긴 했지만 센터로서 얻는 이득이 훨씬 클 것이라 기쁘게 받아들였다.

“메인래퍼 포지션으로 합류한 이우진입니다!”

다음은 우진이었다. 우진의 랩 실력은 춤이나 노래와 비슷하게 아주 못하진 않는 정도였다. 그래도 여기까진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진도 아직까지는 승현과 함께 연습을 할 수 있다는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하……. 리드 보컬 제이슨입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다음으로 게임을 끝낸 제이슨이 굉장히 자신 없는 어투로 말했다. 그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모두들 방금 전 게임으로 제이슨이 자신없어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이진도 슬슬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승현, 메인 보컬 포지션입니다.”

뒤이어 제비를 뽑은 승현도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처음에 비해 승현의 보컬 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 음역대 내에서의 이야기였다. 메인 보컬처럼 폭 넓은 음역은 소화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연달아 이어지는 자기소개에 이진의 위기감은 실제 위기가 되어 돌아왔다.

“임채일, 서브 보컬1입니다.”

“서브 보컬2 남주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브 보컬3 박준현입니다!”

폭탄에, 폭탄에, 폭탄이 겹쳤을 땐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지난날의 악몽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진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

게임이 끝난 뒤 퍼플반 7명은 공연 준비를 위해 따로 주어진 교실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형! 나만 딱 믿어요. 저번처럼 막 싸우거나 불편하게 안 할게요!”

임채일이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채일과 제이슨은 아까부터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1라운드 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걸로 촬영장 내에서 유명했다.

‘아, 그래서 아예 눈을 마주치지 않기로 한 건가.’

“그래, 형. 쩨쩨하게 과거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자.”

남주헌도 나서서 입을 털었다. 이진은 과거의 일을 담아 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객관적 사실과 경험에 근거해 이 팀은 망했다고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유이진 형이 여기 대장이에요? 벌써 서열 정리 끝난 거?”

박준현이 껄렁대는 말투로 깐족댔다. 서열 정리가 안 끝났으면 본인이 서열 1위라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이진은 나이로 보나 인기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어쨌든 제 위는 아닐 게 분명한 하늘의 친구에게 눈을 돌렸다. 이진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준현이 꼬리를 말고 눈을 피했다.

이진은 차마 대놓고 한숨을 쉴 수 없어 깊은 심호흡을 반복했다. 무대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아 멤버 개개인의 실력을 상승시키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차라리 안심이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형부터 맞춰 보고 해산하죠. 디테일한 안무는 각자 연습해요. 동선 겹치지 않게 매일 11시부터 2시까지, 5시부터 7까지 하루 두 번씩 모여서 단체 안무 확인하고요. 본 무대 연습이 있어도 이 시간은 무조건 빼서 이리로 옵시다. 핑크반은 내가 조율할 테니까 블루반은 형이 조율해 줘요. 대신, 마지막 날에는 리허설 한 번만 하기로 해요. 어때요?”

리더 경험이 풍부한 승현이 적절히 일정을 정리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이진에겐 꼬박꼬박 대들던 놈들이 승현의 말엔 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컬도 각자 알아서 완성해서 오자. 많은 건 안 바랄 테니까 가사 제대로 외워서 부르기만 해. 어차피 재밌자고 하는 무대인데.”

“아, 혼자만 살려고 그러죠. 매정해라.”

“그래도 제이슨 쟤는 형이 좀 봐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진이 한마디를 보태자 방금 전까진 아무 말도 없던 녀석들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던 제이슨도 저격을 당하자 발끈해서 “뭐?” 하고 신경질을 냈다.

“일주일도 안 남은 상황에 각자 생존해야지 자꾸 뭘 기대해? 대형 연습하게 일어나서 책상이나 밀어.”

승현이 차갑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진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오던 이들도 꾸물꾸물 일어나 책상을 밀고 연습할 공간을 확보했다. 속보이는 태도에 뒷목이 뻐근해졌다.

“이진이 형, 너무 신경 쓰지 마. 형이랑 친해 보이고 싶어서 저러는 거니까.”

우진이 책상을 미는 이진에게 다가와 슬쩍 속삭였다. 이진은 우진을 힐끗 보고 무심히 답했다.

“괜찮아. 신경 안 써.”

“아, 음. 응. 알았어…….”

이진의 간결한 대답에 우진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우진이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저들의 수법이 뭔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이진과 적당한 갈등을 빚고 개인 인터뷰를 따내 뭐라도 어필하려는 속셈이겠지. 이미 2라운드에서 당한 적 있어 적당히 감이 왔다.

“자리에 서 봐.”

“야, 옆으로 좀 가지?”

“자리가 좁은 걸 어떡해. 좀 참아.”

“가볍게 동선만 맞출 거니까 양보 좀 하자.”

교실 TV에 영상을 띄워 두자마자 몇몇이 티격태격 싸움을 벌였다. 작은 다툼이지만 그런 한두 마디가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지연시켰기 때문에 승현이 끼어들어 제지를 했다. 간신히 대형을 맞춰 선 뒤 다 같이 입으로 구령을 붙여 가며 동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이진은 맨 뒤에서 모두를 가르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한동안 제자리에서 안무를 하다가 가로로 길게 늘어서는 대형으로 이동했다.

평소 사용하던 연습실에 비하면 교실이 작았기 때문에 움직이다 보면 아무래도 접촉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부딪힐 때마다 불쾌한 표정을 짓는 임채일이나 제이슨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진은 접촉 사고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

그때 툭, 하고 이진의 어깨와 승현의 등이 부딪혔다. 이진은 별생각이 없었으나 승현이 유독 화들짝 놀라며 멀어졌다. 그 반응이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연습이 반복되며 어쩔 수 없이 신체 일부가 부딪히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승현이 묘하게 과민 반응을 하며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얘 지금 나 피하는 거야?’

잠깐의 접촉 외에는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나 왠지 평소답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하루 종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선승현이 삐졌을 때 행동과 몹시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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