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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23화 (123/173)

123화

‘뭐야?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방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진은 로맨틱한 기류를 원했다. 원래 이런 순간엔 그래야만 하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승현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충격적인 말을 했다.

“죄송해요. 형이 많이 곤란하셨겠네요.”

“뭐?”

“앞으로는 자제할게요.”

기나긴 인고의 끝에 맺은 결실을 드디어 음미하나 했더니, 이진의 감동을 승현의 건조한 목소리가 모조리 깨부쉈다. 정말로 어디선가 ‘쨍그랑!’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승현의 말에 충격받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이진은 불현듯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얘랑 뭘 하고 싶던 거지? 대체 뭘 바라고 이 말을 꺼낸 거야?’

이진이 아니었다면 승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집착을 보이거나 이유 모를 행동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을 터였다.

“괜히 촬영하는데 지장 갈 뻔했네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잠깐, 승현아.”

“제 마음이 일방통행이라면 제가 접을게요. 형이 감당해 줄 이유는 없으니까요.”

승현이 부드럽지만 냉정한 태도로 선을 긋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 넘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터벅터벅 기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이진은 멀어지는 신형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이렇게 가 버린다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가뜩이나 생각이 많던 이진은 머릿속이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갑자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한 번 더 매달릴 만큼 절실하지 않은 건가. 그렇게 쉽게 접는다고 해도 될 만큼 가벼운 마음인데 나 혼자 너무 큰 기대를 했니? 아니면 답을 너무 질질 끌었나, 내가 내 감정에 너무 확신이 없었나 봐.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줬으면……. 혹시 내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라 사고를 마비시켰다. 이진은 선승현이 자신의 답을 직접 들어보지도 않고 뒤돌아선 걸 믿을 수 없었다.

‘선승현, 정말로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는 거야?’

방금 전까지 이진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받아 온 상처들이 무의식중에 남아 이진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승현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다. 또 승현 역시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기에 이진을 챙길 여유가 없단 것도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진은 발이 땅에 못 박힌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기숙사 정문까지 걸어갔던 승현이 갑자기 몸을 돌리고 이진을 향해 외쳤다.

“저 안 붙잡을 거예요?”

뒤를 돌아본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진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물방울이 펑 터진 것같이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짐을 느꼈다. 이진은 늦었지만 승현을 잡기 위해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리고 원망을 담아 그의 옆구리를 한 대 때렸다.

승현은 맞아 놓고도 실실 웃으며 되레 이진을 괴롭혔다. 진짜 매정하다, 어떻게 그대로 보낼 수가 있냐. 평소처럼 투덜대는 말투가 아무렇지 않게 들렸다. 방금 전 차가운 목소리도 정말 이진을 놀리기 위한 장난일 뿐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이진의 기숙사 방문 앞에 선 그가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제대로 정리하려면 저한테도 시간이 필요해요. 어쨌든 형을 더 곤란하게 하지 않을게요.”

지금보다 거리를 두겠다는 뜻이었다. 고백을 거절당한 셈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진은 어디가 문제인지는 명확히 꼬집어 내지 못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자요.”

이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를 방 안으로 집어넣은 승현이 짧은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인사에 답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이진은 터덜터덜 걸어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이불 속에 파고들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승현의 카디건을 걸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어떻게 한번만 찔러보고 포기할 수가 있어? 요즘 애들 근성 왜 이래!’

이진은 승현의 카디건에 대고 불만을 토했다. 방금 전 느꼈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녹아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승현이 채 하루도 입지 않은 카디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떠한 충족감이나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유이진,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해해?”

유난히 힘든 아침이었다. 늘 칼같이 새벽에 기상해 빠릿빠릿하게 준비를 하던 이진이 오늘은 침대 밖으로도 나오지 않고 뭉그적거리자 이상함을 느낀 미열이 와서 아는 척했다. 이진은 대답할 힘도 없었지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답했다.

“잠을 설쳤어.”

“형도? 사실 나도. 어제 가위 눌린 것 같아. 귀신 소리 같은 게 막 들렸다니까? 밖에서 발소리랑 사람 대화 소리 같은 게 막.”

“지흔아, 제발 닥쳐 주라…….”

지흔이 눈을 빛내며 끼어들자 미열이 지친 듯이 말했다.

“어제 못 들었어? 막 누가 웃는 소리랑.”

“나도 잠결에 들은 것 같긴 한데. 남자 목소리.”

“헐, 맞아! 남자 둘이 대화하는 소리!”

이번엔 박하영까지 합세했다. 이제 미열은 양손으로 귀를 막고 주기도문을 외우기까지 했다. 이진은 시답잖은 말장난에 어울려 줄 마음이 들지 않아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결국 지각 직전까지 배짱부리다가 아슬아슬한 시간이 되어서야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예고한대로 컨셉과는 상관없는 평범한 연습이 스케줄의 주를 이뤘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강당에 가서 음악에 맞춰 공놀이도 하고, 근력 운동도 했지만 다 합해도 두 시간 정도밖에 안 됐다. 나머지 시간엔 포지션별로 나뉘어 공연 준비를 했다.

“아카펠라 하자니까?”

“이건 무조건 뮤지컬 편곡이라고.”

“어쿠스틱이 더 잘 먹힐 것 같은데.”

무대 구성과 편곡에 대한 의견도 활발히 오고 갔다. 그러나 이진은 좀처럼 집중을 못 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아예 여름 노려서 EDM은 어때?”

“실성했니?”

“이진이 형! 형은 어떤 것 같아요?”

정신을 놓은 이진에게 누군가 물어 왔다. 이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아주 비극적으로 하자. 듣다가 슬퍼서 울어 버리게 만들자.”

“오…… 안 물어볼게요, 형. 얘들아, 역시 EDM 어때?”

그리고 빠르게 밤이 찾아왔다. 파자마를 입고 강당에 모인 참가자들의 손에 베개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번 게임은 파자마 파티의 꽃, 베개 싸움이었다.

“무슨 남고생이 파자마 파티야.”

“글쎄, 수학여행 때문에 그런가?”

“수학여행의 꽃은 일탈이지.”

이진은 제각기 떠드는 학생들 틈으로 기운 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진의 상태가 어떻든 촬영은 쉼 없이 진행됐다.

이번 게임의 이름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로 원통형 쿠션 위에 앉아 베개 싸움을 하다가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 흔한 예능용 게임이었다. 앞선 게임들이 그랬듯 이번에도 당연히 변형된 규칙이 적용됐다.

“같은 반 친구들이 제시된 노래의 가사를 틀리지 않고 부르는 동안만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반 대항전의 묘미를 살리기 위한 규칙이었다. 선공과 후공을 정한 뒤 랜덤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 선공반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마이크를 쥘 수 있으며 한 소절 단위로 옆 사람에게 넘기기도 가능했다.

가사를 틀리지 않고 부르는 동안은 무한으로 공격할 수 있으나 가사를 틀리는 순간 공격권이 넘어간다. 그럼 다시 상대편에서 가사를 틀리지 않는 한 방어만 가능했다.

1차 게임에서 14명이 남으면 그들끼리 다시 게임을 하는데, 이번엔 같은 반 도움 없이 직접 노래를 하며 공격을 해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7명이 특별 공연을 하는 퍼플반에 합류하게 된다.

규칙을 듣는 참가자들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아이돌 지망생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윈올 정체성 도전 천만 곡인 부분인가요?”

“난 벌써 츄즈원 가사 다 까먹었는데.”

“넌 그때 보컬 파트가 없었잖아.”

그들이 까먹었다고 한 ‘Choose one’은 다름 아닌 1라운드 경연곡이었다. 이진은 중하위권 참가자들의 한가로운 잡담을 들으며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경쟁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자 이진의 몸에도 절로 활기가 돌았다.

다행히 이진은 어지간하면 가사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팀원들이 발목만 잡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퍼플반에 합류할 수 있을 듯 보였다. 퍼플반 공연을 준비하면 안 그래도 촉박한 연습 시간을 최종 점수에는 거의 도움도 안 되는 곳에 빼앗기게 되겠지만, 다른 참가자에게 자리를 넘겨줬다가 순위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것보단 나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선승현이랑 같이…….’

이진은 고개를 돌려 준비 운동을 하는 승현을 바라봤다. 오늘은 종일 승현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평소라면 눈인사라도 한번 했을 텐데 승현은 아예 이진을 외면했다. 이진은 속으로 승현의 욕을 했다.

‘근성 없는 자식.’

게임은 순위대로 진행이 됐다. 상위권 참가자의 독식을 막기 위한 안배 같기도 했고 최소한의 상위권 참가자를 밀어 넣으려는 꿍꿍이 같기도 했다.

“첫 번째 대결! 핑크팀 선승현, 블루팀 한찬우 앞으로!”

분홍색 파자마를 입은 승현과 하늘색 파자마를 입은 찬우가 몸을 훌쩍 날려 경기대 위에 걸터앉았다. 귀여운 옷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장신의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투지를 불태웠다.

“준비하시고, 시작!”

가위바위보 결과에 의해 선공은 핑크 팀이 가져갔다. 첫 곡부터 최신 팝송이 흘러나왔다.

“피디님, 대체 저희한테 왜 이러세요!”

핑크 팀과 블루 팀 모두 당황해서 제작진 쪽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 요즘 몸을 사리던 제이슨이 잽싸게 마이크를 낚아챘다.

“I got this feeling inside my bones.”

제이슨은 썩 좋은 보컬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영어 가사를 숙지하고 있었다. 때를 노리던 선승현이 망설임 없이 베개를 휘둘렀다. 퍽, 솜뭉치에서 나는 것치곤 둔탁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찬우는 베개로 열심히 방어했지만 승현도 만만치 않게 날렵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조금씩 옆으로 돌아가는 원통 위에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두 사람의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I can't stop the feeling!”

노래는 순조롭게 코러스 부분까지 향했다. 결국 1분 30초가량 얻어맞은 찬우는 결국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제이슨의 찢어질 듯한 가성을 들으며 탈락하고 말았다.

“억울해요!”

찬우가 항의했다. 정말 억울할 법도 했다. 하지만 이진은 찬우를 위로할 수 없었다. 다음 차례가 바로 이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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