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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22화 (122/173)

122화

“그러게요. 왜 궁금했지.”

“뭐?”

‘얘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이진은 황당함과 분노를 가득 담아 승현을 정면으로 노려봤다. 승현은 자신을 향한 매서운 시선에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어, 들을 땐 엄청 궁금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승현은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마치 이진에게 이곳을 때리면 된다고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발끈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긴 왜야! 너, 네가 날……!”

“네?”

그리고 승현에게 진실을 고하기 위해 삿대질을 하다가 순간 망설임이 찾아와 멈칫하고 말았다. 승현이 멍청한 표정으로 멍하니 이진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이진은 필사적으로 따져봤다. 새벽에 만나서 단둘이 산책 가자고 하고, 바람이 차갑다고 겉옷을 벗어 주고, 마침 이진이 남자를 좋아할 것 같은 심증이 생겨서 대놓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런 주제에 그 이유를 모른다? 스스로에게 관심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이쯤 했으면 승현도 진실을 알아야 한다. 계산을 끝마친 이진은 정당한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네가 날 좋아하니까 그렇지!”

이진의 한과 설움이 담긴 외침이 고요한 운동장에 가득 메아리쳤다. 동시에 반달처럼 늘 반쯤 감겨 있던 승현의 눈동자가 점점 커다래지더니 보름달만큼 동그래졌다.

“제가 형을요?”

이 사실이 그렇게 충격적인가. 이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선승현의 연애 세포는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일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제가 형을, 그러니까…… 연애 감정으로요?”

“그래, 이 바보야! 잘 생각해 봐!”

이진은 마치 자신이 감정을 강요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승현은 정말로 기억을 되짚어 보기라도 하는지 초점 없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조금 붉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당연히 그렇겠지!’

이진은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할 수가 없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곤 승현의 생각을 돕기 위해 천천히 말했다.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반응이 없으면 귀찮게 굴어서라도 관심을 끌고 싶고?”

다시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찮아하면 너도 속상하지.”

이번엔 여러 번 끄덕거렸다. 까딱까딱 위아래로 움직이는 머리통이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힘들 때…….”

“형, 잠깐만요!”

승현이 당황하며 이진의 말을 끊었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온 걸까, 답지 않게 허둥대는 모습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간 이진에게만 털어놓았던 비밀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가 가장 위로를 받고 싶은 상대는 다름 아닌 유이진 자신이었다.

이진은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에 뿌듯한 기쁨이 차올랐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니.

“그게 다 제가 형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요?”

“그럼 뭐겠어?”

승현은 손으로 뺨과 이마를 식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중요한 순간에 말을 고르며 애를 태우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진은 늘 그 점이 답답하게 여겨졌으나 지금은 오히려 최대한 늦게 입을 떼길 바랐다.

몇 겹으로 꽁꽁 둘러싸인 상자를 전부 제거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알록달록한 포장지. 그리고 그 안에 감싸인 선물을 뜯기 직전, 설레는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저는 그냥 다 형이 그런 탓인 줄 알았죠.”

간신히 그의 입이 열렸다. 두 뺨이 상기되어 평소보다 훨씬 생동감 있어 보였다. 이진은 마른 목에서 쇳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내가 뭐?”

“형이, 너무 순진해서…….”

승현이 다시 목소리를 줄였다. 달빛을 받은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승현은 한동안 이진을 응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그냥, 형이랑 같이 데뷔하고 싶은 게 전부예요.”

그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승현의 고백은 대단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이진에게 구애하기 위함이 아닌 지금 그가 겪고 있는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고백이었다. 이진으로서는 몹시 답답한 소리였지만 승현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이 평화로운 순간이 모두 꿈이 되어 흩어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고, 이진이 데뷔해야만 비로소 이 꿈이 현실이 되어 발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승현은 늘 그런 불안에 시달렸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이 끝나는 것 외에는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함께 데뷔하고, 그리고……. 그 외의 일들은 이후에 생각하기로 무의식중에 결정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말을 이진에게 할 수는 없었다. 이진은 이미 충분히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승현은 그에 대해서 더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되새기고 싶지 않을 만큼 두려운 생각 대신 이진을 향한 평범한 심경을 고했다.

“물론 이왕이면 형이 나랑 제일 친하고, 나한테만 잘해 주고. 또 그걸 다들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이런 게 좋아하는 건가요?”

이진을 향한 물음이 잠시 공기 중을 배회하다가 흩어졌다. 이진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멀끔히 승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승현의 시야에 유이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염색 때문인지 신비한 빛을 내는 머리카락, 앞머리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동그랗고 보기 좋은 이마. 단정한 눈썹과 길고 빽빽한 속눈썹, 동그랗게 휘어져 선한 인상을 주는 눈매와 그 아래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 곧게 뻗어 보기 좋은 콧대와 갸름한 턱선까지. 모난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승현은 반쯤 넋이 나간 채 이진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봤다. 화낼 땐 무섭지만 사실은 아이같이 다양한 표정이 숨은 뺨과 도톰한 입술, 입을 벌리고 웃을 때면 드러나는 고른 치열의 치아.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촉촉하고 말랑해 보이는 선홍빛의 혀…….

‘아.’

승현은 비로소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자각함과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는 통에 그는 고개를 숙여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드디어 스스로 답을 찾은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내기 전까지 승현은 이 마음이 아주 평범하다고만 생각했다. 대상이 유이진이니까, 유이진이 특별하니까 이런 마음이 드는 거라고 가볍게 여겼다.

‘만약 유이진이 누군가랑 키스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 정말 슬플 거…… 아니, 그 자식을 슬프게 만들어 줘야지. 어딜 감히.’

승현은 갑자기 화가 불쑥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맹세코 친구에게는 한 번도 이렇게까지 집착해 본 적이 없었다.

“아, 순진한 유이진한테 괜히 장난쳤다가 벌받은 건가.”

자조하듯 혼잣말을 한 그가 이진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진은 혼돈에 빠진 선승현을 가만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다시 옆자리에 앉았다. 승현이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형. 제가 정말 형을 좋아하는 거라면, 전 이게 첫사랑이에요. 알아요?”

“……응.”

“형이 책임져야 한다고요. 아는 거 맞아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현은 “돌겠네.” 하고 중얼거리더니 몸을 젖혀 벤치에 완전히 기대앉았다. 이진도 그를 따라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뿌연 하늘을 응시했다.

“요망한 유이진.”

“자꾸 뭐래!”

“요망한 유이진한테 홀려 버렸어.”

이진더러 들으라는 듯 한탄했다. 그는 더디지만 천천히 조금씩 이진을 향한 감정의 실체를 인정해 가고 있었다.

“전 원래 형이랑 친해질 생각 없었어요. 이것도 모르죠? 다 형한테 복수하려고 그런 거였다고요. 나한테 대체 왜 그랬어요? 저 그때 진짜 속상했다고요.”

“미안…….”

승현의 진심은 그의 목소리를 타고 이진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런데 유이진이 바보같이 착해 가지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조금씩 나한테 마음을 여는 거예요. 엄청 사나운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정에 약하고 온정도 넘치는 사람이라.”

승현 시점에서 바라본 그날의 기억들은 생소하지만 익숙했다. 이진은 늘 불분명하기만 하던 승현의 마음을 처음으로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켜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진이 무심코 승현을 돌아보았다. 머나먼 허공을 응시한 그의 눈동자는 구름 뒤에 숨은 별이 담긴 것처럼 잔잔한 빛으로 반짝였다.

“참나, 그게 뭐야. 네가 날 왜 지켜 줘.”

“또 이상한 애들한테 찍혀서 괴롭힘 당하는 건 아닌지 지켜봐야죠. 저 아니면 누가 그래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기자 승현도 하하 웃으며 동조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기 때문일까. 잠시 밝아졌던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라앉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승현이 조용히 물었다.

“형은요?”

이진은 순간 멈췄던 숨을 조용히 뱉어 냈다. 숨을 참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쉬는 숨결에서조차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승현의 시선이 이진을 향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형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승현의 물음은 이진의 마음을 갈구하는 것 같기도,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진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저랑 뭘 하고 싶은 거예요?”

이진이 승현과 하고 싶은 것. 이진은 승현과 친구보다는 깊고 가족과는 다른, 서로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라 한다면 명확한 답을 주기 어려웠다.

당장 누군가 승현과 사귀어 입을 맞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하지만 가능할 것 같기도?’

이진은 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첫사랑을 하던 때처럼 마냥 설레던 느낌과는 달라서 제 마음이 어떤지, 정말 사랑이 맞는지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궁극적으로 그가 보기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진은 승현이 이진의 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길 바랐다.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납득시키고 싶었다.

이진이 잠궈 둔 여러 가지 비밀들 역시 죄다 알려 줄 수 있었다. 승현이 원한다면 풀지 못할 자물쇠는 없었고, 모든 문은 승현을 향해 열려 있었다. 이 타오르는 열정과 안타까운 절박함을 무어라 말하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답을 내리기도 전에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내내 지켜보던 승현은 본인도 모르는 이진의 생각을 이해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몰랐어요. 제 마음도, 형 마음도.”

이진의 망설임이 승현에겐 대답이었나 보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승현이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이진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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