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규칙적인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왔다. 터벅터벅. 점점 이진의 방 쪽으로 다가오듯 커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이진은 침대를 벗어나 문가로 향했다. 문에 귀를 대 보자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터벅, 터벅.
점차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방문 앞을 스쳐 지나가려 할 때, 이진이 벌컥 문을 열었다.
“형?”
그러나 방 문 앞을 지나가던 건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잠이 안와 떠돌아다니던 선승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수상쩍은 발소리의 정체를 밝히려나 싶었는데 두 번이나 허탕을 치고 나니 역시 맨 처음 들었던 소리가 환청이었나 싶었다.
“여기서 뭐 해?”
“잠이 안와서 밖에서 산책이라도 하려고 했죠.”
그러고 보니 승현의 방이 복도 끄트머리라 기숙사 정문으로 나가려면 복도를 가로질러야 했다.
“형은요?”
“나는…….”
자다 깼는데 네 발소리 때문에 놀라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고 말할까. 이진이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자 승현이 이진을 기다리지 않고 손짓했다.
“그럼 저랑 같이 산책할래요?”
이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도 아침부터 촬영이 있는데 이 새벽에 산책이라니. 그러나 왠지 그 말을 거절하기 힘들어 이진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정문을 지키는 스태프에게 잠시 산책을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이제 운동장보다는 주차장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자동차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지만, 촬영을 위해서인지 한편엔 아직 관리 된 벤치와 화단이 남아 있었다.
“살짝 춥나?”
앞서 걷던 승현이 말했다. 확실히 새벽바람이 쌀쌀해 몸이 움츠러들었다. 겉옷을 챙겨 나올걸. 생각한 찰나 이진의 어깨 위로 승현의 카디건이 올라왔다.
“야, 내가 무슨 동생도 아니고 왜 옷을 벗어 줘.”
이진은 ‘내가 무슨 여자도 아니고’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문장은 너무 연애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단어를 바꿨다. 승현은 픽 웃더니 옷을 도로 뺏어가려 했다.
“그렇다고 줬다 뺐어?”
“감사할 줄 모르는 유이진.”
승현은 그렇게 말하더니 정말로 카디건을 가져가 버렸다. 치사하다 욕하려는 찰나, 승현이 이진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팔을 꿰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진보다 살짝 큰 사이즈의 카디건은 승현의 온기가 남아 따끈따끈했다.
승현은 별말 없이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정말로 졸릴 때까지 걸을 작정으로 나온 건지, 오가는 대화도 없이 걷기만 했다. 그동안 이진의 머릿속은 승현의 행동 때문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때 승현이 잠깐 멈춰서 이진을 돌아봤다.
“형, 이건 그냥 듣고 넘겨도 되는데요.”
“응?”
이진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승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 굉장히 멋있었어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은 일을 멋있다고 평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이진은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생각했다. 선승현을 이겨 보려고, 동정표를 얻기 위해 아픈 과거를 팔았다 손가락질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진도 그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했기에 여태까지 과거를 숨기고 싶어 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분명 많은 사람들이 형을 보고 용기를 얻었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그래도 잘했다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온수가 차올라 당장에라도 넘칠 듯 찰랑거렸다. 그의 다정한 시선에 뺨이 달아오른 이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겸손을 떨었다.
“그냥, 괜히 사람들이 이상하게 추측하는 게 더 싫어졌을 뿐이야.”
“그래도요. 제가 아직 어린이였다면 전 분명 형 덕분에 꿈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을 거예요. 사실 지금도 배우고 있고요.”
이진은 작게 ‘응.’ 하고 대답한 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라니. 운이 좋게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뿐 이진은 이미 한번 꿈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이진은 자신이 그 말을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승현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어두워서 형 얼굴이 안 보이네.”
그리고 두 걸음 더 다가왔다. 이진은 몸을 움찔거리며 다가온 승현을 올려다봤다.
“무슨 표정 하고 있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해.”
가까이에서 본 승현은 이진을 놀리듯 능청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눈이 마주친 상태로 가만히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이진은 정말로 승현에게 홀린 것처럼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걸을까요?”
“그래. 바람도 좋고 꽃향기도 좋네.”
“그러게요. 별도 많고.”
승현이 조용히 제안하고 이진이 받아들였다. 바람은 차가웠고 꽃향기는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이진은 주절주절 이유를 늘어놓았다. 승현은 하하 웃으며 별이 많다며 이진의 편을 들었다. 슬쩍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별은커녕 달조차도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승현은 앞장서지 않고 이진과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진은 승현의 옆얼굴을 힐끔대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승현은 아닌 척 뜸을 들이다 기다렸다는 듯 이진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얼굴에서 긴장이 묻어나와 이진도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형,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형 첫사랑이요.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라고 했잖아요. 맞죠?”
갑자기 첫사랑? 뜬금없는 화제에 이진은 조금 놀랐다가 이 미묘한 분위기에 크게 이상하지는 않은 질문이라 속으로 납득했다. 혹시, 설마. 이번에야말로? 머릿속에서 승현에게 홀린 이진의 자아가 설레발을 쳤다.
“응, 맞아.”
이진은 수줍음을 감추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이어진 승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게 혹시 오늘 오신 분…….”
“뭐? 웃기지 마. 아니야!”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기겁을 하는 이진을 보고 승현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잠든 학교에 승현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그분 조카냐고 물어보려던 거예요. 듣기로는 조카분이 실용 음악과라 형 입시 과외를 봐 주셨다던데.”
“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이진이 민망함에 조용히 성질을 내자 승현이 다시 웃었다. 승현은 웃다가 힘이 빠지기라도 한 건지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뱅글뱅글 돌아다녔는데 마침 가로등 아래 벤치가 있어 다행이었다. 승현이 손짓을 해 이진도 그 옆에 앉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물어보질 말던가.”
승현이 어른스러운 말을 덧붙여도 이진은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가만있는 사람 쿡 찔러보고 도망가는 얄미운 짓을 시도하는데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그래도 왠지 밉지만은 않았다. 그가 머금고 있던 미소가 조금 가시자 장난 속에 숨기고 있던 진중한 태도가 드러났다.
첫사랑이 어떤 사람이었냐 묻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첫사랑이 맞느냐 물을 때부터 이진은 승현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승현은 긴장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그 사람 남자인 거 알아요.”
“그건…….”
“그러니까 이건, 남자가 연애 대상에 포함되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대단한 고백이나 중대한 선언이라도 하듯 그의 눈빛에서 굳은 각오가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진은 승현이 자신만큼이나 서로 간의 ‘선’에 있어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특히 승현은 친하게 지내는 것과 개인사를 밝히는 것을 완전히 별개로 여기지 않던가.
‘남자를 좋아하냐고.’
헛웃음이 나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몸에 조금씩 열이 올랐다. 남들은 눈치채도 묻지 못할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다니. 웃어넘길 수도 없지 않은가. 이진은 승현이 이 대화를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했을지 궁 금해졌다.
이진에게 건네질 이 한마디를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을 조립했을까.
이진은 한 번도 자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고 정의 내린 적이 없다. 그저 첫 번째 사랑이 남자였을 때, 막연히 이 감정은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여러 면을 부정적으로 바라봤지만 누구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다. 그건 이진이 스스로의 실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당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편하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세상에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진은 그동안 불특정다수의 언행에 큰 영향을 받아 왔고 그들의 영향력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만난 지 고작 몇 개월이 지난 승현에게 세간의 어떠한 편견을 심어 줄지도 모르는 사실에 대해 고백한다는 건 쉽게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신뢰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하지만, 네가 먼저 물어본다면.’
이진은 밭은 숨을 삼키며 승현을 바라봤다.
이건 정말로 신뢰나 우정과는 다른 문제였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방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질문 자체를 공격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상처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그동안 쌓아 온 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어코 이 비밀에 대해 묻는다면, 이진이 그를 밀어낼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승현이 답을 듣기로 결정했다면…… 이진은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가장 큰 비밀마저도 털어놓지 않았던가.
“다시 말하지만,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이진의 답이 늦어지자 승현이 재차 강조했다. 이진이 그를 거부할까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타이밍에 각오를 다져야 할 사람은 이진일 텐데, 상대방이 저렇게 긴장하니 이상하게도 오히려 안심이 됐다.
“그게 왜 궁금한데?”
살포시 미소 지으며 물었다. 주먹을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 때문에 손에 땀이 배어 나올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고백할까?’
설레발 치고 싶진 않았지만, 승현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진의 연애 대상에 대해 묻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더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발뺌하지 않고 솔직히 부딪혀 올까. 드디어 이 아슬아슬한 감정놀음을 끝낼 수 있는 걸까.
기대에 부푼 이진의 가슴이 크게 쿵쾅였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아 이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승현은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봤다.
살짝 크게 뜨인 눈. 깊은 동공과 그 표면에 반짝이는 가로등 빛. 누군가의 진심이 전해지기에 정말 완벽한 순간이라고, 이진은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의 표정에 예상치 못한 의문이 어렸다. 그리고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멍청한 소리를 했다.
“어, 글쎄요?”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곰곰이 이유를 더듬어 가는 승현을 보며 이진은 다시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막막한 기분이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