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카메라 치워 주세요.”
손으로 카메라를 가려 보았으나 카메라맨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뿐 여전히 이진을 향해 새까만 렌즈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이진은 정신이 없어 그에게 화를 내지도 못했다. 발밑을 받치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진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선들. 안쓰럽게 보는 눈빛, 그 눈동자. 눈이 너무 많았다.
“선생님은 그냥 네가 잘 살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정말 그게 다에요? 또 저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고요?”
당장에라도 토악질을 할 듯 속이 역겨웠다. 이진은 정말로 궁지에 몰렸다. 절대 밝히고 싶지 않았던 약점을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통해 까발려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죄송해요. 저 지금 촬영 못 하겠어요.”
이진은 카메라를 바라보고 읊조리듯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카메라를 스쳐 지나갔다. 당당하게 굴었지만 결국은 도망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전신의 피를 쥐어짜는 미칠 듯한 압박감과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에게서 달아나고 말았다.
“이진아!”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이름을 불러 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진은 그저 숨고 싶었다. 유명해지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너무 만만히 생각했나. 내 각오가 이렇게 나약했던가. 끊임없는 자책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분위기 왜 이래?”
“어, 이진이 어머님?”
때마침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이 상담실 밖으로 나와 뒤늦게 상황을 접하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사이가 안 좋나?”
“무슨 일이야?”
“유이진이 방금…….”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한참 동안 분노와 슬픔, 당황, 불안.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진은 그저 정처 없이 걸었다.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다행히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자 이진은 촬영지로 쓰이지 않고 방치된 진짜 폐교 복도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창밖으로 노을이 져 붉은빛이 가득 쏟아졌다.
‘선생님이 얘기하셨을까. 그럼 이제 다들 아는 건가.’
이진은 멍하니 생각했다. 선생님은 별 얘기 안 했다고 하셨지만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좋은 사람이고 이진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신뢰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벼랑 끝에 내몰리고 말았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느냐, 악착같이 살아남느냐는 그의 선택에 달렸다. 이진은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를 버텼어야만 했다.
하지만 도저히 태연하게 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부모님과 좋은 기억이라고는 얼마 없었으니 이제 와서 상실을 상기한다 해도 큰 슬픔이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그를 동정하는 시선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다고 누가 인터뷰 하면서 울어 줄 것 같아?’
이진은 선망받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약점이나 결핍, 콤플렉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만큼 대단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만큼 강해지지도 대단해지지도 못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진은 빛이 쏟아지는 창문 아래 벽에 기대어 수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발끝으로 따끈따끈한 햇살이 느껴졌다. 이젠 싫어도 현실과 마주해야 할 시간이었다. 촬영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이 일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할 텐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늘의 이진은 무책임했다. 아무리 싫은 촬영이라도 그런 식으로 팽개치고 도망쳐서는 안 됐는데. 차라리 이대로 녹아내려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복도 끝에서 타박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 저벅저벅.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이진은 부스스 고개를 들고 그 누군가를 바라봤다. 아니, 보려고 했다.
‘어?’
그러나 이진의 눈에 보인 것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엔 이진뿐이었다.
‘그럼 방금 들은 발소리는 뭐지?’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인기척이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소름이 돋고 싸한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형, 그거 알아요? 여기 학교에 귀신 나온대요!’
‘여기 진짜 터가 안 좋으니까 조심하랬어.’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했던 목소리가 하필 이럴 때 떠오르다니. 이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눈앞에 방치된 교실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인기척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진이 발을 내딛자 바닥에 깔린 먼지가 날아올라 목을 간질였다. 먼지가 자욱해 누군가 들어왔더라면 흔적이 남아있겠지만 문에서 이어지는 발자국은 이진의 것뿐이었다.
그 뒤로도 바로 앞 교실, 그리고 그 옆 교실. 그 다음 교실까지 뒤져 봤다. 그러나 사람은커녕 폐쇄된 건물에 사는 동물이 지나다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착각인가?’
그렇게 생각할 즈음 또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타박타박. 두개의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왔다. 이진은 기이한 심령 현상 따위는 전혀 믿지 않았지만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유독 공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진은 교실 문 옆에 몸을 숨기고 앉아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나가 현장을 습격해 괴현상의 진상을 밝혀 낼 작정이었다.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점점 뚜렷해지고 벽 너머로도 인기척이 느껴질 때…….
쾅! 누군가 교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헉, 숨이 멎을 듯 깜짝 놀라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이진이 어디에 숨었는지 아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대체 밖에 있는 게 뭐지? 설마 정말 귀신? 생각해 보면 이진도 시간을 거슬러 3년 전으로 돌아왔는데 귀신이 없을 거라 굳게 믿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이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문에 가져갔다. 그때 문 밖에서 끄응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신의 음산한 신음 소리나 괴생명체의 불길한 울부짖음이 아니라 이진이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아악, 내 무릎!”
“왜 잘 걷다가 갑자기 넘어지고 그래.”
“운동화 끈이 풀려서 그랬어.”
발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찬우와 미열이었다. ‘날 찾으러 와 준 거구나.’ 긴장이 확 풀리고 안심이 됐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두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이진은 문에 올린 손을 어쩌지 못하고 멈춰 섰다.
“어? 교실 안에 사람이…….”
문을 열지 않고 머뭇대고 있었더니 미열이 교실 문 불투명 유리 너머 이진의 실루엣을 발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게 이진이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진은 오해를 방지하고자 문을 열려고 했다.
“으악! 악!”
그런데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자마자 미열이 비명을 질렀다. 쿠당탕,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와 두려움에 찬 비명이 연달아 들려왔다. 이진은 문을 마저 열지 못하고 다시 굳어졌다.
벌컥! 찬우가 대신 문을 열고 나서야 미열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야, 유이진! 너 왜 거기에 있어!”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확인 차.”
“넌 담력도 세다. 혼자 무섭지도 않냐?”
겁이 많은 미열이 괜히 성질을 냈다. 투덜대는 미열을 적당히 무시하며 찬우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피디님이 너한테 직접 사과하고 싶으시대. 스태프들이 찾아다니면 네가 기분 상할 것 같아서 우리가 찾아보겠다고 나온 거고.”
“응.”
“괜찮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 굉장히 안 좋던데.”
소동이 일어났을 때 미열은 막 촬영을 끝내고 나온 참이었고 찬우는 아직 교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세한 상황은 모르고 그저 이진이 촬영장을 뛰쳐나갔다는 사실만 뒤늦게 전달받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까. 너무 사적인 정보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걸 말하지 않으면 상황을 이해시킬 수 없다. 하지만 대단치도 않은 비밀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진은 고민했다.
과연, 두 사람이 이진의 가정사를 들은 뒤에도 변함없는 태도로 이진을 대할 수 있을까.
이진이 고민하는 기색을 읽은 미열이 먼저 안심시키듯 말을 덧붙였다. 찬우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
“그래. 어차피 피디님이 잘못한 거 아니야? 알아서 수습하시겠지.”
둘 모두 아직 눈에 호기심이 어려 있었지만 이진을 배려해 주고 있었다. 그 배려가 고맙고, 아직도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혼자만의 성에 갇혀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란 어느 정도일까. 찬우와 미열과의 관계를 단순히 직장 동료라 정의한다면 이 정도 거리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방송 초반부터 많은 일을 함께하며 그들은 이미 단순 동료 이상의 관계로 변화했다. 이진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들을 친구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언젠간 윈올 촬영이 끝나고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되더라도 아예 남이 되어 버리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곁을 내줘도 괜찮지 않을까.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를 방어할 수단이 없을 시절, 불우한 환경은 늘 이진의 약점이었다. 이진은 약점을 극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지금 그에게선 그 시절의 그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 그 자체가 약점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고자 스스로 만들어 낸 약점이 발목을 잡아 왔다.
동정받고 싶지 않다. 실력만으로 인정받고 싶다. 그런 독한 마음은 이진의 삶에 강한 동력원이 되어 주었지만, 이제는 그 길이 유일하지 않다는 걸 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러나 지금은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이진이 친구들에게 살짝 웃어 보이자 둘 다 안심한 듯 미소를 돌려주었다.
“빨리 촬영장으로 돌아가자. 선승현이 너희 어머님…… 잠깐. 엄마 맞지?”
“아, 어머니는 아니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야.”
“그렇구나. 어쩐지 안 닮았더라. 하여튼 선승현이 너희 담임한테 엄청 관심 많아. 이진이형 어쩌고 하면서 계속 말 걸더라.”
미열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미열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찬우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진을 바라봤다. 이진은 둘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그는 한 걸음씩 천천히 걸었다. 발밑이 너무도 불안해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많이 헤매고 많이 넘어졌다. 그렇게 오래 돌아온 끝에, 이진은 드디어 나아갈 방향을 또렷이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망설임 없이 과감한 한 발을 내딛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