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16화 (116/173)

116화

이진은 귀신이 크게 무섭지 않았기에 잠자코 있었는데, 양옆에서 미열이 소리를 지르고 찬우가 남을 놀려 대고 있어 정신이 몹시 사나웠다.

“유이진. 넌 안 무서워?”

“난 귀신 안 믿어서.”

“이게 믿고 말고의 문제냐?”

이진의 대답에 미열이 맥 빠진 표정으로 핀잔을 줬다. 사실 이진은 귀신보다는 제작진이 준비했을 깜짝 촬영이 더 신경 쓰였다. 차라리 담력 훈련이면 다행이지만 아직 여름이 아니라 그런 걸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학교 컨셉에서 할 수 있으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소재.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중간고사, 체육 대회, 동아리 활동. 떠오르는 것 전부 짧은 시간 내에 자극적인 장면을 뽑아내긴 어려웠다. 특히 이번처럼 분명한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는 컨셉이라면 오히려 집중력을 해칠 가능성이 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진의 궁금증은 머지않아 풀렸다.

수업이 모두 끝날 무렵, 수업 종소리가 울리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 아. 안내 말씀드립니다. 오늘 오후 학부모 진로 상담이 있을 예정이오니 학생 여러분들께서는 호명되기 전까지 반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호명된 학생은 1층 상담실로 내려와 주세요. 다시 한번 안내 드립니다. 오늘 오후…….

방송을 들은 학생들이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진도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학부모 진로 상담. 부모, 적어도 보호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이진의 보호자 자리는 몇 년간이나 부재했다. 가장 가까운 친척인 이모와도 연락을 안 한 지 몇 년째였다. 이진은 얼마 전부터 가끔씩 핸드폰을 울렸던 모르는 번호를 떠올렸다.

“뭐야? 엄마 오는 건가?”

“설마. 아무 말도 없이 가족을 부르겠어?”

찬우와 미열이 말했다. 이진도 미열에게 동의했다.

-강재규, 강지흔, 고은준, 김보원, 김순한. 호명한 학생들은 1층 상담실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상담 순서는 이름순이었다. 이번에도 다섯 번째에 불려 갈까 봐 내심 두려웠던 이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찬우와 허동규는 맨 마지막 순서인 게 불만인지, 이건 왜 순위가 아니라 이름순이냐며 징징거렸다.

“헐, 저 다녀올게요!”

블루반에서는 지흔과 보원이 먼저 1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간 지 10초쯤 되었나, 복도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엄마?”

“아들!”

놀람과 감격이 뒤섞인 지흔의 목소리와 아마 지흔의 어머니로 추측되는 여성의 목소리였다. 비명 같은 외침이 들리자마자 반에 남은 참가자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진짜 온다고?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지금 내려가면 볼 수 있는 건가? 어떡해. 나 엄마 보면 울지도 몰라.”

“울 엄마는 여기 못 올 텐데. 아빠도 회사 갔을 테고. 누가 온 거지? 할머니?”

반응은 셋으로 나뉘었다. 갑자기 가족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에 혼비백산하거나 벌써부터 기뻐서 들뜨거나. 혹은 찬우와 이진처럼 대체 누구를 불렀다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하거나.

-김태원, 나봄, 남주헌, 두주형, 리웨이. 호명한 학생들은 1층 상담실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한 모둠당 10분도 채 할애하지 않는지, 아니면 충분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는 건지 예상외로 차례는 빠르게 다가왔다. 먼저 촬영을 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 교실은 점점 비어만 갔다.

‘부모님 안 계신 거 밝히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이렇게 상의도 없이?’

차례가 다가올수록 이진도 조금씩 불안에 시달렸다. 평소라면 이진의 이상을 알아챘을 친구들도 갑작스런 학부모 상담에 흥분해서 떠들기 바빴다. 찬우는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자취하니까 부모님은 오랜만에 보겠네.’ 하는 헛소리까지 늘어놨다.

-유이진, 윤기현, 이우진, 이진연, 임채일. 호명한 학생들은…….

그리고 드디어 이진의 이름이 불렸다. 이진은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태도와는 달리 머릿속은 온통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마 이모겠지. 그런데 이모랑 대체 무슨 얘기를 하지?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진연과 함께 문을 나간 뒤 복도에서 옆 반 학생들을 만나 같이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도망갈까?’

불우한 환경, 동정표, 사고, 장례식. 온갖 부정적인 단어가 머릿속을 맴맴 맴돌았다.

왠지 제작진들이라면 빈 방에 이진 혼자 덩그러니 앉혀 놓고 아무것도 안 한 채 방치하게 둘 것도 같았다. 그런 꼴을 당하느니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슬쩍 도망가는 게 차라리 나았다.

1층으로 내려가자 복도에 미리 마중 나온 학부모들과 그 뒤에 선 카메라들이 보였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도주로를 물색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 휙 튀어나갔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잔뜩 들뜬 표정의 우진이었다.

“아빠!”

우진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우진아!”

“엄마는? 아빠 혼자 왔어?”

한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우진이 쏜살같이 달려가 그 품 안에 파고들었다. 이진은 자리에 멈춰서 우진이 아빠와 부둥켜안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채일아, 여기야!”

“누나! 근데 왜 누나가 왔어?”

“온 김에 멤버들 사인 좀 받으려고.”

멈춰 선 이진을 지나쳐 하나둘씩 가족을 찾아갔다. 부모님 대신 할머니나 형제가 온 경우도 보였다. 그러나 정작 이진의 이모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없으니 당연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괜히 이모네 식구가 와서 슬프지도 않은데 울라고 자리 깔아 주는 것보다는 낫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카메라 사각 지대를 살폈다. 어차피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이진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이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옮겼다.

“이진아!”

그때, 누군가 소란스런 틈 사이로 이진의 이름을 불렀다.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무슨 일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이진은 자신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작은 체구의 중년 여성이었다.

“선생님?”

이진이 대학을 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보조해 준 은사,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자 1학년과 3학년 담임이었던 이선경 선생님이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이진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상냥한 목소리와 인자한 표정은 그 시절과 다름이 없었다. 또각또각, 단정한 발소리가 천천히 이진을 향해 다가왔다. 이진은 대체 왜 선생님이 눈앞에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설마…….’

작은 가정이 생각의 싹을 틔웠다. 아마 이진의 친인척을 찾던 제작진은 아무와도 연락이 닿지 않자 결국 그가 나온 고등학교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마침 유이진의 은사라 불리는 음악 선생님을 만나 이진의 과거에 대해 상세히 들었는데 마침 방송에 써 먹기 참 좋은 사연이었을 것이고.

꾸준히 이진에게 과거사를 풀어놓길 종용했던 제작진이다. 그들이 마침내 짧은 시간 내에 자극적인 장면을 뽑을 수 있는, 그리고 이진이 절대 입을 열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열쇠를 찾아낸 것이다.

과거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이진을 덮쳤다.

“말도 안 하고 와서 미안하다. 번호가 바뀐 건지 연락이 안 되길래 미리 물어볼 수가 없었어.”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빠져 바닥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한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진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묻어 뒀던 기억들이 바람결에 펼쳐진 책처럼 파라락 흘러나왔다.

‘이진아, 선생님이 도와줄게. 입시 어디 한번 해 보자.’

선생님이 한발 앞으로 다가오면 이진도 그만큼 뒷걸음질 쳤다. 이진이 불편해한다는 걸 느낀 뒤로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등은 이미 계단에 닿아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안 오면 이진이 네가 혼자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냥 무시할 수가 없더라. 보니까 선생님이 괜히 왔나 보네.”

“아니, 아니에요. 그게 선생님, 제가.”

이진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가 굳어 버린 건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상대를 향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진은 제일 궁금한 것을 입 밖으로 냈다.

“선생님, 어디까지 말하셨어요?”

선생님의 얼굴이 웃은 채로 굳었다. 이진도 입꼬리만 올려 미소를 그려 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처음 만난 담임 선생님은 주제에 맞지 않게 허황된 꿈을 꾼다고 비웃음을 사던 그를 늘 지지해 주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 명단에서 제해 주고, 실용 음악을 전공한 조카에게 이진의 레슨을 특별히 부탁해 주었다.

담임 선생님의 유별난 편애에 같은 반 학생들이 원성을 토하기도 했지만 아랑곳 않고 그의 편을 들었다.

‘이진이는 너희랑 다르지. 너희처럼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아?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게 얼마나 멋지니? 편애라고 뭐라 하지 말고 보고 배워라.’

하지만 그 베품이 온전한 선의만은 아니었단 걸 이진은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다 키웠죠. 훌륭한 원석이긴 했지만, 그런 재능을 가진 애들은 많아요.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발에 채는 돌멩이일 뿐이잖아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분이니까. 뒤에서 이진을 어떻게 말하고 다니며 자신의 위신을 세우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네 재능은 특별해. 선생님은 그것만 믿고 투자하는 거야. 다른 생각 말고 성공만 생각해. 지금은 반항하는 것 같겠지만 결국은 그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거야.’

이진은 그 말만을 철썩같이 믿었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모님과 싸우고 더는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울컥한 마음에 심한 말을 하고 집을 나갔을 때도. 성공하면 결국은 모든 걸 보상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진아,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지금 부모님이…….’

이진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다. 그 뒤로는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담임 선생님이 이모를 도와 마지막까지 장례와 상속 절차를 책임져 주었다는 것만 전해 들었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은사도 첫사랑도, 심지어 친척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진은 그렇게 아무 미련 없이 자신의 기억을 과거 속으로 묻어 두었다.

“별 얘기 안 했어. 이진아, 선생님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니야.”

“제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걸 듣고 싶으셨던 건 아니고요?”

날카로운 말에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참가자가 상담실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심각한 분위기를 내고 있으니 자연히 시선이 몰렸다. 그리고 언제 다가왔는지 카메라맨이 이진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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