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찬우는 학생 분장을 한 스태프가 팔랑대며 건네는 종이를 받으며 “네가 좀 하지.” 하고 중얼거렸다. 확실히 대본이 개연성에 그다지 큰 공을 들이지 않아 보이긴 했다.
“반장, 공지 좀 해 줘.”
“어디 보자. 핑크반과 블루반 교류 공연, 퍼플 특별반 모집.”
종이를 받아 든 찬우가 제목과 본문을 큰 목소리로 읽었다. 핑크반과 블루반 교류 공연. 그러니까 이번 컨셉 무대의 배경 설명을 위한 공지였다.
핑크반과 블루반의 화합을 위해 교류 공연을 개최한다. 교류 공연에서 각 반은 전공별로 무대를 준비한다. 효과적인 교류를 위해 공연 준비 기간 동안 퍼플 반을 특별 운영한다. 그게 다였다.
“오늘 밤 체육관에서 퍼플반에 합류할 멤버를 뽑는다. 뭐야? 학교에서 주최하는 거면 낮에 하지 왜 밤에 불러?”
찬우가 자꾸 제작진이 만든 설정에 딴지를 걸자 스태프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너 아직 안 갔니? 네가 직접 갖다 줘라.”
“그래, 왜 시키고 그래! 너도 우리가 우습니?”
찬우의 농담에 몇 명이 동참하여 스태프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굉장히 타당한 반박이었지만 어쨌든 두 반의 나쁜 사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블루반 반장이 핑크반을 방문해야 했다. 찬우와 이진은 옆 반으로 향하게 되었다.
핑크반 학생들은 매우 연출된 듯한 자세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학생이 창가에 놓인 승현과 하늘의 책상을 중심으로 적당한 밀도를 이루며 모여 있었다. 한가운데에 앉은 승현이 몹시 거만한 자세로 이진을 바라봤다.
“어? 루저반 놈들이잖아? 여긴 어쩐 일로?”
그때 우진이 몹시 어색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말했다. 누가 들어도 대본인 게 확 티가 나는 목소리라 핑크반 학생들도 우진의 연기를 듣고 웃음을 팍 터트렸다. 연기를 못한다더니, 아무리 표정 연기가 좋아도 대사를 저렇게 딱딱하게 치면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자기소갠 줄?”
“그래서 뭐 하러 온 건데? 용건부터 말하시지.”
“여기, 교류 공연 공지 사항을 전달하라고 해서.”
찬우가 입을 삐쭉이며 도발하자 재규가 삐딱하게 받아쳤다. 이진은 찬우의 손에서 종이를 뺏어 재규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재규는 종이를 받지 않고 살짝 몸을 틀어 이진의 앞을 비켜 줬다. 승현에게 직접 건네라는 신호였다.
경쟁하는 라이벌 컨셉. 이진은 순순히 종이를 가져다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승현은 무리의 대장처럼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다. 반면 이진에게 같은 편이라곤 찬우뿐으로 제작진이 의도한 연출은 아마 블루반이 궁지에 몰린 모습일 테다.
여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 뒤 뒤에서 칼을 갈아도 되겠지만 이진은 조금 더 대등한 위치를 보여 주고 싶었다.
“와서 가져가.”
이진은 종이를 내밀며 승현에게 말했다. 승현이 일어나서 이진에게 다가온다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무시한다면 얼마만큼 질질 끌어도 되는지 간을 봐야 하겠지만.
“가지고 와.”
아니나 다를까 승현은 고개를 까딱이며 이진을 불렀다.
‘쟤 지금 반말…….’
사소한 디테일이 신경에 거슬렸다. 물론, 같은 학교 동급생이라는 설정이라 생각하면 화낼 일은 아니지만 왠지 저 반말조차 이진의 화를 돋우고자 노린 느낌이다. 이진이 잠자코 있자 어디선가 한두 마디씩 컨셉에 충실한 반응들이 돌아왔다.
“어이어이. 블루반 부반장 주제에 너무 건방지잖아?”
“그러게. 루저반 주제에 말이야.”
“야! 나는 이겨서 블루반 간 거거든? 선승현 한판 더 뜰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간 찬우가 선승현을 걸고 넘어졌다. 이진은 번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실행할까 고민했다. 무리수지만 승현이 잘만 받아 준다면 반응은 좋을 것 같았다. 마침 핑크반 학생들이 직접 가져다주라고 종용했다.
이진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종이를 든 손가락에 힘을 뺐다. 스륵, 손가락에서 빠져나온 종이가 팔랑이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져가.”
술렁이던 실내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대본에 없는 도발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 티가 났다. 그리고 그들은 승현과 이진이 싸웠다고 알고 있으니 이게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도 모를 것이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승현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주변 아이들이 슬금슬금 길을 터 줬다. 쿠당탕, 책걸상까지 밀어서 길을 만드는 게 우스웠다.
승현은 터벅터벅 걸어와 이진의 앞에 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손끝으로 종이를 주웠다. 이진은 잠시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고개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이진아, 너 성격 나쁜 거 들켰다고 이렇게 모두 있는 앞에서 인성질 하면 어떡해.”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한 종이를 툭툭 털어 낸 승현이 종이를 어깨 뒤로 넘겼다. 뒤에 서 있던 우진이 당황하며 종이를 넘겨받았다.
“내 앞에서만 그러기로 했잖아. 나 질투 나.”
“우오오오!”
이어진 승현의 말에 두 사람을 둘러싼 참가자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재치로 위기를 넘기고 이진에게 한방 먹이기까지 했다는 고양감에 찬 목소리가 가득했다. 이진은 승현을 마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먼저 도발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반격할 줄은 몰랐다. 이진의 머릿속 심지에 불이 붙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딩동댕동, 하고 수업종이 울렸다. 이 상황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을 제작진의 소행이다. 이진과 찬우는 당당한 태도로 교실을 빠져나갔다.
두 반 모두 체면은 지켰지만 상대를 완전히 찍어 누르지도 못한 무승부였다.
***
이진과 승현의 활약으로 경쟁 구도는 아주 팽팽하게 만들어졌다. 블루반 학생들은 정확한 대화를 듣지 못했으나 찬우가 씩씩대면서 당시 상황을 생생히 설명해 준 덕에 이번 라운드 설정에 몹시 빠져든 듯한 모양새였다.
참가자들이 내심 기대했던 수업은 진짜 고등학교와 흡사했다. 1교시부터 7교시까지 50분 수업마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매 시간마다 익숙한 얼굴의 트레이너들이 들어와 수업을 진행했다.
특별한 것은 그들이 과목별로 익숙한 선생님 의상을 입고 마치 다른 과목을 가르치듯 수업을 한다는 점이었다.
“자, 서로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싸움뿐이야. 화자의 회한의 정서가 담겨 있죠. 좋았던 시절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상대방을 향한 원망.”
1교시 문학 시간에는 보컬 트레이너가 들어와 노래 가사를 칠판에 적으며 해석했다.
뒤늦게 밝혀진 정보지만 두 곡은 내용이 연결되어 있었다. 블루반은 이별, 핑크반은 만남. 노래 속 연인이 블루반을 두고 핑크반과 눈이 맞은 것이다. 그래서 두 반이 라이벌 관계인 것이고.
“내가 널 위해 떠나야 할까, 내가 떠나 줄까. 지금 나는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떠나는 게 연인에게 더 좋다는 걸. 그런데 좋다는 게 외부적인 이득이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떠나 줄까?’ 하면서 물어보고 있잖아요. 결정권이 연인한테 있는 것. 즉 연인의 마음이 떠난 거야.”
이진은 습관적으로 노트에 필기를 하며 노래를 들었다. Good bye, blue. 사귀고 있던 날들이 오히려 우울했더라는, 그러니 이별을 통해 우울함에서 벗어나겠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자, 그럼 다 같이 따라해 볼까요.”
보컬 트레이너가 교탁 밑에서 커다란 전자 키보드를 쑤욱 꺼냈다. 푸흡,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자, 자. 웃지 말고. 서로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싸움뿐이야.”
내가 널 위해 떠나야 할까, 내가 떠나 줄까. 굿바이 블루. 이별은 푸른 하늘 아래에서.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네게 보내는 작별 인사.
트레이너가 잡는 코드에 맞춰 참가자들이 입을 모아 합창했다. 여러 음색의 목소리가 한데 모이자 기교 없이 불러도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이진은 가사에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연인의 마음이 떠난걸 알면서도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먼저 떠나 줄까 물어보는 순애보적인 감성이 이해가 안 됐다. 만약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엄청 슬프고 화가 나서 굿바이 블루는 무슨, 얼굴에 푸른 멍 하나쯤은 남겨 주고 싶을 것이다.
물론 경찰서 갈 생각을 하면 차마 때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람 심정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그때 옆 반에서 와글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쿵쿵 발소리가 울렸다. 참가자들은 물론 수업을 진행하던 트레이너까지 옆 반의 소란에 관심을 기울였다.
“저쪽은 무슨 시간이지? 춤추는가 보네.”
“얘들아, 집중하자. 오늘만 촬영하고 내일부턴 자율 연습이야. 너희 분량 뽑아야지.”
집중이 흐트러지자 트레이너가 키보드를 쾅쾅 치며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다시 수업을 이어 나갔다.
5시가 넘어서야 아침부터 연속된 촬영이 일단락됐다. 점심은 부모님표 도시락이란 설정으로 여러 버전의 도시락을 랜덤으로 뽑았는데, 맨 밥에 김치만 있는 경우부터 한우 스테이크가 든 경우까지 다양했다. 이진은 평범하게 참치 김치 주먹밥을 뽑았다.
장난처럼 포장됐지만 수업의 질 자체는 몹시 좋았다. 너무 기본이라 굳이 설명한 적 없는 이론부터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훈련법까지 차근차근 짚어 주니, 평소 친구들의 연습을 도와줘야 했던 이진의 입장에선 속이 뻥 뚫리는 시간이었다.
춤 수업도 윈올 오리지널 안무와 기존 아이돌 안무를 섞어 가면서 즐겁게 진행됐다.
“요즘 촬영 재밌는 것 같아. 전에는 이게 뭐 하는지 모르겠고 힘들기만 했거든? 근데 방송 편집 몇 개월 경험해 보니까 요즘은 본방 기대되고 팝콘 각이다.”
“야. 그것도 네 순위가 안정권이라서 팝콘 각인 거지.”
“그래도 오늘 촬영은 재밌었다. 인정?”
잠시 주어진 쉬는 시간에는 다 같이 둘러 앉아 자연스럽게 잡담을 나눴다. 다들 이진만큼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즐거운 말들이 오고 갔다.
“오늘 아예 편집할 분량 쫙 뽑아 놓고 첫 방엔 오늘 촬영분 위주로 나갈 것 같지?”
“응. 그래서 수업 끝나고 밤에 있을 단체 촬영 전까지 비는 시간에 뭐 하나 더 할 것 같은데.”
미열과 희영이 스케줄표를 보며 말했다. 지흔이 살짝 흥분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그런 거 하지 않을까? 여기 귀신 나온다니까 담력 훈련!”
“아, 말도 안 돼! 그냥 몰래 카메라 같은 거나 하겠지!”
어지간히 귀신을 좋아하는 지흔의 말에 미열과 희영이 나란히 질색했다. 그런데 이 화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야, 얘들아. 이건 여기 촬영 왔었던 소속사 아는 형한테 들은 건데…… 여기 진짜 터가 안 좋으니까 조심하랬어.”
허동규가 입을 열었다. 피치 엔터에서 오랫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던 동규는 제법 아는 사람이 많았다. 지흔이 귀신을 언급할 때까지만 해도 인터넷 괴담 글을 읽는 기분이었지만, 동규가 말을 얹자 갑자기 아는 사람의 귀신 목격담같이 느껴졌다.
“터가 안 좋단 게 무슨 뜻이야? 아니야……! 그냥 말하지 마!”
“어? 너 등 뒤에.”
“으악! 야, 허동규! 너랑 나랑 갈등 한번 빚어 봐?”
달아오른 분위기에 결국 가벼운 몸싸움까지 일어났다. 정말 고등학생들이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