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말도 안 돼…….”
“하늘색 리본 잘 어울린다니까? 하하!”
이진은 오랜만에 맛보는 패배의 쓴맛을 느끼며 목에 리본을 묶었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이진을 찬우와 리웨이가 반겼다. 주헌은 본체만체하며 그를 무시했다.
“너랑 같은 팀 엄청 오랜만이다!”
“그럼 뭐 해. 무대는 따로 하는데.”
찬우가 이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다음으로는 강지흔과 장현기가 붙었다.
얼마 뒤 게임에서 진 지흔이 터덜터덜 이진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계속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두 명이 게임을 하고, 진 쪽이 터덜터덜 걸어온다. 그렇게 두주형과 백미열, 박희영과 김보원 등이 차례차례 자리를 채웠다.
“여기 무슨 패배자 전용석 같아.”
“야! 난 여기 골라서 왔는데 그러지 마!”
“여기 색도 우중충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찬우만이 승자고 나머지는 패배자였다. 미열은 원래 블루반에 오고 싶었다고 말했으나 어쨌든 그도 패배자였다.
“야, 우린 그래도 스페셜리스트만 모였잖아. 그치?”
“그래. 우리 이진이 형이랑 미열이 형 있으니까 음원은 우리가 먹고 들어간다!”
이진은 자신을 띄워 주는 패배자들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승현과 라이벌 구도를 어찌저찌 만들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뒤처지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 이진은 승현과 라이벌이 되기엔 자격이 부족하다고 할 것 같아 걱정됐다. 그냥 승현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되고 이진 본인은 인성 논란으로 팽 당할 것 같았다.
수면 아래에서 루머가 성행하긴 하지만 프로그램 내에서 승현의 이미지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뺀질거리는 천재, 알고 보니 노력파, 못하는 것 없는 수재에 실력은 점점 성장한다. 정신력도 단단하고 적절한 리더십까지 겸비했다.
승현이 점점 치고 올라가 1위가 된 것은 당연했다. 반장 선거에서 성격이나 성적보다는 왠지 쟤가 반장일 것 같은 분위기가 투표수에 더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했다.
‘이번 라운드에서 분위기를 뒤집어 놔야 하는데.’
그러나 블루반 멤버 중에 이진의 맘에 쏙 드는 사람이 없었다. 친한 사이도 찬우와 미열이 전부고 그 외에는 한번 같은 팀을 해 봤거나 지나가다 마주친 정도가 다였다. 잠시간 성찰 후 이진은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인정했다.
승현에게 대적하기 위해선 반전 매력을 보여 줄 비장의 한수가 필요하다. 이진은 스스로의 가장 의외로우면서 매력적인 요소를 고민해 보았다.
‘역시 그거지.’
그리고 한 가지 반전을 떠올려 냈다.
***
팀 배치를 끝내고 클로징 촬영까지 마친 뒤 다 같이 방송국 정문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제법 귀여운 스쿨버스와 카메라, 그리고 아주 늦은 시간인데도 방송국 앞을 지키는 팬들이 멤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얘들아! 여기 좀 봐 줘!”
“옷 뭐야? 옷 뭐야? 새 옷이야?”
“흐허엉……! 제발, 제발, 제발! 사랑해, 사랑해!”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반 이상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어두운 밤에 눈만 보이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며 누가 했는지 모를 말을 마구 외치자 살짝 섬뜩했다. 큰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이 너무 격해져 대체 말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진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팬을 향해 희미하게 웃고는 후다닥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향해 내뿜는 무서운 기세보다도 그들 손에 들린 핸드폰이 신경 쓰였다. 버스 창문엔 짙은 선팅이 되어 있었지만, 이진은 일부러 인도 쪽이 아닌 차도 쪽 좌석에 앉았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승현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자정이 넘은 새벽, 바깥의 빛이라곤 희미한 가로등과 신호등이 전부인데도 굳이 커튼을 치고 있는 이진이 이상해 보였던 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야. 그냥 졸려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아니래도. 근데 너 다른 자리로 안 가?”
“버스 내부엔 카메라 없대요. 전 백미열 옆에 앉기 싫어요.”
승현은 아예 이진의 옆자리에 앉아서 가려는 건지 아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진은 눈알을 한 바퀴 굴리고는 이내 승현처럼 편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그때 잠잠하던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5위 축하해요! 앗 이건 스포일러인가? 홍서한테 들었어요. 오늘 촬영 수고했어요. 방송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늦은 시간에 피곤할 텐데 힘내세요! -강해인-]
대선배로부터 받는 응원 메시지에 이진은 조금 경건한 자세로 타닥타닥 답장을 입력했다. 그 모습을 승현이 곁눈으로 지켜봤다.
“누구에요?”
“시티 로열에 강해인 선배님.”
“형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전에 만났어.”
승현은 ‘흐음.’ 하고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진은 만족할 만한 답장을 전송한 뒤 해인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봤다. 배경 사진은 콘서트에서 찍은 듯한 멤버들과의 단체 사진이고, 프로필 사진은 본인의 화보였다.
덜컹, 하고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친해요?”
“아니.”
이진은 승현의 질문에 대충 답해 주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만족스러운 ‘흐으음.’ 이 들려왔다. 이진은 그게 웃겨서 조금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이었다. 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승현아, 찬우가 너랑 내가 그거 하는 것 같대.”
“뭐요?”
“그…… 연애.”
우리가 연애하는 것 같대. 이진은 누가 들을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다행히 차가 달리며 들리는 소음이 주변 대화 소리를 모두 차단해 줬다. 버스 전등도 꺼져서 딱 자기 좋은 환경이 됐다. 승현은 피식 웃더니 간단하게 답했다.
“또 헛소리했구만.”
“그렇지?”
“헛소리는 찬우 형을 따를 사람이 없죠.”
오래도록 신경 쓰였던 일을 승현은 손쉽게 헛소리로 일축해 버렸다. 이진은 그 태도가 어쩐지 서운했다. 그러나 서운한 이유를 곱씹기도 전에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 근데 저번에 하려던 말이 뭐예요?”
“언제?”
“대전에 행사 갔을 때요. 그때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요.”
그날 이진은 ‘너는 왜 고백 안 해?’라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는 승현이 이진에게 은밀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다 믿고, 그걸 들춰 보고 싶은 기묘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방금 전 헛소리 타령에 김이 빠져 버렸다.
“그런 게 있어…….”
“뭔데요?”
“헛소리는 한찬우보다 선승현이 더 심하다고 말하려고 했나 봐.”
이진이 퉁명스레 답하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잠깐 눈을 감고 텅 빈 도로를 달리는 버스에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이진은 창문에 머리를 박은 채 깨어났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승현도 옆자리에서 고개를 푹 꺾고 자고 있었다.
멍한 눈을 비비적거리던 이진은 손가락으로 승현의 머리통을 슬쩍 건드려 등받이에 기대어 주고 다시 꿈나라로 떠났다.
“도착했습니다. 내려서 숙소 배치도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얼마 뒤 이진은 스태프의 외침을 듣고 퍼드득 깨어났다. 어쩐지 어깨가 묵직하다 싶더라니 승현의 머리가 올라와 있었다.
“승현아, 일어나.”
“아직…… 했는데요…….”
“잠꼬대하지 말고 일어나. 아니면 나 나가게 비켜 봐.”
이진이 몇 번 흔들자 승현이 웅얼웅얼 뭐라고 잠꼬대를 했다. 그 역시 너무 졸려서 잠꼬대를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다. 수십 명의 좀비 떼가 우르르 버스 밖으로 내렸다. 밤바람을 쐬니 그나마 잠이 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이번 라운드의 촬영지는 서울 인근의 폐교였다. 폐교라고는 해도 학생 수가 줄어들어 고작 몇 년 전 옆 학교에 흡수되었을 뿐이라 시설은 깔끔하고 좋았다. 방송국이 싼값에 사들여 세트장으로 알차게 써 먹는 곳으로 리모델링 당시 일부 학생을 위한 기숙사도 지어 뒀던 터라 촬영에 딱 좋았다.
이 숙소도 4인실이라 반과 포지션을 고려해 세 명에서 네 명의 그룹으로 짝지어졌다. 블루 반의 보컬 포지션인 이진은 지흔과 미열, 희영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이번 라운드부터는 첫 주차 촬영분이 딜레이 없이 첫 주에 방영됩니다. 카메라를 늘 유의해 주세요. 또한 사전에 안내 드렸다시피 2주 뒤 있을 공방은 생방송이니 모두 컨디션을 너무 해치지 않도록 합시다!”
저번 주까지는 순위 발표식과 함께 비하인드 신을 보여 주며 나름의 유예 기간을 두었으나 참가자가 많이 줄었기 때문에 점점 자유 시간을 많이 주기보다 거의 완성된 대본을 주고 분량을 뽑아내는 식으로 편집 방식이 바뀌었다. 또한 막바지에 갈수록 긴장감을 주기 위해 4라운드 2주차의 공방은 생방송으로 송출된다.
마지막 공지가 끝나자 참가자들은 드디어 해산하고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형, 그거 알아요? 여기 학교에 귀신 나온대요!”
“응?”
연장자 우대로 가장 먼저 씻고 옷을 갈아입은 이진이 이불 속에 파묻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씻을 차례를 기다리던 지흔이 앞에 와서 알짱거렸다. 무어라 호응해 주고 싶긴 했으나 이진 기준에선 이미 꿈나라로 떠나고도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라 몹시 피곤하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여기서 예능 촬영 많이 했는데, 할 때마다 귀신 봤다는 사람이 꼭 하나씩은 나왔나 봐요. 그래서 여름엔 납량 특집 같은 것도 많이 찍으러 온대요.”
“그렇구나. 나 먼저 자도 될까?”
침대와 한 몸이 된 이진이 가물대는 의식을 부여잡고 답했다. 즐거운 정보를 공유하고자 눈을 빛내며 다가왔던 지흔은 그의 철벽에 부딪히고 터덜터덜 떠났다. 지흔은 이진 다음으로 씻고 나온 미열에게 다가가 같은 정보를 전달했다.
‘미친, 그런 거 말하지 마! 찝찝하잖아!’
이진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미열의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미리 지시받은 대로 참가자들은 마치 등교를 하듯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고 교실로 모였다.
핑크반과 블루반의 상징 색에 따라 사소한 소품이나 인테리어가 달랐는데 핑크반의 교탁엔 분홍 튤립이, 블루반의 교탁엔 푸른 수국이 담긴 화병이 놓여 있는 식이었다.
“야, 1교시 뭐야?”
“실용 음악 개론?”
“뭐야. 우리 지금 고등학생이야. 학식 냄새 좀 빼고 와라.”
“아니, 나는 예고 컨셉으로 답한 거거든?”
본격적으로 교실에 입성하자 고등학교의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는지 하나둘씩 모여 ‘급식 뭐야?’, ‘담임 언제 와?’ 하며 고등학생 콩트를 진행했다. 찬우와 주헌, 동규는 다 같이 늦잠을 잤는지 촬영장에 지각을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야, 야. 나가서 지각이다, 외치면서 다시 들어와.”
“헉. 촬영 시작했어?”
미열의 농담에 찬우는 헐레벌떡 나가 우다다 복도를 달렸다. 그리고 쾅,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외쳤다.
“세이프!”
“세이프 아니잖아! 지각이잖아!”
“담임 오기 전까진 세이프지.”
그리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이진의 뒷자리에 앉았다. 그때 교복을 입은 제작진이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장이랑 부반장! 선생님이 너희 반에 공지하고 옆 반에 전달 좀 해 달래.”
“반장이 누구야?”
설정 상 반장은 순위대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블루반 반장은 2위인 찬우고, 부반장은 5위인 이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