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마지막으로 이번 라운드의 톱 7명에게는 음악 방송 출연과 함께 웹 매거진의 인터뷰와 화보 촬영의 기회를 드립니다.”
인터뷰는 오해와 논란을 직접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예상외로 파격적인 부상에 참가자들이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이번에 노래 다 좋다. 너 어느 팀 갈 거야?”
“난 분홍색이 좋긴 한데.”
“그치? 나도 핑크반이 좋아.”
옆자리에서 하늘과 승현이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로 핑크반의 경쟁률이 높았다.
“왜? 난 블루가 좋아. 단체 안무 화려한 게 재밌지 않아?”
“형은 블루 팀 가든가.”
찬우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단숨에 튕겨져 나갔다. 하늘은 킥킥 웃다가 이진을 향해 속삭였다.
“이진이 형은? 어느 반이 좋아?”
“핑크반.”
“어떡하지. 벌써 경쟁자 완전 많아.”
“형은 보컬할 테니까 경쟁 상대 아니지. 반은 포지션끼리 나눈다잖아.”
“아, 그러네. 형 꼭 핑크반에서 보자!”
하늘이 씩 웃었다. 성우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곧바로 포지션 선택이 시작됐다. 승현부터 차례로 나가 원하는 포지션으로 향했다.
가장 처음 승현은 당연히 댄스 포지션이라 적힌 팻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찬우도 당연히 승현과 같은 곳으로 갔다. 그런데 하늘에 이어 우진까지 댄스 포지션으로 가고 나니 어째 모양이 이상해졌다. 저기에서 반이 나뉘기는 하겠지만 포지션끼리의 경쟁도 팀 점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에 벌써부터 댄스 포지션이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형, 그냥 이리 와요. 형 춤도 잘 추잖아요.”
“그래, 이진아. 이리 와!”
승현과 찬우가 놀리듯 이진을 불렀다. 이진은 안면 몰수하고 댄스 팀으로 향할까 싶다가 당당히 보컬 포지션으로 걸어갔다. 5위인 이진이 가장 높은 순위라니. 주목이야 확실히 끌겠지만 그만큼 책임질 것들도 많아질 것 같았다.
다행히 이진 바로 다음 순위의 강지흔과 강재규가 연달아 보컬 포지션으로 들어왔다. 제이슨, 허동규, 리웨이는 댄스 팀으로 향했고 미열이 보컬로 들어왔다. 그 뒤로는 크게 쏠림 현상 없이 골고루 분포되었으나 여전히 댄스 팀에 사람이 더 많았다.
결국 마지막 네 명은 선택권 없이 보컬 팀에 들어오게 되었다.
포지션이 정해지자 핑크반과 블루반을 정하는 게임이 진행됐다. 이번엔 평소의 맨손 게임이 아니라 게임기와 게임팩이 필요한 진짜 게임이 등장했다.
“와, 저거 발매한 지 얼마 안 된 게임기인데.”
“이것도 협찬인가? 광고?”
갑자기 게임기를 보니 반가운지 이곳저곳에서 나지막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번 게임의 룰은 아주 간단했다.
하나, 각 포지션에서 제비뽑기로 두 명씩 짝을 지어 게임을 한판 한다.
둘, 이기는 사람이 반을 정한다.
셋, 플레이할 게임은 랜덤으로 정한다.
우선 다 같이 제비를 뽑았다. 확인해 보니 이진은 재규와 게임을 하게 되었다. 게임은 1위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해 가장 먼저 승현과 승현의 짝인 찬우가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하하! 선승현, 넌 딱 봐도 게임은 초딩 때 단풍잎 좀 깔짝이다가 관뒀을 상이다. 곧 이 형님에게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찬우가 목을 우두둑 우두둑 돌리며 승현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진은 단풍잎이 무슨 게임인지 잘 몰랐으나 주변에서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보고 적당히 호응했다.
“어떻게 알았어?”
“너 철봉 엄청 잘하잖아! 집에서 컴퓨터 안 하고 놀이터에서 뛰어 논 게 뻔하지! 하하, 건전한 네 어린 시절을 후회하거라!”
그리고 찬우의 유치한 도발이 예상외로 정곡을 찔렀는지 승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컨트롤러를 잡았다.
그때 뒤에서 미열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야. 쟤 저거 구라야. 선승현 게임 엄청 잘해.”
“왜 거짓말을 해?”
“거짓말은 아닐걸? 온라인 게임은 안 하는 것 같더라. 대신 쟤네 집에 어지간한 콘솔 게임 다 있어.”
그러나 승현과 찬우가 대결하게 될 게임은 자동차 경주였다. 자동차 운전대 모양의 추가 부품에 컨트롤러를 끼운 찬우가 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승현아, 너 면허 있어?”
“차도 없으면서 면허는 무슨.”
“차는 없어도 면허는 따야지! 면허도 안 따고 뭐 했어? 하하하!”
찬우가 마구 놀려 대도 승현은 어이없다는 표정만 짓고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준비가 완료되자 대형 스크린으로 전송된 게임 화면에 여덟 대의 차가 나타났다.
플레이어 시점에 맞춰 화면이 두 개로 분할되었는데 왼쪽 화면은 승현의 버섯 캐릭터가 탄 빨간 차를, 오른쪽 화면은 찬우의 거북이 캐릭터가 탄 파란 차를 보여 줬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노란불, 그리고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부우우웅 하고 빨간 차와 파란 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당연히 면허의 유무가 레이싱 게임 승패를 좌우하지는 않았다. 승현과 찬우는 비등비등한 속력으로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보였다. 적어도 직전 차선까지는 1위에서 4위까지의 선두 라인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순위를 유지했다.
한 3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길이 비포장도로로 바뀌더니 어느새 두 차량은 좁은 산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게 되었다.
“으랴압!”
가속 아이템을 먹은 찬우가 속력을 높여 승현을 앞질렀다. 승현은 침착학데 바나나 아이템을 급커브 구간 초반에 떨구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찬우는 커브 구간에서 드리프트를 이용해 아슬아슬 절벽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묘기 주행을 보이며 1위를 유지했다. 승현은 2위와 3위를 다투며 가속 발판과 코인을 먹으며 차분하게 커브 길을 돌았다.
커브 길이 끝나기 직전, 드디어 가속 아이템을 먹은 승현이 안쪽 길로 파고들며 찬우의 파란차를 길 밖으로 밀어 내려 시도했다.
“선승현 또 기술 쓰네?”
“저게 먹히나?”
안 먹혔다. 오히려 무게가 더 나가는 찬우의 캐릭터가 승현의 캐릭터를 밀어 벽면에 부딪히게 만들었다. 미열은 승현이 게임을 잘할 거라 했지만 찬우의 컨트롤을 이길 순 없었다.
“게임 종료! 한찬우 승!”
승현은 마지막 코스에서 아슬아슬하게 찬우를 따라잡긴 했으나 결국 찬우의 파란 차가 조금 먼저 결승선을 넘고 말았다.
“저는 블루반 가겠습니다!”
누가 이기나 서로 가고 싶은 반이 달랐기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반이 정해지고 나자 찬우는 블루반의 상징인 하늘색 리본 타이를, 승현은 핑크반의 상징인 분홍색 넥타이를 받았다.
다음은 하늘과 리웨이 차례였다. 두 사람은 유명한 게임 캐릭터들을 모아 둔 일대일 대전 액션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었다. 하늘은 녹색 공룡 캐릭터를 선택하고 리웨이는 왕관을 쓴 공주님 캐릭터를 선택했다.
대전이 시작되자 하늘의 공룡이 뿅 뛰어올라 꼬리로 리웨이의 공주님을 후려쳤다. 리웨이는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며 공격을 피해 보다가 내려찍기로 공룡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룡은 가볍게 뒤로 피하더니 혀를 쭉 내밀어 공주님을 입 안에 꿀꺽 집어넣었다가 휘익 뱉어 버렸다.
“어, 추락했어!”
“추락하는지 몰랐어요!”
공룡에게 먹혔다 뱉어진 공주님은 어이없게도 그대로 경기장 밖으로 떨어져 버렸다. 리웨이가 억울한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삼판 2승제라 다음 기회가 주어지긴 했다. 그러나 다음 라운드에서도 리웨이의 공주님은 얻어맞기만 했다. 하늘이 잘하기보다는 리웨이 캐릭터가 몹시 버벅거렸다.
결국 깔짝대면서 게이지를 모두 채운 공룡이 필살기를 시전하면서 두 번째 라운드도 하늘의 승리로 돌아갔다.
“핑크반으로 가겠습니다.”
하늘은 앞서 말한 대로 핑크반을 선택했다. 당당히 분홍 넥타이를 착용한 하늘이 승현의 옆으로 달려갔다.
다음으로 이어진 이우진과 남주헌의 대결도 몹시 싱겁게 끝났다. 이 둘도 하늘과 리웨이가 했던 대전 게임을 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우진이 게임을 엄청 잘했다.
우진은 아하하, 웃으며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주헌의 캐릭터를 작살냈다. 평소의 겸손한 태도에 묘하게 거만한 기색이 어리는 걸 보며 이진은 역시 사람은 한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홍 팀을 선택하겠습니다.”
우진도 당당히 분홍 넥타이를 받아들었다. 다음은 이진과 재규의 차례였다. 이진은 분홍 넥타이를 맨 세 명을 흘끔 바라보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이기면 저들과 함께할 수 있고, 지면 남주헌이다. 극단적인 환경을 만들어 놓으니 한껏 사기가 끓어올랐다.
“아, 이진이 형 너무 쉽게 이길 텐데. 형 괴롭힌다고 욕먹는 거 아니야?”
“조용히 해.”
이진이 각오를 다지며 어깨를 풀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쟁자인 재규도 그를 놀려 댔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서로의 게임 실력을 알고 있었다. 1라운드 때 별의별 촬영을 하면서 여러 차례 비슷한 게임을 함께해 봤기 때문이다.
사실 이진이 살면서 해 본 게임이라고는 수강 신청을 하러 간 PC방에서 9시 정각을 기다리면서 한 리듬 게임이 전부였다. 이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번엔 행운의 여신이 이진의 편을 들어 주려는지 둘은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컨트롤러를 쥐고 음악에 맞춰 춤을 따라 추면 얼마나 정확히 박자를 맞췄느냐에 따라 점수가 정산되는 게임이었다. 어쨌든 앞의 두 게임보단 나았다.
신난 이진이 작게 주먹을 쥐고 흔들자 또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규는 투기를 불태우는 이진을 보며 피식 웃더니 손짓했다.
“형, 그거 그렇게 잡는 거 아니야.”
“어? 그럼?”
“이리 와 봐.”
이진이 컨트롤러를 쥐고 다가가자 재규가 컨트롤러에 줄을 달아 손목에 매어 주며 중얼거렸다.
“설마, 리듬 게임이라고 형이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중얼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명백히 카메라를 의식하고 한 말이다. 이진은 재규의 능청에 웃음이 터져 어깨를 밀어 내며 외쳤다.
“나 무시하지 마!”
“형, 하늘색 리본 잘 어울리겠는데?”
재규가 계속해서 도발을 했으나 이진은 더 넘어가지 않고 준비 운동을 했다. 노래가 재생되고 화면에는 승마복을 입은 캐릭터 둘이 나와서 슬금슬금 움직이며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윌리엄 텔 서곡. 리듬 게임치고는 고상한 선곡이었다.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들으며 이진은 머릿속으로 현대 무용스러운 동작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춤이 시작되고 나서 이진은 자신의 생각이 완전 틀렸음을 깨달았다.
두 캐릭터는 위로는 승마 기수를, 아래로는 말의 다리 움직임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두 손은 고삐를 잡은 듯 위아래로 흔들리고 다리는 말처럼 다그닥 다그닥 좌우로 박자에 맞춰 쭉쭉 뻗어 댔다.
“이게 뭐야!”
“저 바지가, 바짓가랑이 터져요!”
이진이 우스꽝스러운 춤에 경악하는 동안 재규는 타이트한 바지를 붙잡으며 제작진을 향해 외쳤다. 몸소 망가지는 동료들을 보며 구경꾼들은 신명나게 웃어재꼈다.
이 부끄러운 짓거리를 모두 끝내고 나자 둘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흰 바지가 아니었기에 먼지 묻을 걱정이 덜했다. 재규와 나란히 무릎을 꿇고 기다리니 화면에서 점수가 집계되어 나왔다.
“야호!”
그리고 결과는 이진의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