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12화 (112/173)

112화

“5위. 뛰어난 실력,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으로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은 참가자입니다. 이번 라운드에선 안 좋은 일을 당한 탓에 많은 시청자분이 마음 아파하셨죠. 이분의 부상 투혼에 저도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유이진 참가자! 축하합니다.”

8위에서 5위. 나쁘지 않은 상승이었다. 1라운드와 3라운드의 팀 점수 비율이 다르단 걸 감안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진은 5위에 만족하고 또 안심했다.

그때 불현듯 무언가 이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재 발표되지 않은 합격자 수는 총 다섯. 그중 마지막 합격자를 제외하고 남은 수는 넷. 그리고 같은 팀에서 아직 순위가 발표되지 않은 사람은 총 둘, 선승현과 이우진이다. 이진은 근처에 선 우진을 돌아봤다.

‘설마…….’

이진이 생각을 더 이어가기 전, 4위 발표가 이어졌다.

“4위는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 참가자입니다. 이 참가자가 성장한 만큼, 순위도 엄청난 상승세를 보였는데요.”

4위를 암시하는 홍서의 멘트에 그제야 다른 참가자들도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여기저기서 놀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들려왔다.

“대역전의 주인공 이우진 참가자! 축하합니다!”

이름이 불리자마자 우진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여태까지 이름을 불리지 않았으니 당연히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몰아치는 감정을 참기 힘든 듯 보였다. 우진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여러 사람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진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란히 선 대열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와 와락 껴안았다.

“형! 전부 형 덕분이에요!”

이진은 지금 얘가 날 먹이는 건가 깊은 고민이 됐지만, 기뻐서 우는 애한테 정색할 수 없어 우진을 마주 안아 줬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노력해 봤지만 좀처럼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추월당했다는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더 커서 자꾸만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유이진 씨는 이우진 씨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로 많은 도움을 주었죠.”

그렇게 생각하면 내 순위를 더 높게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우진이 이진을 만족할 만큼 끌어안은 뒤 제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순위 발표가 이어졌다.

3위는 정하늘이 차지했다. 최상위권 세 사람의 순위는 그대로 변함이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이미 우진이 4위까지 치고 올라온 데다가 5위의 이진도 막강한 상대였다. 또한 하늘이 3위로 떨어진 것은 승현이 2위권 내로 진입했다는 뜻이다.

현재 승현은 일반인 출신 참가자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순위를 갱신 중이었다.

“그러면 대망의 1위 후보를 공개합니다!”

모두의 예상대로 선승현과 한찬우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떠올랐다. 승현은 의연한 무표정을, 찬우는 당당한 미소를 띠고 각자 정면을 응시했다.

“운 좋은 천재라는 이미지 뒤에 가려졌던 노력, 무심한 인상 속에 숨겨졌던 다정한 관심이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매번 팀을 최고의 결과로 이끌었던 리더, 선승현 씨에게 3라운드 1위의 영광이 돌아갑니다. 축하드립니다!”

***

“얘들아, 고기 먹으러 자주 와. 삼촌이 서비스 많이 준대!”

3라운드 마지막 합격자는 이진영으로 윌리엄은 안타깝게 이번 라운드에서 탈락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탈락했지만 이진과 친구들은 윌리엄의 곁에 모였다. 1라운드에서 윌리엄이 끊임없이 격려해 준 고마움이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야, 너희가 이렇게 챙겨 주니까 이상하다! 우리 마지막으로 파이팅 한번 할까?”

“그러지 말고 자주 연락해. 한국에 있을 거지?”

하늘이 묻자 윌리엄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우선은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돌아가 있으려고. 모델 일도 좋지만 새로운 사업도 생각 중이고.”

윈올이 한창 방영 중인 지금, 탈락자를 굳이 모델로 기용할 광고주는 없었다. 특히 윌리엄이 원래 활동하던 업계는 모델 개인의 캐릭터가 상품보다 부각되는 게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는지라 윈올 참가 이력이 한동안 모델 활동의 걸림돌이 될 테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윌리엄은 당분간 휴식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다 듣고도 동생들의 얼굴이 펴지지 않자 윌리엄은 팔을 넓게 뻗어 그들을 양팔에 끌어안았다. 어쩌다 보니 가장 근처에 서 있던 이진과 승현이 그의 오른팔과 왼팔에 각각 갇히게 되었다.

“그거 알아?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 난 이 미친 경쟁 사회에 맞지 않나 봐. 이렇게 잘 견디는 것만 해도 대단해, 너희.”

줄곧 울상이던 하늘이 윌리엄의 품으로 들어가 그를 꼭 껴안았다.

“형, 더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해.”

하늘은 1라운드에서 윌리엄과 많이 친해졌지만 그 이후로는 같은 기획사 출신 동료를 챙기기 위해 회사에서 정해 준 콘셉트를 소화해야 했다. 그들은 하늘이 막내 이미지로 굳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 또래들과 어울리도록 시켰고, 승현만이 아슬아슬하게 기준에 부합했다.

윌리엄이 분량을 챙기지 못하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묘하게 겉돌았을 때, 먼저 손 내밀지 못했던 게 하늘에게 큰 미안함으로 남았다.

이진은 그간 제 앞가림만도 바빴다. 그래서 하늘처럼 울먹일 만큼의 미안함이나 슬픔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진영을 떠나보낼 때와는 다른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막고 싶은 상실감에 가까웠기에 이진은 감상적으로 굴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에게는 그것조차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거라 생각했다.

“응원할게, 얘들아. 너무 힘들어하지만 마.”

4라운드 촬영이 곧 진행되어야 했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이별의 시간은 몹시 짧았다. 윌리엄은 끝까지 동료들을 격려하며 나갔다.

그가 떠나고도 네 사람은 흩어지지 않았다. 승현만이 윌리엄을 배웅하고 오겠다며 함께 자리를 비웠다.

“이진아, 많이 충격적이냐?”

“응? 아니, 그냥. 왜?”

“너 안색이 별로 안 좋아서. 어디 아픈가?”

미열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이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려 봤지만 쉽지 않았다.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해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난 김진영 하차한 것도 그렇고, 윌리엄 이렇게 떨어지는 것도 그렇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게 프로그램 기획이 이렇게 되어 먹은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건 아는데, 그냥.”

“우리 다 방송 처음이었잖아. 다 같이 헤매고 멘붕하고 난리였을 때 같이했으니까 더 특별하기도 하지. 너희는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 너희는 전부 특별해.”

“형들…… 나 이런 말에 약한 거 알면서.”

미열이 심란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탄하듯 털어놓자 찬우도 답지 않게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진지한 대화도 잠깐이고 곧 촬영이 재개되는 바람에 다들 밝은 미소로 침통한 얼굴을 가리기 급급했다.

촬영이 시작했지만 이진은 문득 지금에라도 윌리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고 느꼈다. 아니면 적어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다시 한번 말했어야 했다고,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승현이 정면 카메라 앞에서 슬레이트를 내리쳤다. 임무를 마친 승현이 자리로 돌아와 앉자 바로 긴장감이 도는 음악이 나왔다. 순위에 따라 자리가 배정되었기에 승현은 맨 앞줄 가운데, 이진은 그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4라운드에 생존하신 여러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낮게 깔린 성우의 목소리가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 라운드의 컨셉은 만남과 이별입니다.”

유니폼이 왜 바뀌었나 했더니 4라운드의 배경은 고등학교였다. 옆에서 하늘이 작게 ‘오예!’ 하고 외치며 좋아했다. 이진은 하늘을 무시하고 설명에 집중했다.

각 참가자들은 4라운드의 순위 순으로 보컬과 댄스 포지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포지션 내에서 두 명씩 게임을 해 이긴 사람이 ‘핑크반’과 ‘블루반’ 중 어디에 갈지 정한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선택하지 않은 반으로 가야 한다. 한 반에 7명의 보컬과 7명의 댄스 포지션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핑크반은 ‘만남’ 컨셉의 곡을, 블루반은 ‘이별’ 컨셉의 곡을 공연하게 됩니다.”

핑크반이 공연할 곡의 제목은 ‘핑크빛 여름’으로 멜로디가 경쾌하고 밝았다. 보컬의 음역대가 높지만 댄스는 동선이 복잡하지 않았다. 반면, 블루반이 공연할 곡은 ‘굿바이 블루’로 음역대가 편안한 대신 서글프고 감성적인 멜로디를 표현할 보컬 스킬을 필요로 했다. 안무는 대부분 동선 이동과 단체 대형 위주로 이뤄졌다.

물론 개개인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진은 무조건 핑크반으로 사람이 많이 몰릴 거라 직감했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니 계절감이 물씬 느껴지는 노래가 인기를 얻을 것이다. 당연히 ‘핑크빛 여름’이 음원 점수를 따기 유리했다. 그리고 1라운드부터 3라운드까지 쭉 지켜본 결과, 대체로 발랄한 곡의 등수가 높았다.

“각 반에서는 두 개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보컬 포지션으로만, 그리고 댄스 포지션으로만 이루어진 무대. 보컬 팀의 무대는 안무가 필요 없었고 댄스 팀의 무대는 립싱크가 가능했다. 매번 풀 라이브에 격한 안무까지 소화해야 했던 참가자들에겐 희소식이었으나 그만큼 무대 준비 기간이 짧아졌기 때문에 앞 라운드들과 비교했을 때 마냥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어쨌든 무대의 안정성 자체는 대폭 높아진 데다 각자의 특기에 집중 어필 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다만 이번 라운드의 팀 점수는 아주 세세하게 매겨졌다. 핑크반과 블루반 중 이긴 쪽에게 가산점을 주고, 거기에 보컬 포지션과 댄스 포지션 중 더 많은 호응을 얻은 쪽에게 추가 가산점을 주었다.

만약 핑크반이 이기고 댄스 포지션 무대가 더 많은 호응을 얻었다면 핑크반의 댄스 포지션의 팀 점수가 1위, 핑크반의 보컬 포지션이 2위, 블루반의 댄스 포지션이 3위, 블루반의 보컬 포지션이 4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추가적으로 두 반에서 대표들을 선정해 추가 무대를 공연하게 됩니다.”

각 반을 상징하듯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나뉘어 있던 스크린 속 화면이 이리저리 뒤섞이며 보라색을 만들어 냈다.

세 번째 무대에서 공연할 곡은 ‘퍼플 러브’라는 제목으로, 영화의 엔딩곡처럼 밝은 멜로디에도 감정이 벅차오르는 편곡이 특징이었다. 핑크빛 여름이 팝 록 장르이고 굿바이 블루가 발라드라면 퍼플 러브는 록 발라드에 가까웠다.

그러나 분명히 7인을 기준으로 한 안무가 존재했는데 이 포지션은 처음 공연자를 뽑을 때부터 고정되어 바꿀 수 없었다. 즉, 보컬 포지션이 댄스 브레이크를 해야 할 수도 댄스 포지션이 메인 보컬을 소화해야 할 수도 있었다.

게임을 통해 선발된 7명만이 공연할 수 있는 데다가 팀 점수에 합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번외 공연이라 할 수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못난 무대를 보여 주느니 차라리 안 하고 마는 게 나았다.

우선 선발되고 나면 두 곡의 퍼포먼스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도록 죽을 듯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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