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11화 (111/173)

111화

이진이 저걸 노려봐 말아 고민하고 있을 때, 승현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 왔다.

“형, 저 질문 있어요. 형은 아이돌 안 했으면 뭐 했을 거였어요?”

“뭐?”

“이렇게 잘생겼는데 아이돌 안 했으면 뭐 했을지 궁금해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련한 스타일리스트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물었다.

“그게, 무슨……. 갑자기 웬 헛소리야.”

“역시 작곡가? 작곡과였댔죠? 형이 만든 노래 듣고 싶어요.”

“승현 씨, 저기 자리 비었네. 얼른 가서 메이크업 받고 오자.”

이진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 적절한 중재가 들어왔다. 어차피 순서를 기다리던 중이었던 승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형, 이따 봐요.”

손까지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진은 도대체 쟤가 왜 저러나 고민하다가 이내 승현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를 보는 스타일리스트의 눈빛이 달라진 것이다. 두 사람이 눈앞에서 싸우길 바라듯 초롱초롱 빛나던 눈빛은 어느새 의외의 상황에 대한 흥미로움으로 변해 있었다.

아마 승현도 자신이 들어서면서 달라진 대기실의 분위기를 느꼈을 테다. 그래서 일부러 이진과 친한 티를 내며 소문이 불어나는 걸 잠재우려 해 본 것이 아닐까. 작은 행동이었지만 사소한 일을 과대 해석 하는 경향이 있는 업계이니만큼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이건 친한 티야, 아니면 친한 척이야?’

이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이크업이 마무리되자마자 급하게 대기실을 벗어났다.

***

본방송 리액션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참가자와 멘토 모두가 모였다. 이번 편은 하이라이트 회차로 뮤직비디오 촬영부터 본 무대까지 한 번에 훑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최근 큰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사람의 갈등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온 회차이기도 했다. 바로 저번 편에서 이진이 승현을 구하고자 몸을 던지고 승현이 그런 이진을 번쩍 들어 침대로 옮기는 장면이 방송됐지만, 그때의 감동은 이번 편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승현이는 좋은 동생이죠.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그런데 마지막까지 같이 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음. 하하.

이진의 인터뷰 다음, 그가 사소하게 승현을 거절하는 장면이 연속되어 편집되었다. 정작 본인은 기억도 안 나는 순간부터 분명히 감정이 실렸던 순간까지. 대체 어떻게 찾았는지도 모를 장면들이 연달아 나오는 걸 보니 기가 질렸다.

-이진이 형은 우선 실력이 너무 대단하니까, 처음엔 동경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형한테는 벽 같은 게 있거든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노력도 많이 했지만 제가 아무리 다가가도 마음을 열어 주지 않으니까……. 뭐, 글쎄요. 아마 제가 밉보인 거겠죠.

그 뒤로는 승현과 이진이 부딪히는 장면들이 나왔다. 평범하게 눈이 마주치거나 안무 연습 중 동선이 꼬여서 생긴 사소한 접촉 사고들. 승현이 배식을 받아 왔더니 이진이 일어나서 나가 버리는 우연까지 한데 편집되니 정말 이진이 승현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형을 존경하긴 하지만 절 싫어하는 사람이랑 오래 함께하고 싶지도 않아요.

다리에 쥐가 난 이진이 몸부림을 치다가 팔꿈치로 승현의 광대뼈를 찍어 버린 장면까지 등장했다. 마치 몸싸움처럼 편집되어 이진은 내심 억울했다. 애초에 선승현이 멋대로 굴지 않았으면 저런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텐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엔 다분히 고의성이 느껴지는 편집이었다. 이진의 곁에 앉은 참가자들도 놀라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 댔다.

방송을 보는 표정까지 카메라에 속속들이 찍히고 있었지만 이진은 굳이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전에는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지만 이제는 적당히 자극적인 편집에 일조해야 했다.

1라운드와 2라운드를 훑던 회상에서 다시 3라운드로 돌아왔다. 찝찝한 ‘서로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이란 자막이 뜨고 다시 인터뷰가 나왔다.

-딱히 크게 바라는 건 없어요. 승현이가 우리의 차이를 이해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이진이 형이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 줬으면 좋겠어요.

다시 자막이 떠올랐다. ‘내기를 철회할 의사는?’ 이번에는 이진과 승현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이진부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떤 대답을 드려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그저 마지막까지 제 가치를 증명해서 절 뽑아 주신 게 후회 없는 선택이었단 걸 보여 드리고 싶어요.

화면 속 이진이 분명히 말했다. 그는 담담하게 진심을 말했다. 솔직하고 단호한 태도에서 오는 호소력은 몹시 짙었다.

모든 순간이 단편적으로 편집되는 방송 특성상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여태까지 이진이 쌓아 온 이미지는 다소 평면적이었다.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에 아이돌이란 편견에 가둘 수 없는 뛰어난 실력,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수재. 그럼에도 약간은 허술한 성격이 매력 포인트인 유이진.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굳이 윈올을 통해 데뷔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진은 매사에 열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든 훌쩍 떠날 것 같은 이미지였다. 앞선 인터뷰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진이 세우고 있는 벽이 그를 참가자들 틈에 어우러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진 본인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다. 승현과 한 내기에 대한 변명조차 없었다. 그 점이 오히려 그를 더 떳떳하고 정정당당해 보이게 만들었다.

게다가 제작진이 여러 차례 노골적으로 갈등을 조장했기에 시청자들은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싸우라고 만든 프로그램인데 그까짓 내기가 뭐 어때서.’

얌전하던 이진이 보인 드물게 단호한 태도가 그 생각에 더 힘을 실어 주었다. 무엇보다 제삼자 입장에선 대놓고 벌어지는 싸움 구경이 몹시 재미있었다.

-철회라…… 글쎄요. 만약 제가 우승을 하게 된다면 형을 선택할 수도 있겠죠. 이진이 형은 그렇게 해 줄지 잘 모르겠지만요.

선승현은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목표가 단순히 데뷔가 아니라 우승이라 선포했다. 장내가 참가자들의 동요로 술렁였다. 은근슬쩍 덧붙인 말은 두 사람이 함께 데뷔하길 원하는 시청자들을 자극했다.

이진은 고개를 돌려 승현을 바라봤다. 이진이 바라본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승현이 곧장 이진을 마주 봤다. 그리고 씩 웃었다. 나만 믿으라는 자신만만한 미소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현재 두 사람은 제작진에 요청에 의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있었다. 이진은 미열과 찬우 쪽으로, 승현은 하늘과 하늘의 친구들 쪽으로 배치되었다. 그래서 승현의 곁에는 평소처럼 그를 쿡 찌르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줄 미열이 없었다.

이진은 눈싸움을 그만두고 먼저 시선을 돌렸다. 괜히 승현의 친구들을 뺏어 온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방송이 끝나자 곧바로 투표가 종료되었다. 최종 순위가 집계되는 동안에도 쉼 없이 다음 촬영이 이어졌다. 멘토들의 대표 격인 홍서가 단상 위에 올라와 방송 시청 소감을 말했다.

“최고의 무대를 만들기 위한 여러분의 노고가 정말 잘 느껴졌습니다. 시청하는 내내 뒤에서 반응이 들리는데, ‘아, 이 장면은 아주 짧게 나왔지만 여러분에겐 아주 인상 깊은 기억이었구나.’, ‘이 장면은 여러분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었겠구나.’ 그런 걸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가자들 쪽에서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종 순위 집계가 완료되었다. 참가자들이 편하게 앉아 있던 의자가 전부 수거당하자 홍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천천히 순위 발표를 시작했다.

4라운드에 함께 할 생존자는 28명이지만 발표는 27위부터 시작되었다. 악독하지만 아주 효과적인 연출이었다.

27위부터 차례로 이름이 호명됐다. 김순한, 차명준, 장조근. 그리고 남주헌과 임채일은 각 24위와 23위로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22위 고은준, 21위 박준현, 20위 윤기현, 19위 김태원. 승현의 예상대로 대형 기획사 소속 참가자들의 순위가 전체적으로 대폭 하락했다.

특히, 박준현과 윤기현은 하늘과 같은 바비 엔터 소속이었다. 하늘에게 묻혀 가듯 인기를 누리긴 했으나 일반인 참가자에 팬덤 규모가 크지 않은 김태원에게 밀릴 수준까진 아니었다.

“김태원 씨는 처음으로 10위권대로 진입하셨네요.”

“믿고 투표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꼭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태원은 이진과 같은 팀일 땐 늘 시큰둥했으나 4라운드까지 생존한 지금은 나름대로 욕심이 생긴 건지 태도가 꽤 빠릿빠릿해졌다.

그 뒤로 18위 최강희, 17위 나봄, 16위 민서호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됐다. 민서호는 엘리트 이미지가 굳어져 마땅한 활약 없이도 1라운드와 2라운드 모두 10위를 지켰다. 그러나 그 이미지의 효력도 슬슬 다해 가는 모양이었다.

장현기는 안정권이라 할 수 있는 15위에 안착했다. 14위는 박희영, 13위는 김보원으로 슬슬 3라운드에서 분량이 많았던 참가자들이 등장했다.

12위 두주형, 11위 백미열, 10위 리웨이. 미열은 저번 라운드보다 네 계단 상승했고 리웨이는 일곱 계단이 상승했다. 현기부터 시작해 리웨이까지 누가 봐도 3라운드 팀 평가 1위가 개인 평가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그리고 9위……. 슬슬 이진의 이름이 불릴 때가 다가왔으나 이번에 호명된 사람은 허동규였다. 이진은 저번 라운드 8위에 인기로 보아 탈락할 일은 없으니 늦게 불릴수록 높은 순위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이진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의 이름이 최대한 늦게 불리길 기도했다.

“다음은 8위입니다. 리더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지막엔 성숙한 태도로 팀원들의 지지를 얻은 참가자입니다. 제이슨 리 참가자! 축하합니다.”

저번 라운드에서 네 계단 하락했지만 폭력 논란을 일으킨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순위였다. 이진은 순위 하락이 8위에서 멈춘 걸 진심으로 축하해야 할 정도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이슨보다 더 축하해야 할 참가자가 있었다.

“7위, 강재규 참가자! 축하합니다.”

재규는 상당히 치명적인 인성 논란에 휩싸였으나 고작 한 계단 내려간 게 전부였다. 초반 상위권 참가자는 소속사에서 따라온 팬 이상으로 개인 팬이 많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 순위를 지켰다면 방어전에 충분히 성공했다 볼 수 있었다.

6위에는 강지흔이 올랐다. 강지흔은 일반인 출신은 아니지만 찬우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을 만큼 소속사의 힘이 약했다. 동정 여론이 더해진 덕인지 지흔은 이번 라운드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음에도 순위 상승을 맞았다.

이번 라운드에서는 대형 기획사 출신들 위주로 연달아 불거진 논란들 때문인지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배부른 대형 출신’과 ‘홀로 서기를 해야 하는 일반인 출신’의 대비되는 처지를 분석한 글이 여러 차례 언급 되었다.

그리고 그런 커뮤니티의 대표 의견이나 여론 흐름은 투표 결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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